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익(姜翼) 강익(姜翼, 1523∼1567)의 자는 중보(仲輔)이고, 호는 개암(介庵) 또는 송암(松庵)이라고도 하며, 본관은 진양(晋陽)으로 안의(安義)에 거주하였다.
그는 1523년(중종18년, 계미) 아버지 승사랑(承仕郞) 근우(謹友)와 어머니 남원 양씨 사이에서 함양 효우촌(孝友村)에서 태어났다. 그의 문집은 {개암집(介庵集)}이 있다.
15세 때(1537년, 정유) 함양의 선비 정희보(鄭希輔)의 문하에 들어가 공부하였다. 당시 정희보의 문하에는 노진, 양희(梁喜)를 비롯하여 어진 선 비들이 많이 모였는데, 강익은 이들과 자연스럽게 어울려 학문을 강마하였다. 20세 때(1542년, 임인) 남명선생의 학문과 인격을 듣고 가르침을 받고자 하였 으나 부친의 병환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는 후학을 지도함에 있어 신독(愼獨)을 권장하여 말보다는 실천위주의 학문을 하도록 하였다.
26세 때(1548년, 무신) 집의 남쪽에 작은 정사를 지어 숙야재(夙夜齋)라고 이름을 붙이고 수양의 장소로 삼았고 이 때 호를 송암(松庵)이라고 하였다.
27세 때(1549년, 기유) 오건, 김우옹 등이 숙야재를 방문하여 밤새도록 학문을 연마하여 향시(鄕試; 진사)에 합격하였으며 이후 과거에 한두 번 응시하고는 다시는 뜻을 두지 않았으며, 오로지 독서에 힘썼다.
29세 때(1551년, 신해) 남명선생이 화림동(花林洞)으로 유람을 왔다. 화림동은 함양군 서하면과 안의면 일대의 빼어난 경관을 간직한 계곡으로 농월정, 동호정, 군자정, 거연정 등 유명한 정자들이 있는 곳이다.
강익은 옥계 노진, 덕계 오건과 더불어 남명선생을 모시고 화림동의 빼어난 산수를 유람하였다.
'남명선생이 옥계를 데리고 / 우리들을 부르러 왔네/ 꽃다운 풀 산의 자태 좋아서 / 시 읊조리며 말머리 나란히 하였네. 월연(月淵)에서 발을 씻고 / 용간(龍澗)에서 시를 짓네. 경치 감상하는 마음 닿는 곳마다 즐겁고 / 수레바퀴 소리 따라 들새들 지저귀네' 라는
이 시(詩)는 이 때 강익이 화림동에서 지은 것이다.
30세 때(1552년, 임자) 당시 강익을 비롯하여 박승임(朴承任), 노관, 정복현, 임희무 등과 논의하여 남계서원의 창립에 노력하였다.
31세 때(1553년, 계축) 노진(盧 ), 오건과 더불어 지리산(智異山)을 유람하였고({梅村實紀}; {介庵集}), 산기슭 등구(登龜) 마을에 양진재(養眞齋)라는 조그마한 집을 지어 매화나무, 대나무, 난초, 국화 등을 손수 심고 세속을 피하여 학문에 힘쓰고자 하였다. 이 때 원근의 많은 선비들이 모여들어 학문을 강론하였다.
34세 때(1556년, 병진) 호를 개암(介庵)이라고 하였고, 36세 때(1558년, 무오) 뇌룡정(雷龍亭)으로 남명선생을 찾아가 {주역}을 배우면서 두 달간 머물다가 돌아왔다. 이 때 노진, 이후백(李後白), 오건 등이 남명선생을 모시고 학문을 연마하였다. 남명은 '진정코 서로 믿어 의심할 만한 것이 없는 사람은 오직 자네(강익) 뿐' 이라고 칭찬하였다.
37세 때(1559년, 기미) 함양군수인 윤확(尹確)과 중단된 서원의 일을 논의하여 강당을 아름답게 꾸미고 담을 둘러싸고 창고와 부엌을 완비하고 사당을 강당의 동쪽 언덕에 지었다.
39세 때 서원의 일이 완전히 마무리되고 정여창의 위패를 봉안하였다. 이로부터 학문에 뜻을 둔 선비들이 서원으로 모여들어 학칙을 정하고 매월 초하룻날 서원에서 강독회를 열었는데 학문을 성취하는 이가 많았다.
그 해 마천동(馬川洞)에 운학정(雲鶴亭)을 짓고 정복현과 더불어 원원상종(源源相從)하면서 도의로 강마하였다.
41세 때(1563년, 계해) 3월에 남명선생이 남계서원을 찾아와서 정여창의 사당을 배알하였고 여러 문생들이 강론을 들었다.
이 해에 임훈(林薰)의 집을 방문할 적에 하항(河沆), 조종도, 하응도, 유종지, 진극경 등이 모시고 갔다. 이 때 문경호(文景虎)는 강익, 정유명, 정복현, 임희무 등 이 지역 선비들과 더불어 이 자리에 참석하여 남명선생과 같이 온 하항(河沆), 하응도, 유종지, 진극경 등과 더불어 강론하였다.
42세 때(1564년, 갑자) 김우홍(金宇弘)이 함양 군수로 부임하였는데 김우홍은 남명선생의 제자이자 외손서인 김우옹의 맏형이다. 강익은 평소 교분이 두터웠던 김우홍과 의논하여 서원의 동재와 서재를 건립하고, 서재 좌우에 조그마한 연못을 파고 못 주변에 매화나무, 대나무를 심어 서원의 규모를 확정지었다.
44세 때(1566년, 병인) 하항(河沆), 조종도, 하응도, 유종지 등도 함께 갔다. 노진의 집에 이르자 노진이 강익 및 제공들을 불러 함께 남명선생을 모시고 안음(安陰) 옥산동(玉山洞)으로 가서 심성정(心性情)을 공부하였다.
또한 임희무는 남명선생을 모시고 노진, 강익, 김우옹 등과 더불어 산청의 지곡사(智谷寺)에 모여 여러 날 동안 자연을 완상하며 시를 읊고 돌아왔다. 초 십일에 선생께서 지곡사에 이르니 오건이 노진을 맞이하여 와서 뵈었다.
이튿날 강익, 김우옹, 정복현, 도희령, 정유명 등이 잇달아 찾아왔고, 멀고 가까이 있는 선비들이 소문을 듣고 구름처럼 모여서 여러 날 동안 학문을 강론하였다. 봄에 이정(李瀞)은 남명선생을 모시고 임훈(林薰), 김우옹, 노진, 정유명, 정구(鄭逑), 조종도, 이광우 등과 더불어 남명선생을 모시고 단속사에서 산천재로 모였다. 44세 때(1566년) 강익이 정여창의 서원에 사액을 청하는 장고를 올리자, 명종이 그의 건의를 예조에 내리니 예조가 편액과 서책을 하사하여 권장하는 뜻을 보이기를 청하였다. 임금이 그에 따라 이름을 남계서원이라고 편액을 하사하였다. 45세 때(1567년, 정묘) 덕계 오건이 학행으로 추천하여 소격서참봉(昭格署參奉)에 제수되었으나 나가지 않았다.
이윽고 서원에서 많은 학생들이 모여 학문을 연마하게 되었는데, 재정이 빈약하여 인재를 양육할 수 없을까 걱정하여 노진의 동생인 노관에게는 서적을 구입하는 책임을 맡기고, 양홍택(梁弘澤)에게는 재정의 책임을 맡겨서 시종 협력하여 일을 순조롭게 처리해 나갔다.
당시 서원은 완성되었으나 나라에서 제사를 지내도 좋다는 인정을 받지 못하였기 때문에 사당에 함부로 제사 지낼 수 있는 여건은 아니었다. 7월에 남계서원이라는 명칭을 하사 받게 되고 이로부터 춘추로 사당에 제사를 모실 수 있게 되었다.
남계서원은 우리 나라에서 소수서원 다음으로 세워진 것이다. 그리하여 남계서원은 함양뿐만 아니라 강우지방을 대표할 만한 서원이 된 것이다. 이는 노진, 양희(梁喜), 이후백(李後白) 등의 도움으로 강익이 이룩한 것이다.
45세 때(1567년, 정묘)10월에 병을 얻어 세상을 떠난 후 남계서원에 제향되었고 정온(鄭蘊)이 그의 [묘갈명]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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