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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이야기

동학혁명 120주년

by 석암 조헌섭. 2015. 1.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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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학혁명 120주년

 읊조리던 칼의 노래 '동학'으로 완성되다

동학혁명 120주년, 그 현장을 찾아서 ② 남원 은적암
최제우 수행하며 동학 이름 붙인 곳
교룡산성과 연계 동학혁명 성지로

 

윤석산 한양대 명예교수가 전북 남원시 산곡동 교룡산 자락의 은적암 터를

 가리키고 있다.

 1861년 수운 최제우는 관의 탄압을 피해 경북 경주를 떠나 이곳에 은신해

 수행하며 동학을 확립했다. 왼쪽 바위에 ‘山神之位(산신지위)’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 [프리랜서 공정식]

 

수운 최제우는 1861년 11월 경북 경주 용담정을 떠나 정처없이 발길을

옮긴다. 

유생의 압박을 받은 경주부가 동학을 혹세무민으로 규정해 수운을

 지목했기 때문이다. 수운은 울산·부산·진해·무주를 거쳐 두 달 만에

 남원으로 숨어들었다.

 지난 14일 전북 남원시 산곡동 교룡산성. 고찰 선국사를 지나 밀덕봉

 아래 은적암 터로 가는 산길을 올랐다. 돌계단이 놓인 700여m 산길은

 주변 풀이 깎이고 말끔히 정리돼 있었다.

 40분이 채 안 걸려 능선 아래 은적암 터가 나타났다. 주춧돌 흔적만

 남은 널찍한 절터에 표지판과 팻말 두 개가 서 있다.

 

 천도교가 세운 은적암 터의 내력을 적은 안내판과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인 용성 스님의 첫 출가지임을 알리는 팻말이다. 터 안쪽에는

 ‘산신지위’ 바위가 있다.

 첫눈에 봐도 기운이 예사롭지 않은 곳이다.

 이곳이 수운이 머문 두 칸짜리 덕밀암이다. 수운은 그 중 한 칸을 빌려

 은적암(隱跡庵)으로 명명했다.

 “은적암은 동학의 정체성을 밝힌 ‘논학문’을 쓴 곳입니다. 자신의

 가르침은 서학이 아닌 동학이란 것이지요.”

 

 그에 비하면 동학의 태동지 경주는 성역화 경북 경주시 현곡면 에 있는

 최제우의 묘. 윤석산(67) 한양대 명예교수는 “동학이라는 말 자체가

 여기서 처음 붙여졌다”며 “수운이 수행하며 동학을 완성한 곳”이라고

 설명했다.

 수운은 이곳에서 ‘권학가’ 등을 짓고 달이 밝은 밤이면 산정에 올라

 ‘칼노래(검결)’를 부르며 검무를 추기도 했다.

 

칼노래는 새로운 때가 왔음을 암시하는 노래다. 교룡산성은 후일 김개남

 장군이 이끄는 동학혁명군의 주둔지가 된다. 산성 아래 2005년 남원

 문화원과 남원 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가 세운 ‘동학 성지 남원’이란 

 등잔 위 호롱 모양의 조형물이 세워져 있다. 

 앞에는 칼노래 시가 책 모형에 새겨져 있다.

 남원시는 은적암의 인연을 성지로 조성한 것이다.

 호남이 동학을 대하는 자세의 일단이다.

그에 비하면노력이 매우 더딘 편이다.

 수운이 태어난 현곡면 가정리 생가는 지난 7월 겨우 복원돼 준공식을

 했다.

 흥미로운 것은 박정희 전 대통령과 동학의 인연이다.

 생가 입구에는 ‘수운 유허비’가 귀부 위에 세워져 있다.

 박 전 대통령이 1971년 직접 글씨를 썼다.

 이처럼 현곡면 용담정’ ‘성화문’ ‘포덕문’ 글씨도 마찬가지다.

그만큼 그는 동학에 애착을 보였다.

 박 전 대통령의 아버지는 동학의 조직책인 접주를 지낸 것으로 알려져

 있다.

 동학과 5·16은 ‘혁명의 대물림’이랄까. 박 전 대통령은 동학이야말로

 우리 사상이라는 데 일찍이 주목했다.

 생가 건너편 산에는 수운이 잠든 묘소가 있다. 도로에서 소나무 숲길을 1분쯤 올라가면 나타난다. 비석에는 ‘동학창도주수운최제우스승님묘’라

새겨져 있다.

 대구에서 참형 당한 수운이 사흘 뒤 수습돼 영면한 곳이다.

 묘소 왼쪽에 수운을 닮은 독특한 망주가 서 있다. 천도교의 한 분파인

 시천교가 세운 것이라고 한다.

가정리는 수운이 태어나고 동학을 창도한 뒤 비운으로 삶을 마감한

 동학의 ‘전부’가 있는 성지다. 그러고도 동학은 경주에서 신라의 거대한

 자취 앞에 묻혀져 있다.

자료발췌=송의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