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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이야기(124)

이제신(李濟臣,

by 석암 조헌섭. 2019. 11. 19.

 

이제신(李濟臣,

이제신(李濟臣,1510∼1583)의 자는 언우(彦遇)이고, 호는 도구(陶丘)이며,
본관은 철성(鐵城)으로 의령(宜寧)에 거주하였다. 
그는 1510년 (중종 5년) 창녕 외가에서 태어났다. 

그에 관한 자료는 {도구실기(陶丘實紀)}가 있다. 

그는 10세 때(1519년, 기묘) 고향 사람 안주(安宙)에게서 공부하여 {소학}, {시경},
{서경}, 사학(史學)을 배웠다.  

18세 때(1528년, 무자) 외간상(外艱喪)을 당하여 장제사(葬祭祀)를 한결같이
    가례(家禮)에 따랐다.

35세 때(1544년, 갑진) 김해(金海) 신어산(神魚山) 밑 산해정에서 학문을 연마하던
    남명선생을 찾아가 한 달 남짓 곁에서 극진히 모셨는데
44세 때 남명선생이 그의 정숙한 행동을 칭찬하기도 하였다. 
     이 후 남명선생이 삼가 뇌룡정(雷龍亭)에 있을 때는 그가 사는 의령
     모아동(毛兒洞: 현재 대의면 신전리 곡소마을 부근)과 10리 밖에 떨어지지
     않는 거리였다. 그는 남명선생을 가까이 모시면서 부지런히 공부를 하였다.

남명선생이 61세 때 지리산 밑 덕산으로 들어가자 뒤이어 이제신도 선생을 따라
덕산 고마장(古馬場)으로 이주하였다. 남명선생의 장례식에 문인의 서열을
정하는데 덕계를 첫 자리에 서게 할 것을 극력 주장하였다.

교유 : 21세 때(1530년, 경인) 성균관에 들어가 공부하면서 배신, 김범, 김희년,
여응구 등과 더불어 벗을 삼아 친하게 지냈다.
성균관 명륜당 내에서는 나이 순서대로 앉을 것을 주장하기도 하여 명성이
자자하였다. 

중종 말년에 김범 등과 다시 성균관에 들어가 공부를 하였다.

그는 덕산에 살면서 일정한 거처를 두기보다는 물 맑은 곳에 초옥을 지어
일 년 혹은 수 년을 살았다. 

덕산 아래 시냇가에 질기와(陶瓦)를 굽는 언덕이 있었는데,
그는 언덕에서 생을 마칠 때까지 살면서 호를 도구(陶丘)라고 하였다.

54세 때(1563년, 계해) 4월에 박제현에게 찾아가서 정사(精舍)에 차운하였다.

향사 : 73세 때(1582, 임오) 세상을 떠난 후 정강서원(鼎崗書院)에 배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