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명이 이렇게 직방강직한 상소문을 올렸어도 포도청에 한 번 안 끌려 간 것을 보면 정말 대단한 분이라 생각된다.
남명[南冥]선생의 김해 산해정[山海亭] 계명실에 자신의 정서적 이정표가 될 좌우명[座右銘]을 보면, 용신용근[庸信庸謹]-말은 떳떳하고 미덥게, 행동은 떳떳하고 신중하게. 한사세연[閑邪存誠]-사악한 것 막아야 하고, 정성스러움 간직해야 하네. 악립연중[岳立淵沖]-산악처럼 우뚝하게, 연못처럼 깊게 하면. 엽엽춘영[燁燁春榮]-찬란히 봄꽃처럼, 피어나고 피어나리라. 남명집 1권 32장 남명은 자신의 지조[志操]를 굳건히 지키며 불의를 용납하지 못하는 천길 절벽 같은 기상[氣象]이 이 처럼 젊은 시절에 이미 형성되어 있었다. 남명이 31살 되던 해 어린 시절 죽마고우[竹馬故友]인 동고 이준경[영의정]이 심경이라는 책을 보내왔는데 남명은 귀한 책이라 책 뒤에다 이런 글을 썻다고 한다. 내가 이 책을 처음 얻었을 때 흠칫하여 두려운 생각이 들었다. 이책의 가르침대로 하지 못할까 염려되어 마치 큰 산을 짊어진 듯한 느낌이었다. 벽에다 좌우명을 써 붙히고 경계하려 했지만, 마음이 집중되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사람이 자기 마음을 잃고서 육체[肉體]만 걸어 다닌다면 금수[禽獸]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내가 이 책의 가르침에 따라 내 마음을 단속[團束]하지 못한다면, 이책을 선물한 내 친구를 저버린 것이 아니라 이 책을 저버린 것이 되고, 이 책만 버린 것이 아니라 내 마음을 저버린 것이 된다. 사람에게 가장 슬픈 일은 마음이 죽는 것이다. 이 책[冊]은 바로 마음을 죽지 않게 하는 약이다. 이 책을 음식으로 삼아 그 맛을 알고, 좋아하여 그 즐거움을 알아 오래도록 편안한 마음으로 일상샐활[日常生活]에 적용하기를 개을리하지 않는다면, 공자의 수제자 안자[顔子]처럼 자기의 사욕을 이겨서 인[仁]으로 돌아가는 경지에 이를 수 있을 것이다. 남명집 2권 31, 32장 친구에게 선물로 받은 책 한 권도 범상하게 여기지 않고 거기에 의미를 부여해서, 자신의 정신자세를 바로 세워 공부해 나갈 방향을 설정[設定]했던 것이다. 극기복례[克己復禮자기의 사욕을 이겨 예로 돌아가는 것]를 이룬 안자[顔子]의 경지에 이를 것을 기대 하였다. 남명에게 딸이 하나 있었는데, 그 딸이 회령포 만호(萬戶) 김행 (金行 정사품 문관직)에게 시집가서 두 딸을 낳았다. 큰딸은 의성 김씨 김희삼(金希三)의 아들 김우옹에게 시집 보내고, 작은딸은 현풍 곽씨 곽월(郭越) 아들 곽재우[郭再祐]에게 남명의 주선으로 시집 보냈다. 남명의 외손녀는 심성은 올바르고 행실은 반듯했지만, 인물이 별로 없었을 뿐만 아니라 성질이 날카로웠고 음식 솜씨, 바느질 솜씨는 더더욱 볼품이 없었다.
곽재우[郭再祐]는 본래 호걸다운 사람으로 성질이 급하고 괄괄했는데, 그 부인마저도 날카로웠으므로 결혼 초부터 두 사람 사이에 마찰이 적지 않게 점점 그 정도가 심해지자 곽재우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어 이런 외손녀를 “군자의”라며 소개한 평소에 존경[尊敬]하던 스승 남명이 야속하게 생각되기까지 했다.
그래서 곽재우는 어느 날 참다못해 남명에게 항의하기 위하여 가던 중 뜻밖의 손위 동서인 김우옹[훗날 대사헌]을 만나 어쩐 일이냐 물어보니 사정이 자기와 똑 같아 김우옹도 동서와 함께 항의 하기 위해 갔었다. 남명을 찾아뵙고 인사를 올리고 나서 성미가 급한 곽재우가 먼저 스승께서 추천을 하여 저의 앞날을 그르치려고 하십니까? 라고 따지듯 거칠게 항의하니 김우옹도 같이 항의했다.
잠자코 다 듣고 난 남명은 느긋하게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내가 “군자의 배필이 될 만하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그렇게 성질이 사납고 솜씨 없는 내 외손녀는 군자다운 사람이라야 데리고 살 수있지.군자답지 못한 사람이야 하루인들 같이 살 수 있겠느냐?
내가 자네들을 군자다운 사람으로 인정했기 때문에 혼사가 이루어지도록 했지. 자네들을 소인배로 보았다면 당연히 혼사를 말렸을 걸세. 하니 두 외손서는 더 할 말이 없어지고 말았다.
남명의 일화 중 영남의 3선비라 불리는 남명 조식, 황강 이희안(黃江 李希顔 고령현감 판관),
송계 신계성(松溪 申季誠) 중, 황강 이희안이 고령현감으로 있을 때 남명은 자신의 도[道]를 행하지 못하면서 벼슬에 머물러 있는 것을 경계하여 고령을 지나갈 적에는 관사쪽으로 부채를 펴 가리고 다녔다고 한다.
그러나 1556년 황강 이희안[黃江 李希顔]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남명에게 자신의 어머니 묘비를 부탁했다. ‘정부인 최씨 묘표(貞夫人 崔氏 墓 表)’가 전하는데, 남명은 비문에“나는 고령현감 이희안과 친하게 지냈다”라는 구절이 있다. 이 비석은 문화재로 지정을 해도 손색이 없을 비석인데도 무관심으로 방치되고 있다.
현재 비석에 낀 이끼들은 하나둘씩 늘어가지만, 관심을 가지는 사람은 없는 것 같다.황강정 바로 건너편인 쌍책면 오서리 골짜기에 황강정 주인 황강 이희안의 묘소가 있다.
황강이 남명과 함께 학문을 연마한 황강정.
묘소 앞에는 글자가 마모되어 알아볼 수 없을 만큼 오래된 묘비가 서 있는데, 남명이 500년 전에 지은 것이다.
‘군자감판관이군묘갈(軍資監判官李君墓碣)’ 군자감 판관 벼슬을지낸 이희안의 묘비라는 뜻이다.황강이 1559년 이 마을에서 세상을 떠났으니, 약 500년전에 세워진 비석임을 알 수가 있다.
남명이 지은 제황강정사(題黃江亭舍]시
(路草無名死) 길 가 풀들 이름 없이 죽고 (山雲恣意生) 산의 구름 자유로이 인다.
(江流無限恨) 강물은 한 없는 한을 흘려보내며 (不與石頭爭) 돌과 다툴 일 없도다. 황강 이희안[黃江 李希顔]은 합천군 율곡면 전두환 전 대통령 생가 뒷편 청계서원(淸溪書院) 에서 오늘날까지 추모하며 학덕을 기리고 있다.
남명 조식 선생의 신명사도
2015년 7월 1일 수정 블벗님 저의 검색창에 -남명 조식 선생 일대기-를 쳐보세요 (상세한 내용 있음) 석암 조헌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