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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계 영정 보물931호
참 오랜만에 제가 좋아하는 역사(歷史) 글을 올려본다. 1392년 7월 공양왕을 원주로 내쫓고 새 왕조의 태조(太祖)로서 왕위에 올랐다. 그는 새 왕조의 국호를 조선(朝鮮)으로 확정하고 1393년 3월 15일 새 국호를 쓰기 시작했고 다음에는 새 수도 건설을 왕사인 무학대사 박자초(朴自超)의 의견에 따라 한양을 새 서울로 삼기로 결정하였다. 또한, 유교 정신을 국가의 기본으로 삼고 농본주의(農本主義)를 건국이념 으로 삼아 조선 500년의 근본 정책이 되게 하였고 농상 장려 관세 정비등 조선의 기틀을 다지는데 큰 업적을 남겼다. 1394년 정도전(鄭道傳)의 조선 경국전(經國典)과 각종 법전이 편찬되었고 승유척불 정책을 시행 서울에는 성균관 지방에는 향교를 세워 유학(儒學)의 진흥을 꾀하는 동시에 불교를 배척하는 정책을 쓰기 시작했다. 이성계[李成桂]는 고려 말기 신흥 사대부 계층을 대표한 무인(武人)이었다. 일찍이 무술에 재능을 보인 이성계는 고려 말기의 장군으로 원나라의 쌍성총관부를 공격하여 빼앗고 홍건적 10만 명이 고려에 쳐 덜어 왔을 때도 용감히 맞서 싸웠다. 그후 동북면 병마사가 되어 원나라 장군 나하추 를 무찔렀으며, 1378년 부터1380년 까지 지리산과 해주 황산 등 에서 왜구를 크게 무찔렀다. 고려시대(高麗時代)에 그를 더욱 유명한 장수로 만든 것은 위하도 회군이었다. 1388년 (우왕14) 5월 요동 정벌에 나선 우군 도통사 이성계가 압록강 하구 위하도에서 군사를 회군한 사건을 말한다. 우왕 즉위 뒤 고려의 외교는 천명에서 친원으로 바뀌어 고려와 명나라의 관계가 악화되었다. 우왕은 최영 장군을 팔도 통도사로 삼아 평양에나가 독전하고 조민수(曺敏修)를 좌군 도통사 이성계를 우군 도통사 로 삼아 정벌군을 이끌고 출전하게 되었다. 처음부터 요동정벌에 반대한 이성계는 정벌군이 압록강 하류 위하도에 이르자 진군을 멈추고 조민수(曺敏修)와 상의하여 요동까지는 많은 강을 건너야 하는데 장마철이라 군량미 운반이 곤란하다며 습기로 활이 풀려 싸움을 할 수 없었다. 소국이 대국을 섬기는 것이 나라를 보호하는 것이니 요동 정벌은 불가능하다고 상소로서 회군을 청 하였으나 평양에 있던 최영과 우왕은 허락하지 않자 이성계는 5월 20일 회군을 결행하여 군대를 국내로 돌이켰다 . 군사를 돌려 개경으로 진척하면서 최영을 제거하고 우왕을 패한 후에 조민수와 이색의 천거로 창왕을 내세웠다. 다음 해 창왕을 다시 몰아내고 고려의 마지막 왕이 된 공양왕을 임금의 자리에 앉혔으며 정몽주 등 고려의 마지막 충신들을 제거하고 공양왕도 임금의 자리에서 물러나게 하였다. 이성계는 조선을 세우지만, 고구려 옛 땅을 정벌하라는 왕{王)의 지시를 어기고 위화도에서 회군하여 스스로 왕이 된다. 역사학자들은 그 당시의 명(明)나라 실력과 정세로 보아 이성계가 진격한 만큼 만주 지역이 우리의 영토가 될 수 있었다고 주장한다. 그런 측면에서 보면 이성계는 그저 반란군일 뿐이고, 우리의 옛 영토를 되찾을 기회를 잃어버리게 한 민족의 반역자일 뿐이다. 물론 당시 공민왕 시절부터 친원파(親元波)와 친명파(親明波)간의 갈등으로 인한 요동정벌 계획이기는 하였지만, 아쉬운 기회 이였음은 분명하다. 그 후 조선 500년 내내 명나라를 섬기며 신하로서 살아야 했다. 혹자는 이성계를 화교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북한에서는 최영 장군을 애국자로,,,이성계는 민족의 반역자로 폄하하며 인민의 증오와 저주의 대상이라고 주장한다. 이 주장에 동조하면 친북세력(親北勢力)이나 빨갱이가 되는지 모르겠다. 조선을 건국한 왕으로 많은 업적을 남긴 그였지만 자식들로 인하여 그의 말년은 그다지 즐겁지 못하였다. 왕자 사이에 왕권 계승을 둘러싸고 8명의 왕자들이 치열한 왕위 다툼 쟁탈전으로 많은 피를 흘리는 것을 지켜보아야만 했다. 장남인 방우는 아버지가 고려를 무너뜨리고 새 왕조를 새우는 데 반대하다가 산속으로 들어가 버렸고, 개국공신인 다섯째 아들 방원은 두번이나 왕위 다툼을 일으켰다. 이성계가 아끼던 방번과 방석 두 왕자를 죽이고, 사위 이제 와 오른팔이던 정도전(鄭道典)과 남은(南誾) 등 은 이방원(태종) 손에 죽었다. 1차 왕자의 난 방원의 난 정도전의 난(亂)이라고도 한다. 태조는 정비(正妃)인 신의왕후와의 사이에서 방우, 방과(후의 정종), 방원(태종), 방간 등 6형제를 두었다. 계비(繼妃) 신덕왕후와의 사이에서는 방번과 방석 두 아들을 두었다. 태조는 계비의 소생인 방석을 후계자로 정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소외당한 정비(正妃) 소생의 아들들, 특히 이방원의 불만은 매우 컸다. 한편 정도전은 방석을 끼고 돌며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고 신권(臣權)의 강화 및 왕권의 약화를 추진한다. 결국 이방원은 휘하 세력을 동원하여 정도전과 세자인 방석, 그의 형 방번을 살해하고 만다. 이때 이방원의 추종 세력들은 이방원을 세자로 책봉하려 하나 정치적 입장을 고려하여 정비 소생인 둘째 아들 방과를 세자로 책봉하여 후에 정종임금이 된다. 2차 왕자의 난 방간의 난 또는 박포의 난 이라고도 한다. 정종은 정비에게서 소생이 없었고 후궁에게서 서자(庶子)들만 낳았다. 다시 미묘한 후계문제가 발생하는데,,, 태조 정비의 소생인 방간과 방원이 다시 세자의 지위를 놓고 무력 충돌을 벌인다. 수적으로 우세한 방원이 이기고 이로써 방원의 지위는 확고해지며 마침내 세자로 책봉된 후 그해 11월 정종으로부터 왕위를 물려받아 태종이 된다. 이를 박포의 난이라고도 하는 이유는,,,박포는 1차 왕자의 난에서 공을 세우나 일등 공신이 되지 못하여 방원과 반복을 벌이다가 방원에 대한 방간의 불평을 꼬드겨 방간의 거병을 선동하였기 때문이다. 1398년 이성계는 방번과 방석의 죽음을 몹시 상심했다. 그는 곧 왕위를 둘째 아들 방과(정종)에게 물려주고 상왕이 되었으나 방원(태종)에게 돌아오니 크게 실망한 이성계는 딸 경순이를 비구니로 만들어 함께 절에 들어가 조선을 새우는 과정에서 죽어간 수많은 사람들의 명복을 빌기로 결심하고 들어 간곳이 오늘의 함흥이다. 이성계는 조선을 건국하고 왕위에 오른 후 7년 되는 해에 1차 왕자의 난에 의하여 왕위를 정종(定宗)에게 물려주고, 2차 왕자의 난으로 이방원이 즉위하자 고향인 함흥으로 옥새를 가지고 떠나 버린다. 자신과 왕실의 권위를 위하고, 옥새도 돌려받을 겸 태종은 아버지를 환궁시키기 위하여 무학대사 등 사신 즉, 차사(差使)를 보낸다. 그러나 이성계는 그 사신들을 모두 죽이고 결국 그 사신들은 돌아오지 못한다. 이를 "함흥차사"라 한다. 그러나 이는 아들 이방원을 오랫동안 멀리하였던 이성계의 행동으로 백성들이 지어낸 말이며 이 이야기를 옮겨적은 연려실기술 등으로 전해 내려오는 야사(野史)일 뿐이다. 몇 차례 사신을 보낸 것은 맞지만 그들은 전부 살아 돌아왔고 결국 이성계는 환궁한다. 이성계가 무학대사의 설득으로 한양으로 돌아왔지만, 방원에게 옥쇄를 넘겨주기는 세 차례에 걸친 험한 시험을 했다고 한다. 방원에게 화살을 쏘는 등 실로 위험한 실험이지만 방원(태종)은 운이 좋게 이를 통과해 결국 옥쇄를 받게 되었다. 농 담 어느 날, 이성계는 무학대사와 산책을 하다가 무학대사에게 누가 더 농담을 잘하는지 기를 하자고 제의한다. 그래서 이성계는 무학대사에게 농을 걸었다. "대사! 내가 보기에 스님은 꼭 돼지 같소" 라는 말에 무학대사는 뜻밖에도 "소승이 보기에 전하는 부처님 같습니다." 라고 응수하였다. 이에 이성계가 의아하여 "아니 나는 돼지같이 보인다고 했는데, 화를 내지 않고 부처님같이 보인다고 하시오" 하니 무학대사 왈 "부처님 마음으로 보면 부처님같이 보이고, 돼지마음으로 보면 돼지같이 보이는 것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이성계 태실 이성계태실은 함경도 용연지역에 두었으나 태조 5년(1396년)에 무학대사의 지시로 만인산 산봉우리로 이전 하였다. 1928년 조선 총독부가 전국 왕들의 태 항아리들을 서울로 옮길 때 태실 구조는 파괴 되었으나, 최근에 약 100m 떨어진 터널 위에 복원한 것이다. 이성계 묘소 이성계의 묘소는 경기도 구리시 동구릉에 있다. 동구릉에는 1대 태조 이성게의 거원릉을 중심으로 9개의 무덤이 있다. 건원를은 고려 공민왕과 노국공주의 현 정릉을 기본으로 삼아서 만들었으며, 조선왕조 최초의 왕릉으로서 이후 왕릉의 본보기가 되었다. 문인석 과 부인석 이성계는 아들 방원(태종)을 왕으로 인정하고 1408년 5월 24일 74세로 일생을 마쳤다. 2020년 12월 일 석암 조 헌 섭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