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역사 이야기(124)

중국 9人의 지혜

by 석암 조헌섭. 2022. 7. 7.
중국 9人의 지혜


운(運)도 지지리 없는 놈이라고 
하늘의 무심(無心)함을 탓하지 말라!

내가 수십년 간 낚시를 벗하며 때를 기다리는 동안
조강지처(糟糠之妻)마저 나를 버리고 도망가 버렸다.


검은 머리가 백발이 되고서야 문왕 서백을 만나
은나라 주왕(紂王)을 멸하고 주나라를 세웠다.


나는 숱한 세월(歲月)을 낚으며 늙은이가 되었지만
결코 하늘을 원망(怨望)하거나 포기(抛棄)하지 않았고
그 인내의 결실(結實)이었던 단 한 번의 기회(機會)로도
천하를 얻을 수 있었다.


<주나라 태공망 강태공(姜太公) >
 
               

용모(容貌)가 볼품없어서 되는 일이 없다고
푸념하지 말라!

나는 어렸을 때 보잘 것 없는 외모때문에
불량배의 가랑이 사이를 기어 다니는 치욕(恥辱)을 당했고,
빨래터 노파의 밥을 빌어먹기도 했다.


초패왕 항우는 나의 볼품없는 용모를 업신여겨
범증의 천거를 번번이 거부(拒否)하며
십 년간이나 말단벼슬아치 집극랑자리를 맴돌게 했다.


항우에게 실망(失望)하고 유방 밑으로 들어갔으나
연전연승(連戰連勝)하며 '해하'에서 항우를 완전히 섬멸하고
천하를 유방에게 안겨줄때 까지 갖은 수모를 견뎌내야 했다.


나는 초라하기 짝이 없는 몰골 뒤로 천하웅비(天下雄飛)의
뜻을 감추고
뭇사람들의 갖은 야유(揶揄)와 모욕을 참아내며
기어코 전 중국 역사상 최고의 명장(名將)이 되었다.



<한나라 회음후 한신(韓信)>


                  
한때 자존심(自尊心)과 명예(名譽)를 짓밟힌 치욕을 당했다고 
생(生)을 포기(抛棄)하지 말라!

나는 벗 이릉장군을 변호하다 무황제의 노여움을 사서
생식기가 잘리는 궁형의 치욕을 당하고도 목숨을 부지하였다.


당시 궁형(宮刑)의 수치를 못 참고 자살하는 자가 많았으나
죽음이 두려워서가 아니라
못다 이룬 역사적(歷史的) 사명(使命)을 다하기 위하여
죽음을 선택(選擇)할 수가 없었다.


나는 거세된 남자가 모진 생명을 질기게 끌고 간다는
온갖 조롱을 참아내며 옥중(獄中)에서도 저술을 계속하여
마침내 사기(史記)를 완성한 불세출의 역사가가 되었다.


<사기의 작가 사마천(司馬遷)>


               
여자로 태어나서 하고픈 일을 못한다고 얼고만 있지 말라!
나는 아버지 무사확의 후처소생 둘째 딸로 태어나
갓 14살 때 최말단 후궁 재인이 되어 당 태종 이세민(李世民)을

 가무로써 섬겼다.

황궁생활(皇宮生活) 초기 나의 경쟁자는 여자였으나
비구니로 물러앉았다가 태종의 아들 고종의 총애(寵愛)를 받으며
황궁으로 돌아와 4명의 아들과 2명의 딸을 생산하며
황후(皇后)가 된 후부터 나는 남자들과 힘겨운 전쟁을 시작했다.


장손 무기를 내쳤고 상관 의를 처형(處刑)하였으며
심지어 나의 4명의 아들마저 차례로 버렸다.


내 나이 67살,
여자든 남자든 아무도 도전할 수 없는 철옹성(鐵瓮城)을
만들고나서 역사상 전무후무한 여제승신황제(女帝 聖神皇帝)가 되어 15년간 천하를 다스렸다.


<중국유일 여황제 측천무후(則天武后)>

 
                 
집안 배경이 나빠서 요모양 요꼴이 되었다고 변명하지 말라!
나는 오랑캐의 나라 원대 말기 안휘성의 빈농 한족집안에서
태어나 17살에 고아가 되어 탁발승으로서 가뭄과 기근에 찌든
험악(險惡)한 세상과 맞서야 했고 전란통에 비적 무리의
일개 졸개가 되었을 때 아무도 나를 알아주는 이가 없었다.


그 후 혁혁한 전과를 올린 공으로 반란군의 이인자가 되어
원나라 몽골군을 중원에서 몰아낸 후에도
양반사대부 집안의 멸시와 견제(牽制)속에서 시달려야 했다.


나는 송곳하나 꽂을 땅이 없었던 빈농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고아가 되었을 때 조차 부모를 원망(怨望)하지 않았으며
결국 몽골 오랑캐를 몰아내고 한족(漢族)천하를 회복한
명나라의 초대창업 황제(皇帝)가 되었다.


<명나라 태조 홍무제 朱元璋>


 
나이가 어리다고 어미의 치마폭 뒤에 숨어 칭얼거리지 말라!
나는 8살때 황제가 되었고 13살때 결혼(結婚)을 했으며
14살때부터 스스로 친정(親政)을 시작했다.


응석을 부릴 겨를도 없이
오삼계,상가희,경계무의 삼번난(三藩亂)을 제압하고
몽고를 평정했으며 티베트까지 원정했다.


나는 어린 나이의 어리광도 모른 채 군주(君主)가 되어
61년간 천하를 호령(號令)할 수 있었다.

<청나라 제4대 황제 강희제(康熙帝)제

 
 
돈이 없어서 재기할 수 없다고 낙담(落膽)하지 말라!


나는 미천한 집안에 태어나
아버지가 일찍 죽는 바람에 학업(學業)도 못 마치고
전장(錢庄)에 들어가 똥오줌을 치우고 마루를 닦으며
잔심부름으로 어린시절을 보냈다.


빈손으로 사업(事業)을 일으켰고다시 빈털터리 되는 과정을 겪고
또 겪었지만
내가 살아있는 한 아무리 빈손이라도
언제든지 사업을 다시 일으켜 세울 수 있다고 믿었다.


나는 한 푼도 가진 게 없는 가운데도 자기의 재기를 믿었고
내게 없는 것을 메꾸어주는 인재([人才)를 대함에
귀천(貴賤)을 가리지 않았다.


큰 상인이 되는데 돈 보다는 사람이 더욱 소중함을
일찍이 깨달았던 나는 부와 명예를 모두 거머쥔 장사의 신
"상성(商聖)"이 되었다.


청대말 거상 호설암(胡雪巖)

 
 
만년 2인자라고 보스 자리에 대한 욕심으로 자신의 직분을
망각(忘却)하지 말라!


나는 1935년 준의회의에서 모택동을 모시고 만리장정을
따라나선 때 부터 죽는 그날까지 41년동안
2인자의 길을
묵묵히 걸었다.


귀족 가문에서 태어나 공산당 초기 탑리더의 코스를 밟던
내가 가난한 농부의 아들 모택동을 중국혁명의 지도자로
추천하고 스스로를 낮췄던 것은 인민의 마음을 움직이는
호소력이 그에게 있음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총리시절 행정 보고를 함에 모주석의 침상 옆에
꿇어 앉아야 했고 방광암 수술을 받고 싶어도 毛의 허락이
떨어지지 않아 수술을 2년간이나 미루어야했다.


방광암으로 죽어가는 초읽기의 시간 속에서도
미,일과의 수교, 문화대혁명의 폐허속에 놓인 국가경제재건,
등소평을 재신임하는 권력의 재편성을 위해 촌음을 다투었다.


나는 사망하는 순간에도
"다 죽어가는 나 따위는 돌보지말고 다른 아픈 동지들을
돌보시오"라는 유언을 남기며 인민의 마음속에서
영원한 1인자, 인민의 벗으로 다시 태어났다.

중화인민공화국 총리 주은래(周恩來)

 
잘나가다 넘어지고 재기 했다 다시 쓰러진다고 
괴로워하지 말라!


나는 문화대혁명때 반모주자파로 몰려 홍위병으로 부터
공개비판을 당했고, 잠시 일어났지만 하방당하여
강서성의 한 공장에서 4년간을 육체노동자로
버텨야 했다.


주은래 총리의 도움으로 복권되어 국무원 부총리로 재기했다가
4인방의 농간에 또 다시 실각하고 가택연금까지 당해야했지만
모택동사후 정국수습용으로 재기용된 후
화국봉과의 5년 권력투쟁끝에 최고실권을 장악했다.


나는 세번 쓰러지고 네번 일어난 역전의 용사로서
마지막 정치적 위기였던 천안문사태의 시련을 견뎌내고
아무리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는 오뚜기 부도웅 개혁개방의
총설계사가 되었다.

<중화인민공화국 주석 鄧小平>

 

'역사 이야기(124)'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한원당 김 굉필 (寒暄堂 金宏弼 1454∼1504)  (519) 2022.11.20
함벽루(涵碧樓)  (500) 2022.10.28
독대  (1) 2022.04.02
이성계(李成 桂) 1355-1408년  (0) 2020.12.14
퇴계 이황(退溪 李滉)선생 자명(自銘)  (0) 2020.10.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