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상화 거장 무관 석지(石芝) 채용신(蔡龍臣·1850~1941)
채용신 부부초상화
[무관→고종 어진(御眞) 화가→초상화 사업… 근대 초상화 거장 채용신 展]
채용신만의 기법을 무기로 - 터럭 하나 안 빠뜨리는 전통 기법에 서양화
기법 응용,
명암까지 뚜렷이
호남 유지들 초상화 시장 싹쓸이 - "사진과 똑같이 초상화 그리겠다"
사진관 하는 아들·며느리 동원, 사진 없으면 '출장 촬영 서비스'도 하였다.
1906년 종2품 가선대부(嘉善大夫), 종3품 수군첨절제사
(水軍僉節制使) 등을 지낸 56세의 무관(武官)이 관직생활을 마치고 선산(先山)이 있는 전북 지역으로 내려온다.
그는 관직에서 물러나면 한가로이 살았던 대부분의 양반들과는 달리 활발한 '비즈니스'를 펼친다.
고종(高宗) 어진(御眞)을 그렸던 이력, 타고난 화재(畵才)를 적극적으로 홍보하며 지역 유지들의 초상화를 제작해 '인생 이모작'에 성공한 것. 최근 작품'운낭자상'이 문화재
로 등록되기도 한 '근대 초상화의 거장(巨匠)' 석지(石芝) 채용신(蔡龍臣)·1850~1941)이다.
◇독학으로 고종의 초상화가가 되다.
1900년 선원전(璿源殿·어진을 모신 궁전) 중수를 결심한 고종은 선대의
어진을 채용신 작품 20여점을 통해 그의 삶과 작품세계를 만날 수 있다.
모사할 만한 화가를 찾는다. 대대로 무관을 지낸 가문의 자제로 독학으로
그림을 배워 어릴 때부터 '신동'으로 불렸고, 22세에 부친과 친분이 있던
대원군 초상을 그려 이름을 떨친 채용신이 물망에 오른다.
고종의 부름을 받은 채용신은 당시 도화서(圖畵署) 화원(畵員) 조석진과
함께 태조(太祖) 어진을 성공적으로 모사해 고종의 신임을 받는다.
이듬해 고종 어진을 그리면서 명실공히 '조선 최고의 초상화가'의 자리에
올랐다.
채용신은 고종 어진 초본(草本)을 가지고 있으면서 어진을 여러 번
모사했는데, 전시에는 원광대 박물관 소장 '고종황제 초상'이 나왔다.
터럭 하나까지 빠짐없이 묘사한 정밀함과 인물의 외양뿐 아니라 정신까지
담고자 한 전신사조(傳神寫照)의 화법은 조선 초상화의 전통을 따랐지만,
화면을 가득 채워 인물을 그리고 정면관을 취한 점, 얼굴에 자잘한 붓질을
거듭해 명암을 뚜렷이 한 점은 서양화의 영향을 받은 채용신 특유의
기법이다.
◇대가의 붓끝이 기록한 지방 양반의 얼굴
이번 전시엔 '운낭자상' 등의 대표작은 빠졌지만 대신에 역사에 기록되지
않은 전북지역 양반들의 얼굴을 대가(大家)의 붓끝을 통해 만나는 이색적인
재미가 있다.
- (사진 왼쪽)채용신의 1918년작‘허담 초상’. 원본의 얼굴 부분만 클로즈업한 모습이다. 형형한 눈빛과 얼굴의 주름, 눈썹과 수염, 의복의 성긴 올까지 디테일이 생생하게 살아 있다. (사진 오른쪽)원광대박물관에 소장된 채용신의‘고종황제 초상’. [전북도립미술관 제공]
낙향 후 전북 익산 금마에서 '금마산방'을 운영하며 최익현을 비롯한
우국지사의
초상을 대거 제작했던 채용신은 1923년 정읍 신태인에
'채석강도화소(蔡石江圖畵所)'라는 초상화 전문 공방(工房)을 열었다.
채용신이 아들·손자와 함께 운영한 이 공방의 가장 큰 특징은 '사진'을
바탕으로 초상화를 제작했다는 것. "사진을 보고 초상화를 제작했을 때
실물과 닮지 않았을 경우 책임을 지겠다"는 홍보 문구를 내 걸었고,
초상화의 모델이 사진을 가지고 있지 않을 땐 공방 측에서 사진사를 보내
촬영하는 '출장 서비스'까지 제공하겠다고 약속했다.
그의 아들과 며느리는 서울에서 사진관을 운영했었다. 모델이 직접 공방을
방문해야 하는 번거로움을 없애고, 초상화 제작 기간을 단축해 공방은
크게 번창했다.
작품가는 성장(盛裝)을 한 입상(立像)이 100원, 남녀 양복 반신상은 80원.
당시 쌀 한 말이 3.5원이었다. 현재 경매에서 채용신 초상화는 수천만원을
호가한다.
전시에는 전북지역 가문에서 영정(影幀)으로 전해내려온 미공개작 네 점이
소개됐다. 그 중 한 점인 '허담(許淡) 초상'(1918)은 문관복 차림으로 왼손엔
주자대전(朱子大全)을 들고 돗자리 위에 정좌한 지방 하급 관리를 그렸다.
양천 허씨 가문에 전해져 내려온 이 초상은 얼굴의 주름, 콧등의 사마귀,
눈썹과 수염의 흰 터럭까지 사실적으로 묘사한 수작(秀作).
이 밖에 '삼고초려(三顧草廬)' '적벽대전(赤壁大戰)' 등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의 명장면을 묘사한 그림 등 채용신의 폭넓은 작업
세계를 보여주는 작품과 이당 김은호, 조덕현을 비롯한 근·현대 작가들의
초상화가 전시에 나왔다.
전시를 기획한 미술평론가 조은정씨는 "그림과 사진의 미덕을 공유한
채용신은 근·현대 초상화를 잇는 가교(架橋) 역할을 한다"고 말했다.
<삼국지연의도 三國志演義圖>
‘삼국지연의도’ 중 <삼고초려> 일부.
제갈량이 지도를 가리키며 ‘천하삼분책’을 설명하고 있다.
시계 방향으로 유비, 관우, 장비이다. [조선민화박물관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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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황제 어진(御眞·임금의 초상)을 그린 초상화가로 이름을 떨친
채용신(1850~1941)의 ‘삼국지연의도’ 실물이 확인됐다.
조선민화박물관(관장 오석환)은 채용신의 ‘삼국지연의도’ 연작을 11일
본지에 공개했다. 세로·가로가 각각 169㎝, 183㎝ 달하는 그림 총 8폭으로
이뤄진 대작이다.
도원결의를 담은 ‘재우마소고천지(宰牛馬昭告天地)’, ‘삼고초려(三顧草廬)’,
조자룡의 활약상을 그린 ‘자룡단기구주(子龍單騎救主)’, 제갈량이 동남풍을
일으키는 장면 ‘공명행동남풍(孔明行東南風)’, ‘적벽대전(赤璧大戰)’, 관운장이 조조를 놓아주는 내용을 담은 ‘의석조조(義釋曹操)’, 제갈량의 활약상을
그린 ‘서성탄금(西城彈琴)’, 관운장이 칼 한 자루에 의지해 노숙의 잔치에
찾아가는 ‘단도부숙(單刀赴肅)’ 등이다.
연작 중 ‘단도부숙’ 편에
‘임자맹춘상한 종이품 전 정산군수 신채용신사상(壬子孟春上澣 從二品 前定山郡守 臣蔡龍 臣寫上)’이란 관지가 적혀있다.
“1912년 초봄상순 전직 종2품 정산군수였던 신하 채용신이 그려
올립니다”로 풀이된다.
그림 안의 편액에 제목을 써놓는 등 궁중회화 형식을 띄고 있다.
경주대 문화재학부 정병모 교수는 “나라를 뺏긴 뒤인 1912년에 ‘신하’라는 표현을 쓴 걸로 보아 구국 활동을 벌이던 고종황제가 채용신에게
‘삼국지연의도’의 제작을 의뢰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분석했다.
‘삼국지연의도’는 관우신앙을 상징하는 종교화다. 관우신앙은 명나라
장수들에 의해 조선에 전파됐다. 왜적을 물리친 것이 ‘관왕의 위령’ 덕이라
믿었던 명 장수들은 조선 곳곳에 관왕묘를 짓게 했다. 조선 왕들도
관우신앙을 장려했다.
왜적을 크게 격파한 지역인 강진 고금도(古今島)의 관왕묘에는 정조가
1791년 ‘탄보묘’란 사액을 내리고 “적토마 타고 푸른 칼자루 장식으로
일본 섬 오랑캐의 간담을 서늘케 하여 이에 땅을 편안케 하였으니”라는
치제문(致祭文)을 쓰기도 했다.
그러나 순조2년(1908년) 일제의 지시에 따라 관왕묘 제사는 폐지됐다.
채용신은 1905년 최익현(1833~1906)의 초상화를 그리는 등 위정척사를
주장하던 유림, 의병장과 독립운동가, 원불교 지도자와 교류했다.
적벽대전에서 주유가 소수의 군사로 조조의 대군을 물리쳤던 것처럼
우리나라가 일본을 물리치길 바라는 간절한 소망이 그림에 담았으리라
추정된다.
그림의 주인공은 중국풍이지만, 자연과 건축 등의 배경은 조선의 것이다.
정 교수는 이 역시
“민족의식의 발현으로서 독자적인 한국적 화풍을 개척한 결과”라 해석한다.
정 교수는 “초상화가로 이름 높은 채용신이 이렇게 역동적인 그림을 그렸다는
사실만으로도 놀랄 일이고, 작품의 규모나 수준도 대단하다”며 “특히
혼비백산해 도망가는 조조의 군대를 표현한 ‘적벽대전’은 지금껏 알려진
삼국지연의도 중 최고”라고 말했다.
[출처] : 영월=이경희 기자 /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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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좋은 당신" 참 좋은 당신 아무리 찾아봐도 미운 곳이 없는데 미운 그 사람은 하는 짓마다 밉게만 보이네 밉고 고운 그 마음이 둘이 아니랍니다. 석암 조헌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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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4월 1일
석암 조헌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