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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지(9)

영상 사진 편지지 1,

by 석암 조헌섭. 2012. 7. 30.

2. 미디어 안 보이는 소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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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어우동(於于同).

본명은 박어우동(朴於宇同)이지요 가족으로는 아버지는 승문원 지사 박윤창(朴允昌) 어머니는 정귀덕(鄭貴德). 오빠는 박성근(朴成根) 이었어요 조선시대 당시 금기에 가까운 간통사건을 일으켰기에 가문에서 파문되어 성을 뺀 어우동(於宇同)이란 이름으로 기록되었지요 양반 집안에서 태어나 곱게 자란 뒤 왕손인 종실 태강수(泰康守) 이강와 혼인을 했는데 태강수 이강은 아내를 좋아하지 않았어요 타고난 미색은 있었으나 시집간지 얼마않되어 방사에 미흡했기 때문이었지요 결국 이동은 이혼할 속셈으로 아내 어우동이 집에 온 은장이와 바람이 났다고 모함했는데 조사 결과 무고로 밝혀져서 어우동과 재결합하라는 명을 받았으나 이를 실행치 않고 오히려 어우동을 내쫏았어요 황당하게 소박을 맞고 홀몸이 된 어우동은 그때부터 결심하였지요 이왕 이렇게 된거 남자를 사귀라고 옆에서 꼬드긴 여종도 있었어요 어우동은 남편에게 복수하는 길은 많은 사람들과 정분을 나누는 것이라 생각했지요 그래서 수산수, 방산수를 비롯한 왕족들, 과거 급제자 홍찬 등 양반들 그 외에 양인과 노비를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애정 행각을 벌였어요 그러다 보니 몸은 더욱 뜨거워 지고 남자없이 못자는 음녀(淫女)가 되었지요 꼬리가 길면 밟피는법 어우동과 간통을 한 촌부가 치졸하게 간통사실을 승정원에 신고했어요 그로인해 옆에서 꼬드긴 여종과 함께 교수형을 당했지요 그러나 어우동은 간통죄가 아니라 강상죄로 처형되었는데 강상죄는 패륜이나 노비가 주인을 살해한 경우 처벌받는 엄청나게 무거운 중벌이었어요 양반집안 출신의 여성이 양인을 비롯한 천민과 노비 십여명과 정을 통한 희대의 간통사건이라 사회의 파문이 컸다고 전해지고 있지요 그녀가 세상을 떠난 뒤 그녀가 남긴 시와 작품은 파괴되거나 불태워졌으며 유감동, 황진이, 허난설헌, 이구지, 대방군부인 송씨 등과 함께 오랜시간 동안 부도를 어긴 여성으로 매도당해 지탄을 받아 왔어요 또한 장녹수, 문정왕후, 장희빈 등과 함께 조선의 악녀로 비판 받아 왔지만 마침내 1910년에 대한제국이 망하고 나서야 그들의 명예가 회복되었지요 그의 대표작 '부여회고(扶餘懷古)라는 시를 남겼는데 백마대 빈 지 몇 해가 지났는고 낙화암 선 지도 참으로 오래겠지 청산이 만약 침묵하지 않는다면 천고의 흥망을 물어 알 수 있으리

8. 장녹수(張綠水).

 장녹수(張綠水)는 본래 제안대군(齊安大君)의 여종이었지만 용모가 뛰어나고 가무에도 능해 연산군에게 총애를 받으면서 숙원(淑媛)에 봉해졌지요 외모 자체는 평범하여 그다지 미인이 아니었지만 몸매가 탁월하고 엄청난 동안(童顔)이라 서른이 넘은 나이에도 10대 소녀와 같은 얼굴이었다고 하지요 연산군이 원하는 것을 잘 알아 비위를 잘 맞추어 주었다고 하는데 연산군의 아명(兒名)을 부르며 데리고 놀았는데 때리고 꼬집고 조롱했다고 하니 어떤식으로 아양을 떨고 비위를 맞추었는지 가히 짐작이 가지요 하지만 그가 왕(王)의 총애(寵愛)를 이용하여 국사에 간여하며 연산군(燕山君)의 실정(失政)을 부추기자 뒤이어 일어난 중종반정(中宗反正)으로 참형을 받았어요 그래서 화무십일홍 권불십년 (花無十日紅 權不十年)이라 했나봐요

9. 황진이(黃眞伊).

 황진이(黃眞伊, 1506년? ~ 1567년?)는 조선 중기의 시인, 기녀, 작가, 서예가, 음악가, 무희이지요 중종·명종때(16세기 초, 중순경) 활동했던 기생으로 다른 이름은 진랑(眞娘)이고 기생 이름은 명월(明月)이었어요 중종때 개성의 황씨 성을 가진 진사의 서녀(庶女)로 태어났으며 생부에 대해서는 전해지지 않아요 시와 그림, 춤 외에도 성리학적 지식과 사서육경에도 해박하여 사대부, 은일사들과도 어울렸지요 황진이는 학문적 지식이 해박하였으며 시를 잘 지었고 그림에도 능하였어요 많은 선비들과 이런 저런 인연과 관계를 맺으면서 전국을 유람하기도 하였고 그 가운데 많은 시와 그림을 작품으로 남기기도 했지요 그러나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등으로 인해 대부분 실전(失傳)되었고 남은 작품들도 그가 음란함의 대명사로 몰리면서 저평가되고 제대로 보존되지 않아 대부분 멸실되었어요 당시 생불이라 불리던 지족선사를 10년 동안의 면벽 수도에서 파계시키는가 하면 호기로 이름을 떨치던 벽계수라는 왕족의 콧대를 꺾어놓기도 하고 당대 최고의 은둔학자 서경덕을 유혹하기도 하였지요 그는 뛰어난 재주와 함께 출중한 용모로 더욱 유명하였어요 신분 특성상 황진이라는 이름이 정사(正史)에 등장하지는 않았지만 여러 야사(野史)들을 통해 그에 대한 내용이 전해 내려오지요 서경덕, 박연폭포와 함께 송도 3절로도 불렸으며 대표작으로 《만월대 회고시》, 《박연폭포시》,《봉별소양곡시(奉別蘇陽谷詩)》 《영초월시(?初月詩)》等 수많은 작품과 시조를 남겼어요 지금도 풍월을 좋아하는 사내들의 가슴을 설레게 하는 황진이 사내라면 한번쯤 품고 싶은 희대의 절세미인 이었지요

10. 장희빈(張禧嬪).

희빈 장씨(禧嬪 張氏, 1659년~1701년) 장희빈(張禧嬪))은 조선의 제19대 왕 숙종의 빈(嬪)으로 제20대 왕 경종(景宗)의 어머니이지요 숙종 임금보다는 2년 연상이었어요 본명은 장옥정(張玉貞) 본관은 인동(仁同)이지요 아버지는 역관(驛官) 출신인 장형(張炯)이며 어머니는 장형의 계실인 윤씨였어요 조선 왕조 역사상 유일하게 궁녀 출신으로 왕비까지 오른 입지적인 여인이지요 희빈 장씨는 본래 소의(昭儀)의 신분에 있었어요 하지만 오랫동안 자식을 보지 못한 숙종의 총애를 받아 원자 균(훗날 경종)을 낳으며 희빈으로 책봉되었지요 그리고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서인의 영수 송시열이 사사되고 남인이 집권하자 장희빈(張禧嬪)은 인현황후(仁顯王后)를 폐출하고 왕비의 자리에까지 올랐어요 하지만 갑술환국(甲戌換局)으로 서인이 재집권에 성공하자 인현황후(仁顯王后) 민씨가 복위되며 장씨는 다시 희빈으로 강등되었지요 이를 시기한 장희빈(張禧嬪)이 밤마다 저주를 내렸는데 이 사실이 발각되어 사사되었어요 인현왕후전이나 수문록 등의 소설 야사에서는 사약을 마시고 사사된 것으로 묘사하고 있으나 숙종실록 등 정사기록은 주례의 규정에 따라 사사할수 없음을 언급하고 목을 메어 자결하였음을 알수 있는 기록들이 있지요 아들 경종이 즉위하자 다시 황후로 복권되었지만 그녀의 아들인 경종이 사망하고 숙빈 최씨의 아들인 영조가 즉위하자 인현왕후의 오빠 민진원을 위시한 노론인들이 또 폐위하였어요 아무튼 죽어서도 편치않은 삶을 살다간 비운의 여인이었지요 -* 언제나 변함없는 녹림처사:조동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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