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래부사 민영훈(東萊府使閔永勳)부산대 입구 사거리에 가면 작은 공원에는 부사 민영훈 거사비(閔永勳去思碑)가
문과방목(文科榜目)에 의하면 민영훈은 1775년(영조 51)에 태어났으며, 비(碑)는 1838년(헌종 4) 봄 민영훈이 동래 부사에서 교체된 지 1년 만에 세웠다.
거사비란? 목민관이 재임 중에 선정을 베풀어 향민(鄕民)이 그가 떠나고 난 후 그의 공덕을 기려 비석을 세운 것이다.
비문에는 “조선 말기 동래부사로 부임한 민영훈은 극심한 흉년으로 굶주린 백성을
보통 목민관의 선정 공덕은 영세불망비, 선정비, 공덕비 등은 재임 기간에 세운 반면, 거사비는 임기가 끝나고 떠난 사람에게 마을 사람들이 그를 칭송하는 뜻에서 형편에 따라 돈을 모아 세웠다니 그 뜻[意]이 있는 듯싶다.
이 소중한 유물이 손가락을 곱을 정도로 몇 안되고 보니 가치가 있지만,
만민구명(萬民救命)의 선정을 베풀어 그가 떠난 뒤 마을 주민들이 그 은공을 기려 거사비(去思碑)와함께 사단(祠壇)을 세워 해마다 제사를 지내며, 1970년대 도로공사로 내버려져 있던 비석을 주민 한 분이 작장마을 주변 어린이 놀이터에 옮겨 세워 보존해 오다가
1993년 9월에 금정구청에서 부곡2동 사통팔달의 공수물 소공원에다 거사비를 새로 모양새 좋게 복원하여 민영훈이 길지 않은 재임기간 동안 동래부사로서 보여준 위민정신은 오늘의 현실에서도 곱씹고 되새겨 볼만한 이야기로 대흉년(大凶年)에 주민들의 목숨을 살린 것으로 유명한 인물이라!
민부사가 임기를 마치고 돌아갈 때 동래 고을 백성들은 너무나 그 은혜가 크므로 동헌에서 지금 금정구청이 있는 기찰까지 모두 적삼(상의)을 벗어서 행차 길에 깔아 민부사는 그들의 적삼을 밟고 걸어서 올라 왔다고 하니 당시 부민들이 얼마나 감복하였는지… 민의에 의한 원형 거사비 건립하여 1993년 9월 9일 제막식을 가졌다.
비문 양 옆에 4언시 내진내견(迺賑迺蠲)-심한 흉년으로 부민이 굶어죽어 가는데 설둔거막(設屯祛瘼)-곡식을 풀어 진휼하고 활만인명(活萬人命)-세금을 탕감하여 병폐를 제거하여 만인의 생명을 살린 백세가영(百世歌詠)-그 은혜를 칭송한다.라고 쓰여 있다. 높은 직위는 아니지만 위정자들이 본받아야 할 인물 동래부사 민영훈이 아닌감!
또한, 경주 최부자는 12대에 걸쳐 이룬 부와 명예를 사회에 환원함으로써 개인의 부를 사회로 확장시킨 최부자 정신을 통해 나눔, 더불어 사는 삶, 부의 철학, 세상에서 가장 큰 가치는 사람임을 강조하였다.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역사적 사례를 경제인과 위정자(爲政者)들이 본받으면 얼마나 좋을까?
대한민국의 재벌과 위정자들은 예나 지금이나 청렴결백( 淸廉潔白)하고 사회 모범의 본보기가 되는 자는 가뭄에 콩 나듯 하여 청렴결백한 자는 보이지 않으니 청소년들이 뭘 보고 배울까?
2019년 4월 일 석암 조 헌 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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