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신사
박팽년[朴彭年](1417-1456] (사육신의 한사람)
박팽년은 세종 16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집현전[集賢殿] 학사가 되어
사육신[死六臣] 등과 함께 한글 편찬[編纂] 사업에 참가 하였다.
문종 재위 2년 만에 병고로 서거하자 고명을 받아 어린 단종을 돕다가 충청도
관찰사[觀察使]로 나갔다.
외직에 있는 동안 수양대군은 황보인, 김종서, 안평대군을 죽이고 왕권을
찬탈한 사건인 계유정난[癸酉靖難]이 일어났고 그 후 형조참판으로 제수되어
내직으로 돌아온 박팽년은 사육신 등과 함께 단종복위 운동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함께 모의했던 간생이 김질이 장인 정창손[鄭昌孫]에게 밀고하여
세상에 밝혀져 단종 복위가 실패로 돌아가 모두가 체포되어 투옥되는데,
사실을 부인 하기만 하면 살려줄 것이라 하였건만 끝내 이를 거절 하였다.
세조[世祖]가 친국할 때 상감이라 하지 않고 나으리라고 대답하니 세조가
노하여 내가 이미 신이라 하였거늘 어이 나를 상감이라 하지 않느냐고 하자
나는 단종의 신하이지 나리의 신하가 아니외다 라고 하자 더욱 노한 세조는
그러면 “내가 주는 녹봉은 받지 않았느냐?”라고 하자 한 톨의 곡식도 받지
않았다고 하여 확인해 보니 충청도 감영 창고[倉庫]에 고스란히 쌓여 있었다.
이에 더욱 노한 세조는 혹독한 고문으로 8일 만에 옥중에서 순절[殉節]하였고
그의 부친과 아들 3형제가 모두 처형 되었으며 모친 처 제수 며느리들 모두가
대역죄[大逆罪]의 가족이라 하여 모두 노비가 되거나 관비가 되어 온 집안이
멸문화를 입을 때 둘째 아들 박순의 아내 성주 이씨도 임신 중이었는데
아들이면 죽임을 당하고 딸이면 관비[官婢]로 삼게 되어 있었는데,
해산을 하니 아들이었고 그 무렵 딸을 낳은 여종이 있어 아이를 바꾸어
기름으로서 아이는 목숨을 보전[保全]하였다.
외할아버지가 박비[朴碑]라는 이름으로 자란 어린이가 17살 되었을 때
그의 이모부 이극균[李克均]이 경상도 관찰사로 부임 처가에 들렸다가
성장한 그를 보고 자수할 것을 권했다.
이때 조정에서는 사육신에 대해 옳은 일을 하였다는 여론이 일고 있어 서울로
올라간 박비는 성종으로부터 사면을 받고 돌아왔고 후손이 없는 외가의
재산을 물려받아 종택을 짓고 묘골에 정착하였으며, 이 사람이 바로
사육신 여섯 사람 가운데 유일하게 대를 이은 박팽년의 손자 박일산[朴一珊]이
묘골 순천 박씨의 입향조[入鄕祖]가 된다.
그 후손들이 절의묘[節義廟]라는 사당을 세우고 할아버지 박팽년의
제사를 지냈다,
그런데 그의 현손인 박계창[朴繼昌]이 조부의 제삿날 꿈에 여섯 분 선생들이
사당 밖에서 서성거리는 것을 보고 다섯 분의 제물도 함께 차려 다시 제사를
지냈고 하빈사[河濱祠]를 세워 사육신을 함께 배향 하였는데,
오랜 세월이 지나 훼철 되기도 했던 것을 박정희 대통령의 충효위인 유적정비
사업으로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한석당 박중령[閑碩堂 朴仲 林]과 박팽년[朴彭年]의 아들 박순 3대는 충청도
화덕 출신으로 가문이 번성하였다.
윗채는 태고정[太古亭] 별사[別祠]에 봉향 되어 있으며 서쪽 언덕에
신도비[神道碑]가 세워져 있다.
박팽년[朴彭年]은 모진 고문[拷問]을 받다가 숨을 거두었다.
세조는 숨을 거둔 시신의 사지마저 찢게했다. 그가 죽은 뒤 그의 아버지와
형 등 일곱 명이 처형[處刑]됐다.
문무[文武]를 겸비한 김문기[金文起]는 단종 복위와 관련, 군대를 동원하는
임무[任務]를 맡았다. 그 또한 사지[四肢]가 찢겨 죽었다.
제 13,14,15,대국회의장 박준규 휘호
제10대 대통령 최규하 휘호
박정희 대통령 휘호
사육신 육각비
성인문
충의문
박팽년신도비
삼충각
홍살문
충 절 문
박준규 생가 터
대구 달성군 하빈면 묘리 육신사 마을
육신사안내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