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정 2017년 11월 17일
조선 멸망(滅亡) 원인
양(梁)나라 혜왕(惠王)이 맹자(孟子)를 찾아 갔을때 이제 이 나라에 이(利)로움을 주시겠지요 하고 물어보니 맹자왈(孟子曰) 하필이면 이(利)입니까 ?. 오직 인의(仁義)가 있을 뿐입니다. 임금이 어떻게 내 나라를 이롭게 할까 하면 대신(大臣)들은 내 집을 이롭게 할까 할것이고 선비와 백성들은 내 자신을 이롭게 할 것이다. 이나라 사람들이 제각기 이익만 추구(追求) 하면 이 나라의 존망(存亡)이 위험에 놓이게 된다는 말이있다. 우리의 조선 왕조(朝鮮 王朝)가 이렇게 멸망 하였다.
양반의 나라 조선은 일제에 의해 강제 병합되면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오늘날 우리들은 조선이 멸망한 원인을 통치층이었던 양반들의 무능력과 사리사욕에서 찾는 경향성이 있다. 물론 지도층의 잘못이 조선의 멸망을 초래했다는 주장이 전혀 틀린 것은 아니겠지만, 나라가 망하게 된 보다 근본적인 원인은 19세기 ‘식민지 개척’이라는 이름으로 전개된 제국주의 국가들의 야욕에서 그 원인을 찾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 세계사적으로 한 왕조가 500년 이상을 지속된 경우는 드물다. 만약 조선의 지도층이 그렇게 부패하고 무능했다면 어떻게 500년 이상 지속할 수 있었겠는가. 조선과 일본은 크게 2차례의 대결을 펼쳤다. 임진왜란 때는 전면전 형태 대결을 벌였고, 구한말 때는 그런 것 없이 대결을 펼쳤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조선은 임란 때는 일본을 물리쳤고, 구한말 때는 일본에게 허무하게 패했다. 센고쿠 시대 즉 전국시대(戰國時代)의 분열을 극복하고 통일을 이룩한 임진왜란 당시의 일본은 사상 최강의 국력을 자랑했다. 열도 전체가 일본이라는 깃발 아래 단결한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그뿐 아니라, 당시에는 도요토미 히데요시라는 걸출한 영웅까지 있었다. 게다가 당시의 일본군은 조총을 보유한 탓에, 군사적으로도 조선군을 능가했다. 그런데도 조선은 일본과의 전면전에서 당당히 승리를 거두었다. 그에 비해 구한말의 한일전은 너무 싱겁게 종결되었다. 일본이 조선보다 먼저 개방했고 과학기술이 앞섰다는 점을 고려하더라도, 별다른 전쟁도 없이 조선이 그처럼 쉽게 국권을 내준 것은 참으로 어이없는 일이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진 걸까? 가장 중요한 요인 중 하나로 우리는 서민대중과 특권층의 관계를 꼽을 수 있다. 임란이 벌어진 16세기에는 조선의 서민 대중과 특권층이 상호 화합한 데 반해, 구한말 즉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초반에는 그렇지 못했던 것이다. 임란이 벌어지기 25년 전인 1567년, 조선에서는 역사적인 사건이 발생했다. 선조 임금의 즉위를 계기로 조선의 지배층이 질적으로 바뀐 것이다. 훈구파라 불린 종래의 지배층은 각종 정변에서 승리를 거둔 공신세력으로 구성되었다. 그에 비해 사림파라 불린 새로운 지배층은 정상적인 정치 시스템을 밟고 정권을 장악한 선비세력으로 구성되었다. 한국 현대사에서 잘 나타나듯이, 정변이나 쿠데타로 권력을 잡은 세력은 원칙보다는 힘을, 공정성보다는 부정부패에 기울기 쉽다. 훈구파는 그런 특성을 띠었기 때문에, 16세기에 이르러 보다 건강하고 진보적인 사림파의 도전에 직면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훈구파에 비해 건강하고 진보적인 세력이었기에, 사림파는 무엇보다 지역 사회를 보다 더 확실히 장악할 수 있었다. 16세기의 서민대중이 사림파를 신뢰했다는 점은, 사림파가 주도한 범국민 캠페인인 향약운동이 널리 파급된 사실에서 잘 드러난다. 서민대중의 신뢰를 받는 사림파가 정권을 장악한 뒤로부터 25년 뒤에 임란이 발생했다는 사실은, 이 전쟁에서 조선이 승리할 수 있었던 원동력을 설명해준다. 사림파가 그보다 훨씬 먼저 정권을 장악해서 일찌감치 부패해버렸거나 아니면 훈구파가 임란 당시까지도 계속 권력을 잡았다면, 전쟁이 어느 방향으로 전개되었을지 알 수 없는 일이다. 다행히도 서민대중과 호흡하는 젊은 지배층이 전쟁을 주도했기에, 조선은 조총을 앞세운 일본군을 몰아낼 수 있었다. 특히, 사림파가 서민대중을 의병투쟁으로 끌어들인 것이 전쟁의 승패를 가른 결정적 요인이었다.
조선은 정부군의 열세를 의병투쟁으로 보완할 수 있었다. 나중에는 사림파도 부패하고 보수적이 되었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이들은 꽤 혁신적인 세력이었다. 서민대중이 그들을 믿고 의병투쟁에 나선 것은 바로 그 때문이었다. 구한말에도 일본에 맞선 의병투쟁이 있었지만, 나라를 구하는 데는 실패했다. 왜 그랬을까? 구한말 전쟁에는에는 서민대중과 특권층의 화합이 없었던 탓에 의병투쟁에 대한 서민들의 호응도가 낮을 수밖에 없었고, 그랬기 때문에 전면전도 없이 허무하게 무너지고 말았다. 19세기에는 전정·군정·환곡 즉 삼정의 문란, 다시 말해 조세 수취체제의 문란이 가속화되었다. 서민들은 먹고 살기 힘들어지는데도 이러저러한 명목으로 각종 세금을 뜯어갔던 것이다. 그런데도 특권층은 이를 외면하고 부를 축적하는 데만 골몰했다.
사정이 이러했으니, 서민대중이 독자적 생존을 위해 전국 곳곳에서 민란을 일으키는 것은 지극히 당연했다. 서민 중심의 사회개혁운동인 동학농민 전쟁은 그런 분위기 속에서 발생한 것이다. 그런데 동학전쟁이 정부군+일본군+민병대(양반 중심)의 연합작전에 의해 짓밟힘에 따라 서민과 특권층의 상호반목은 한층 더 심화될 수밖에 없었다. 정부군과 양반 민병대가 일본군과 손잡고 동족을 진압하는 양상까지 벌어졌으니, 나라가 안 망하는 게 오히려 이상한 일이었던 것이다. 조선의 멸망은 사실상 자살골 때문이었다.
논어(論語)자로편에 이르기를 급히 서둘지 말고 작은 이득(利得)을 보려다가 큰 일을 이루지 못한다.
선조 25년(1592), 임진년 4월 13일(음력). 임진란이 발생했다. 우리는 그간 일본이 그러나 사실은 다르다. 선조 23년(1590) 조선에서 통신사 황윤길(黃允吉)과 부사(副使) 김성일(金誠一)을 일본으로 보낸 것 자체가 일본이 실제 침략할 것인지 알아보기 위한 것이었다. 일본통신사는 이듬해 봄 귀국하는데, 유성룡(柳成龍)은 『징비록(懲毖錄)』에서 “황윤길은 부산으로 돌아오자 시급히 ‘병화(兵禍)가 있을 것’이라고 보고했다”고 전한다. 황윤길은 선조에게 복명(復命)할 때도 마찬가지로 보고했다. 그러나 조선의 군신(君臣)들은 “그러한 정세가 있는 것을 보지 못했습니다”라는 김성일의 보고를 더 믿고 싶었다. 조사단장의 보고는 무시하고 부단장의 보고에 힘을 실어주었다. 그뿐이 아니었다. 장유(張維)가 쓴 『오억령(吳億齡) 묘지명』에 따르면 전쟁 발발 1년 전인 선조 24년(1591) 부산에 온 일본 사신 현소(玄蘇)를 접대했던 선위사(宣慰使) 오억령은 “일본이 내년에 쳐들어올 것”이라고 보고했다가 해임되었다. 『연려실기술』은 ‘이때 국사를 담당하는 자들은 왜병이 움직이지 않는다는 한쪽 말만 주장했기 때문에 오억령을 교체시켰다’고 전하고 있다. 있는 현실은 외면하고 보고 싶은 허상을 현실로 믿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전쟁 경보가 계속되자 불안해진 조정은 신립(申砬)과 이일(李鎰)에게 지방 군기 검열을 맡겼다. 임란 발발 13일 전인 4월 초하루 신립은 왜군이 쳐들어올 경우의 대책을 묻는 유성룡의 질문에 “그것은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라고 간단하게 대답했다. 6·25 남침 발발 두 달 조금 전쯤 육군참모장 채병덕(蔡秉德) 소장이 38선을 시찰하고 기자단과 만나 “우리 38선 경비 국군은 사기왕성하며 철통 같은 경비망을 치고 있으니 조금도 우려할 바는 아니다”라고 호언한 것은 이런 전철(前轍)을 그대로 답습한 것이었다. 임란 때나 6·25 때나 개전 초기에 무너진 데는 이런 공통된 배경들이 있었다. 그나마 조선은 전란 이후에는 임진란을 잊지 않았다. 임진년이 돌아올 때마다 나라에서 이순신(李舜臣)·송상현(宋象賢) 김면(金沔) 등 순절 장수들과 임란 극복의 공을 세운 유성룡·윤두수(尹斗壽) 등의 가묘(家廟)에 승지 등을 보내 사제(賜祭)하게 했다. 1952년 임진년에는 대한민국 정부도 문교부 장관 백낙준(白樂濬)을 보내 임란 공신들의 제사를 모셨다.
각종 행사가 기획되고 있다. 과거를 잊는 자에게 재앙은 반복된다. 잊지 않아야 할 것도 세상에는 많다.
“우리의 부모는 ‘미국사람 믿지 말고 소련에 속지 말고 일본은 일어서니 조선은 조심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러 일 전쟁 발발 후 포츠머스 강화 회담이 1905년 8월 9일~29일까지의 회담[會談]에서, 제, 2조에는 “일본은 한국을 지배적인 권리가 있음을 인정한다.”라고 하여 필리핀은 미국[美國]이 권리[權利]를 가지고 대한제국[大韓帝國]은 일본에 넘겨진 포츠머스 강화 회담,
1905년 11월 9일 일본 왕은 이토히로부미[伊藤博文]를 파견하여 대한제국의 외교권 박탈을 내용으로 하는 신협약안[新協約案]인 을사늑약[乙巳勒約]을 체결[締結]되어 나라를 빼앗겼던 것이다.
독립군은 전 재산을 틀어가면서 해방을 했지만. 후손들의 혜택[惠澤]은 미미하여 어렵게 살아가고 친일파 후손들은 떵떵거리며 살고있어 독립운동[獨立運動]을 하면 3대가 망한다고 하였으니 지금 우리의 땅인 독도[獨島]와 북한[北韓]을 빼앗긴다해도 어느 누가 북한과 독도 지킴이를 하겠는가?
문제는 고종임금,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 이하응[李昰應]과 명성황후[明成皇后] 민비와의 주도권 싸움에 대한제국[大韓帝國]이 왜놈에게 넘어간 줄도 모르고 미국, 러시아, 영국에 조선을 맡아달라 친서를 보냈으니 국제정세[國際政勢]에 세상 물정 모르고 귀를 막고 있었던 것, 당파싸움에만 정신을 팔고 있었으니…
우리가 내부적으로 이념 논쟁[理念 論爭]에 여야 당파싸움만 하는 동안 일본은 미국을 끼고 역사왜곡은 물론 전쟁을 할 수 있는 강대국으로 일어서고 있다. 안에서 찌지고 뽁고 싸우느라 바같세상을 모르는 것 같다. 조선시대 노론소론[ 사림파[ 옛 선비들은 지조[ 지조가 없고 바른소리하는 사람은 제갈을 물려 오직 개인 이익에만 메달리고 있는 듯 하다.
이제부터라도 위정자[爲政者]들이 극과 극의 대립[對立]으로 네 편 내편 반으로 쪼개는 정치는 그만하고 반대[反對]의 목소리도 수용할 줄 아는 통 큰 정치 화합[和合]으로 국정[國政]을 이끌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역사는 반복한다고 100여 년만에 일본은 미국을 등에 업고 과거처럼 또다시 한국을 침략할 명분[名分]을 찾고 있는 듯하다. 대한민국 국민은 이러한 일본 아베정부의 의도를 잘 알고 이제 붕당정치[朋黨政治]에 휘말리어 또다른 왜정시대를 맞이하고 나라를 빼앗기는 일이 없도록 국력[國力]을 키워 강력[强力]하게 대처[對處]해야 할 것이다. 12년 11월 26일 수정 17년 11월17일 조 헌 섭
대금연주= 한 오백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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