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창녕조씨 인물 ,족보(23)

[스크랩] 조식이 지리산에 열두번 오른 까닭은? (방송원고)

by 석암 조헌섭. 2011. 7. 7.
조식이 지리산에 열두번 오른 까닭은? (방송원고)| 2009년 답사자료
조청일 조회 12 |추천 0 | 2009.07.06. 17:26

동영상 : highSpeedVod(1267299);  
줄거리:

〔역사스페셜 7월22일 방송 원고〕
조식이 지리산에 열두번 오른 까닭은?
----------------------------------------------------------------------------------------

□프롤로그
지리산 부감 19초 (3초 흘리고)
백두대간이 뻗어내려
남녘땅 한가운데 우뚝 서 있는 산.

세상이 혼란할 때
지리산은 사람들을 불러들이곤 했다.

천왕봉 16초 (천왕봉 보고)
한 번 오르기도 어려웠던 시대에
지리산을 열두번이나 오른 인물이 있다.
조선 최고의 성리학자 남명 조식.
그는 왜 지리산에 열두번이나 오른 것일까?

----------------------------------------------------------------------------------------
서브 타이틀 조식이 지리산에 열두번 오른 까닭은?
----------------------------------------------------------------------------------------

□ST 1.

#지리산 기본 셋트
지리산을 열두번이나 올랐다---
뭐, 그런 일이 얘기거리가 되냐고 생각하는 분들이 분명 계실텐데요.
그러나, 때는 지금으로부터 450년전.
교통편도 등산로도 발달되지 않은 조선시댑니다.
지금이야 어렵지 않게 누구나 오르는 산이지만
당시에는 평생 한 번 오르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그런 지리산을 남명 조식은 왜 열두번이나 올랐을까요?

#남명 초상 내려오고
그 궁금증을 풀기 위해서는 먼저 남명 조식이 어떤 인물인지 짚고 가야 할 것입니다.
조식은 퇴계 이황과 더불어 조선을 대표하는 성리학잡니다.
그런데 퇴계에 비해서는 후대에 비교적 덜 알려진 편인데요.
퇴계가 관직을 가지고 중앙정계에서 활발한 활동을 했던 반면
남명은 처사로서의 삶을 살았다는데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습니다.
처사--- 좀 생소한 말인데요.
벼슬길을 단념하고 초야에 은둔한 선비를 가르기는 말입니다.
오늘날로 치면 재야 지식인 정도가 될텐데요.
남명이 지리산을 찾았던 것은 처사로서의 그의 삶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남명은 왜 지리산에 올랐을까요?
먼저 남명이 갔던 길을 따라 지리산으로 떠나 보겠습니다.
-------------------------------------------------------------------------------------

□VCR 1. 남명을 따라 떠난 지리산 (남명의 산수유람이 갖는 의미)

남명집 표지 20초 (2초 보다 남명집 뜨면)
남명 조식이 생전에 쓴 글을 모아놓은 문집에
지리산을 둘러보고 쓴 글이 한 편 남아있다.

유두류록 글자 보이고 유두류록, 두류산이라고도 불린 지리산을
유람한 기록으로 오늘날의 기행문에 해당한다.

유두류록 中 '사천에서' 5초 이 기행록은 1558년, 남명이 지리산에 열두번째
오른 후 남긴 것이다

해동지도 CG 22초 우선, 남명의 지리산 유람 코스를 살펴보면
자신이 머물던 합천의 삼가를 떠나
남해바다와 섬진강 뱃길로 지리산 초입인
악양까지 간다.
거기서부터 쌍계사, 불일폭포, 신응사까지--
지리산뿐 아니라 그 주변 지역까지 아우르는
16일간의 일정이었다.

뇌룡정 17초 (2초 보다가)
경상남도 합천군 삼가에 있는 뇌룡정.
남명의 나이 마흔여덟, 김해의 처가생활을 접고
고향으로 돌아와 세운 집이다.
남명의 지리산 유람은 이곳에서 시작된다.

뱃길 9초 진주목사 김홍, 고령현감 이희안등
절친한 선비 네명이 남명과 함께 길을 떠났다.

새 날고 19초 하룻밤을 꼬박 새워 아침해가 떠오를 무렵
도착한 곳은 하동 땅.
밤새 동풍이 불어 일행을 태운 배는
닻을 내리고 돛을 달아 이곳에 닿았다.
아침해가 떠오를 무렵 일행들은
구름낀 지리산을 보았다.

☞정우락 교수 EFFECT -----------------------------------
그때 남명 일행을 태운 배는 난리가 났지. 대단히 기뻐하고. 방장산이 삼
한 밖에 있다고 하더니 여기서 얼마 멀리 있지 않는구나. 이렇게 얘기하
며 기뻐하고 환호하는 그런 장면이 유두류록에 나온다.
-------------------------------------------------------

섬진강 4초 (3초 흘리고)
유람 닷세째,
삽암 16초 배는 섬진강변에 있는 삽암을 지났다.
그곳은 한유한의 옛 집이 있던 곳이다.
지금 그 바위에는
후대인들이 한유한을 사모하여 하여
새겨놓은 모한대란 글자가 있다.

바위 슬로우 5초 남명은 이곳을 지나며 한유한의 삶을 떠올린다.

유두류록 C.G 15초 한유한은 고려 때 사람으로
무신들의 득세로 세상이 어지러워지자
벼슬을 마다한 채 가족을 이끌고
지리산으로 들어왔다.
그 뒤에도 나라에서 벼슬을 내렸지만
끝내 거부한 채 나아가지 않았다.

마을 팬 악양정 (흘리고)

악양정 ts 13초 유람 엿세째,
남명은 마음속에 품고있던 또 한 명의
인물을 찾아 나선다.
하동군 덕은리에 있는 악양정,
큰 학문을 이룬 유학자 정여창의 옛 집이다

유두류록 C.G 7초 정여창은 영남 사림파의 중심 인물로
가족과 함께 지리산에 들어 왔지만
연산군에게 죽임을 당했다.

산 오르는 취재진 부조리한 시대에 맞선 두 인물에게서
남명은 자신의 모습을 보았고
처사로서의 삶을 다잡았던 것이다.

올라가고 여행 아흐레째, 일행은 쌍계싸를 지나
불일폭포를 향해 올라갔다.

불일폭포 20초 등산길이 험해서 열걸음에 한 번 쉬고
열걸음에 아홉걸음을 돌아보면서 도착한 불일폭포.
지리산이 품은 최고의 비경 중에 하나다.

불일폭포 TS (그림 흘리고)

사람 보이고
+유두류록 C.G 29초 남명은 유두류록에서 불일폭포를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바람 소리, 우레 같은 물 소리가
서로 뒤엉켜 아우성치고
낮도 아니고 밤도 아닌 어두컴컴한 상태가 되어
문득 물과 바위를 구별할 수 없었다.
이곳에는 신선의 무리가 살고 있어
사람들의 접근을 막는 지도 모르겠다.
남명은 이곳에서 마치 신선세계에 온 듯한
느낌을 받은것이다.

화개동천-올라가고 16초 (3-4초 흘리고)
여행 열흘째, 남명 일행은 지금의 의신마을에 있던
신응사에 도착한다.
그러나 지금 신응사는 사라지고
대신 자그마한 초등학교가 자리잡고 있다.

산 2S 3초 초등학교 뒤의 야산에서
돌 가르키고 18초 신응사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었다.
아예 누워버린 부도와
부도를 세웠던 좌대만이 남아 있었다.

☞정우락 교수 EFFECT (T2. 003757)----------------- 40
명 있을 수 있는 규모니까 상당한 규모지. 그 이후에 임진왜란이 나서
없어져 버리고 그 뒤에 여러사람들이 이쪽으로 산천을 찾아 아름다운 지
리산의 풍경을 찾아서 오지만 절터만 보고 결국은 절을 보지 못한 그러
한 기록들이 많다.
----------------------------------------------------

신응사 앞 계곡 12초 (2초 정도 보다가)
신응사에 여장을 풀기 전 남명 일행을
맞이 한 것은 신응사 앞 계곡의 절경이었다.

유두류록 C.G 25초 남명의 신응사 방문은 이번이 세 번째로,
20대 무렵 천왕봉에서 하산하던중
친구와 함께 들른적이 있으며
그리고 30년 뒤, 여름 한 철을 이곳에서
보내기도 했다.
그때마다 남명은 이곳의 절경에 감탄하며
하늘이 빚은 빼어난 솜씨라고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천왕봉 16초 넘친 계곡물로 인해 산에 오르는 것이 어렵자
남명 일행은 천왕봉 미루고
신응사에서 사흘을 보낸 뒤 그대로 하산한다.

걸어오고 (3-4초 흘리고)
여행 막바지, 진주로 돌아 오는 길에
남명은 경남 하동의 삼장마을에 들렀다.
이 마을 출신인 조지서가 생원, 문과등
과거에 연이어 세번을 장원급제했다 해서
마을 이름이 삼장이다.

정문 FS 조지서는 연산군의 세자 시절 스승을 지냈는데,
벼슬에서 물러나 지리산에 은거했다.
그러나 갑자사화때
연산군에 의해 미움을 받아 참수를 당했다.

조지서가 죽자, 아내 정씨는 두 아들을 데리고
절개를 지켰다.

유두류록 C.G 18초 남명은 조지서와 함께 한유한 정여창을
높히 평가하며 이번 유람에서 이 세군자를
만난 것이 무엇보다도 큰 소득이라고 했다.

☞정우락 교수 INT ---------------------------------
한유한이라든가 정여창 조지서 이러한 사람들을 떠올리면서 이 사람들이
어떻게 당대를 살아 갔던가 여기에 관심을 가지고 또 그 관심은 자기가
배울 점이다라고 생각을 하고 실현해 냈던 것이죠. 그래서 산을 바라보
면서 거기에 대한 역사적인 인식을 더욱더 명확하게 하고 내가 어떻게
이 부조리한 현실을 그 사람들처럼 제대로 살아갈 수 있을까 그런 것을
고민한 것 같다.
----------------------------------------------------

집 16초 산수유람에 대한 남명의 기본 관점은
산수를 보며 사람과 세상을 읽고
그것을 통해 다시 역사를 생각하는 자세
바로 그것이었다.
---------------------------------------------------------------------------------------

□ST 2.

#지도에 남명이 거쳤던 지리산 등반로 다섯군데 표시되고
남명은 유두류록 뒷 부분에 이전에 자신이 올랐던
지리산 등반 코스를 적어 놓았습니다.
지금의 덕천쪽인 덕산동으로 세 번,
쌍계사 계곡이 있는 청학동과 신응동쪽으로 세 번, 함양 방면인 용유동으로 세 번,
덕산동 입구인 백운동쪽으로 한 번, 대원사가 있는 장항동으로 한 번,
그리고, 그의 나이 쉰여덟에 이뤄진 신응동쪽으로의 마지막 등반까지---
경상도쪽에서 오르는 지리산 코스는 거의 다 밟아 본 셈인데요.
남명의 지리산 유람에는 일정한 특징이 있는데
장기간에 걸쳐 주변 지역까지 차근차근 거쳐 갔다는 점입니다.
산수만 보는 게 아니라 그 속에 사는 사람을 보고 세상을 보았던 거죠.

#남명 초상 내려오고
남명의 초상입니다.
어딘지 날까로우면서도 학자로서의 기품이 배어있는 모습인데요.
그런데, 여기를 보십시오. 허리춤에 방울이 두개 달려 있네요.
점잖은 학자의 몸에 방울이라니 좀 의아한 일인데요.

#성성자 나타나고
이것이 바로 남명이 차고 다녔다는 방울의 일종입니다.

#MC 모양 보고, 소리 듣고
모양이나 소리는 그동안 우리가 보아왔던 방울과 다르지 않은데요.
단지 차이가 있다면 남명의 방울에는 성성자라는 이름이 붙어 있다는 것입니다.
성성자, 성자가 깨어 있다는 의미로 늘 깨어있는 정신상태를 말합니다.
남명은 몸을 움직일때마다 나는 방울 소리를 들으며 늘 자신을 반성했다고 하는데요.
그런데, 남명에게는 성성자 외에 몸 가까이에 둔 물건이 또 하나 있었는데
바로 칼입니다.
남명은 그 칼을 몸에서 잠시도 떼지 않았다고 하는데요.
남명에게 칼은 어떤 의미였을까요?
----------------------------------------------------------------------------------------

□VCR 2. 남명이 지리산에 12번이나 오른 까닭은?

강에서 팬 아파트 8초 우선, 남명이 가지고 있었다는 칼의 행방을
찾아 보기 위해 진주에 사는 남명의 후손을
만났다.

조원섭氏 3초 남명의 12대손인 조원섭씨.
앨범 넘기고 14초 조씨는 우리가 찾던 남명의 검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대대로 문중에서 보관해 오다가 6.25전쟁 때
분실했다는 것이다.

조원섭 얼굴 12초 그러나 다행히도 잃어버리기 전에 촬영한
사진 한 장을 가지고 있었다.


☞조원섭氏 INT ------------------------------------
(어떻게 해서 사진을?) 고향 어른이 식량이 없어서 바꾼다고 하길래 나
는 사진 몰랐는데 그 어른이---(카메라는 그때 있었어요?) 카메라가 아
니고 큰 사진기 영업용---(찍은 시점은?)해방직후 1945년에 해방됐으니
까. 46년.
----------------------------------------------------

사진 보고 15초 경의검이라고 불린 남명의 패검은
약 한자반, 45센티미터 정도로
상아로 된 손잡이에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조씨의 기억을 바탕으로 경의검을 복원해 보았다.

검 튀어 나오고 12초 손잡이 안쪽에는 내명자경이라고 새겨져 있는데,
경은 마음을 밝게 하는 것으로
성리학에서 말하는 수양방법의 하나이다.

검 뒤집어 지고 10초 바깥쪽에 새겨진 글자 외단자의는
밖으로 행동을 할 때 불의를 척결하는
실천을 의미한다.
남명이 검에 이 글자들을 새긴 이유는 무엇일까?

☞최석기 교수 INT ------------------------------------
칼이라는 강한 이미지를 통해서 자기 마음과 정신을 강하게 수련하려는
그런 생각 예컨대 경과의를 단순히 이론적으로 하는게 아니라 내가 칼처
럼 목숨을 걸고서 이것을 실천하겠다. 그런 의도로 칼에다 새기신 것 같
다.
-------------------------------------------------------

신명사도 11초 내명자경 외단자의는
일명 경의사상으로 불리는 남명 사상의 핵심이다.
경과의를 중시하는 남명의 사상 중
또 하나 중요한 것이 바로 신명사도인데,

신명사도 C.G 3초 신명사도란 사람의 마음을 수양하는 방법을
도표로 그린 것이다.
신명사 나오고 3초 신명사는 마음의 집이라는 뜻으로
경 나오고 5초 신체안에서 마음을 내적으로 잘 다스리는데 필요
한 것이며, 성리학에서 말하는 경이다.
눈,귀,입 나오고 12초 그런데 마음을 잘 다스리기 위해서는
눈과 귀 그리고 입을통해 듣고 보구 말하는것을
잘 통제하는 것이 중요하다.
성찰, 극치 나오고 4초 그래서, 마음이 사물과 만났을 때 스스로 성찰하고
의 나오고 9초 사리사욕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는
의에 따라 행동해야 한다

뇌룡정 문 3초 신명사도의 구도에 의해 지어진 건물이
바로 뇌룡정이다.
문 팬 14초 임진왜란 때 불탄 건물을
1600년대 남명의 제자들이 다시 세웠는데
건물의 구조가 독특하다.
신명사를 의미하는 본채를 중심으로
사방에 감각기관인 귀와 입 그리고 눈에 해당하는
문 세 개를 두고 있다.

문 홀드 6초

☞최석기 교수 INT -----------------------------------
-
신명사도의 구도를 보면 알겠지만 안쪽이 사람의 마음이 되고 나라로
치면 임금에 해당이 되고 사람의 신체기관중에서 입하고 눈하고 귀가
가장 중요한 기관인데 앞쪽에 있는 것이 입에 해당된다....신명사도에서
마찬가지로 입과 귀와 눈을 잘 단속함으로써 자기 마음을 정화 시키고
사물을 접할때도 이익을 추구하는쪽으로 흔들리지 않고 의로운 쪽ㅇ으
로 따라 나가는 그런 정신을 후세 학자들이 실천하고 따르려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

뇌룡정 문 10초 그런데 남명의 경의사상 중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실천을 의미하는 의다.
편지 C.G 19초 남명이 실천을 강조했다는 점은
뇌룡정에 머물 당시
퇴계 이황에게 보낸 편지를 통해서도 확인된다.
퇴계가 기대승과 사단칠정 논쟁을 벌일 때
남명은 실천을 하지 않고 헛된 담론이나
벌이는 학자들을 비판했다.

☞오이환 교수 INT ---------------------------------------
남명이 가졌던 학문적 문제의식. 즉 성리학의 구답적인 어떤 이론 지향
으로 나아가서는 그것이 아무런 국가사회에 도움이 안되고 유학은 끝까
지 이런 현실을 버려서는 안된다. 현실을 지향하는 학문이 돼야 한다는
그런 문제의식은 실학적 정신하고 대단히 깊이 연결되는 상통하는 측면
이 있다.
-------------------------------------------------------

벼슬거부 C.G 10초 실천 위주의 학문을 강조했던 남명이
수차례에 걸친 벼슬 제수를 번번히 거절하며
현실정치에의 참여를 마다한 이유는 무엇일까?

사화 자료그림 10초 남명이 현실 정치에 나가지 않은데에는
사화의 영향이 컸다.
갑자사화로 외가쪽 친척을 잃었으며,

사화+기묘사화 C.G 5초 기묘사화 때는 부친과 숙부가 벼슬을 잃고
사화+을사사화 C.G 19초 낙향하는 모습을 보았고,
또한 을사사화로 친분이 두텁던
많은 친구들을 잃었다.
뜻 있는 선비들을 죽음으로 내 몬
사화라는 폭압적 정치 현실에
남명은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입은 것이다.

☞정우락 교수 INT ---------------------------------------
을사사화때 성우라든지 이림등 많은 친구들이 죽게 되는데 이 친구들을
생각하면서 다니던 밤이 되면 그 달밤에 노래를 슬피 부르다가 눈물을
흘렸다고 하는 기록도 보인다. 그런 시대에 선비들이 나가도 전혀 소용
이 없는 그런 시대에 남명은 과감하게 출사하지 아니하고 퇴처의 길을
간 것이다. 그것은 나가봤자 이용만 될 뿐 자기의 뜻은 조금도 반영되지
않는 시대였다. 그렇게 판단했다는 것이죠.
-------------------------------------------------------

을묘사직소 C.G 22초 남명이 단성 현감직을 거절하며
임금에게 올린 사직소다.
여기서 남명은 외척정치를 주도하고 있던
문정왕후를 과부로
그런 할머니에게 좌지우지 되던 명종을
고아로 표현해 일대 파문을 일으킨다.
기틀이 무너진 정치현실을 비판한 것이다.

소나무 (그림 많이 보고)
목숨을 걸고 올렸던 상소.
남명의 열두번째 지리산 유람은 을묘사직소로
조야를 한바탕 흔들어 놓은 뒤에 이뤄졌다.
임금을 고아로 표현한 데 분개해
남명을 불경죄로 다스려야 한다는 명종과
위험을 무릅쓰고 직언을 했으니
오히려 남명의 생각을 존중해야 한다는
사관과 대신들의 논쟁이 한창일 때였다.

☞신병주 교수 INT ---------------------------------------
남명이 지리산 여행을 계획했던 것은 한편으로 보면은 그 당시 을묘사직
소의 파문이 있고 난 후 자신의 현실정치 참여의지를 재확인하고 그런
의지를 같이 여행하는 동료들과 함께 나누고 그런 모습을 인근 수령이나
학자들에게도 확인시키는 하나의 시의적인 형태를 띄고 있다고 평가할
수 있다.
-------------------------------------------------------

천왕봉 C.G 23초 (2-3초 흘리고)
남명의 열두번째 유람에는
또 하나의 목적이 있었는데
바로 노년을 보낼 장소를 물색하는 일이었다.
이때 남명의 나이는 막 예순에 접어들고 있었다.
남명은 지리산에 은둔하며
자신의 남은 인생을 정리하고 싶었던 것이다.

☞최석기 교수 INT ---------------------------------------
남명 선생은 우리 나라에서 남쪽에서 제일 큰 천왕봉이 바라보이는 곳에
서 은거를 하시면서 하늘과 닿아있는 천왕봉처럼 큰 정신세계 큰 도덕을
학문을 이룩하셔서 그 시대의 정신 도덕 사람들이 어떻게 사는 것이 마
땅한 것인가 이런 것들을 크게 울려 주고 싶었던 것 같다. 정권에 항거
해서 될 일이 아니니까 그런 정신세계를 가지고 도덕을 가지고 사회를교
화시켜 보겠다는 것이 남명선생이 가졌던 생각이 아닌가 싶다.
-------------------------------------------------------

지리산-산천재 22초 남명은 예순한살에 합천의 집과 재산을
동생에게 맡기고 천왕봉이 한눈에 들어오는
덕산의 산천재에 자리를 잡는다.
그리고 지리산을 스승으로 삼아
자신의 정신세계를 더욱 높히고
현실에 대한 비판을 꾸준히 전개한다.

-------------------------------------------------------------------------------------------------

□ST 3.

#서재 기본 셋트
남명은 성리학 이외에도 다양한 학문과 사상을 포용한 학자였습니다.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거나 심신의 단련에 도움이 된다면
어떤 사상도 받아들일 자세가 되어 있었습니다.
특히 남명은 심성을 수양한다는 차원에서 도가사상에 빠져들었는데요.

#산천재 글자 나오고
남명의 주변에서는 도가사상의 흔적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산천재의 산천은 산과 하늘이라는 일반적인 의미가 아니라
주역에 나오는 대축괴를 말합니다.
이 대축괴는 아주 깊이 은거해 큰 덕을 이루겠다는 뜻입니다.

#뇌룡정 글자 나오고
남명이 13년을 살았던 뇌룡정의 당호 역시 장자에서 차용한 문군데요.
연못처럼 묵묵히 고여 있다가 그 덕이 우러나면 우뢰처럼 큰 소리를 낸다는 의밉니다

#서재 기본 셋트
조선시대의 산수유람은 도가사상의 영향을 받아 이뤄졌는데요.
특히나 지리산을 찾는 선비들은 천왕봉과 함께 반드시 청학동을 찾았다고 합니다.
청학동은 도가의 신선사상과 관련있는 우리 민족의 유토피아 중 하납니다.

#청학동 비결 나오고
이것은 청학동이 어딘지를 알려주는 비결입니다.
누가 언제 기록한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청학동이 갖춰야 할 조건들이 비교적 소상히 그려져 있습니다.
이 비결에 의하면 청학동은 지리산 남쪽 어딘가에 있으며
그곳에는 석문과 폭포가 있고,
좁다란 계곡을 거슬러 오르면 넓은 땅이 있어 농사를 지을 수 있는 곳이라고 합니다.
예로부터 숱한 사람들이 이런 비결을 가지고 청학동을 찾아 나섰는데요.
유두류록에서 남명 역시 청학동을 찾아 나섰습니다.
과연, 남명은 청학동에서 무엇을 보았을까요?
----------------------------------------------------------------------------------------

□VCR 3. 청학동은 어디인가?

청학동 부감 22초 (2초 흘리고)
지리산에서 청학동을 찾아 보기로 했다.
현재 일반인들에게 알려진 청학동은
경남 하동군 청암면 묵계리의 학동마을이다.

과연, 마을 사람들은 자신들이 살고 있는
이곳 을 전설의 유토피아 청학동으로 믿고
있는 것일까요?

촌장 찾아가고 8초 학동마을이 세간에 알려진 것은 6.25전쟁 직후
정감록을 믿는 종교집단이 들어와 살면서부터다.

문서 보여주고 12초 이 마을의 촌장인 서계용 할아버지는
여기가 바로 청학동이라고 주장한다.
청학동이 아닌 학동이라는 행정명칭도
잘못된 것이라 했다.

☞청학동 촌장 INT ------------------------------------
싸워가지고 여기 청학동 만들었어. 여기를 청학동이라고 하고 저 아래를
학동이라고 하지.
-------------------------------------------------------

경남신문 15초 이곳이 청학동으로 알려지게 된 것은 지난 73년,
진주의 향토사가들이 현지를 답사하면서부터다.
각종 문헌을 근거로 청학동을 찾아보니
지금의 학동마을이 바로 청학동이라는 것이었다.

김삼주氏 앉고 10초 그런데 이보다 더욱더 보강된 증거를 대며
청학동임을 주장하는 주민도 있었다.
고조부때부터 이곳에 살고 있는 김삼주씨.

각종 서적들 TS 12초 그는 이곳이 청학동임을 입증할 근거로
정감록과 각종 청학동 비결을 제시했다.

비결 보여주고 23초 그런데 김씨가 소장하고 있는 비결을 보고서야
취재진은 청학동이
한 곳이 아닐수도 있다는 의문을 가졌다.

비결 still+C.G 20초 십여점의 비결과 고서적들에 적혀있는
청학동의 조건을 종합해 보면
청학동은 진주에서 서쪽으로 147리 떨어져 있고
농사를 지을 수 있는 옥토 40리를 갖추고 있으며
광양의 백운삼봉이 한 눈에 들어오고
그곳에는 청학이 서식하고 있다고 한다.

무학도결 C.G 19초 무학대사가 썼다는 무학도결에는
빼어난 지도자가 대대로 이어지고
누구나 부귀공명을 누릴 수 있으며
서른여섯개의 성씨가 장수하며
함께 사는 이상향으로 청학동을 그리고 있다.

화개동천 7초 (2초 흘리고)
지리산에서 처음으로 이상향을 찾은 사람은
신라의 최치원이다.

푸조나무 7초 화개동천에는 최치원의 흔적이 남아있다.
그가 꽂은 지팡이가 자라 났다는 천년이 넘은
푸조나무가 그것이다.

걸어 올라가고 15초 최치원은 화개동천의 절경을 자기 나름의
이상향으로 삼고 그 인근의 삼신동에서
은둔생활을 했지만 청학동이라는 개념을
사용하지는 않았다.

화개동천 15초 그런 청학동을 본격적으로 찾아나선 사람은
고려의 이인로다.
무신정권하에서 참담한 벼슬살이를 경험한
이인로는 세상과 인연을 끊고 운둔할 생각으로
청학동을 찾지만 결국은 발견하지 못했다.

세석고원 부감 10초 이인로의 뒤를 이어 비결을 믿는 수많은
사람들이 청학동을 찾아 나섰다.
지리산 일대의 또다른 청학동 후보지는
세석고원이다.

석문 15초 세석고원으로 들어서는 입구엔
거대한 석문이 우뚝 서 있다.
두 개의 거대한 바위가 기둥이 되어
한 바위를 떠 받치고 있는 형상인데
이러한 석문은 청학동의 구비 조건 중 하나다.

세석고원 (평지) 20초 (3-4초 흘리고)
석문을 통과하면 성석고원이 있고 이곳을 중심
으로 농사를 지을 수 있는 평지가 넓게 펼쳐져 있
다. 청학동의 조건인 초전 40리를 갖추고 있는
것이다.

돌담 보이고 10초 뜻밖에도 사람이 살았음을 알려주는 돌담이
발견되었다.
구한말 이곳을 청학동이라고 믿고 들어왔던
사람들의 흔적이라고 했다.

☞성낙건氏 INT ---------------------------------------
청학동 조건으로 23가지 나오는데 제일 중요한 것이 초전 40리 풀밭으로
40리를 이루는 것이었고 그 다음에 거기서 백운산봉이 정면으로 남쪽으
로 보이고---세석이 거의 완벽하다시피 하고.
-------------------------------------------------------

청학동 위치 C.G 26초 지리산에서 청학동을 찾았던 많은 사람들.
그들 중 일부는 자신이 찾은 청학동을 기록으로
남겼는데 그 위치가 천차만별이다.
택리지를 쓴 이중환은 악양골의 매계를-
김종직은 지금의 연곡사 근처로 보았으며-
경암 유운용은 세석공원을 청학동으로 보았다.

유두류록 中 청학동 15초 남명은 불일암 근처를 청학동으로 생각했다.
심지어 하늘을 오르 내리는 청학을 보았다고
유두류록에 적고 있는데
과연 그곳은 청학동으로서의 조건을 갖추고
있을까?

산 오르고-불일암터 20초 (올라가는 보고)
보조국사 지눌이 수행한 불일암은
82년 화재로 소실되었다.
사방이 산자락에 감싸여 있으며
비교적 넓은 공터인 점에서
청학동이라 한 것에 수긍이 갔다.

☞변규화 노인 INT ------------------------------------
여기와서 가만히 생각하면 집은 변할 것 아니여..조식선생의 그 때 기분
을 생각해 볼 수 있지. 험하게 오른 것을 보고..
-------------------------------------------------------

불일암 터 부감 13초 (그림 보고)
그 불일암에도
사람이 살았던 흔적이 남아있다.

기왓장 가지고 나오고 (보고)

☞정노인 EFFECT ------------------------------------
주변에 파편이 많다. (무슨 파편인가?) 기와장이고 자기고....
-------------------------------------------------------

기왓장 TS 변규화씨에 따르면 구한말에는 동학교도가 --
일제때는 징용과 정신대를 피해 온 사람들이
살았다고 한다.

☞정우락 교수 INT ------------------------------------
인생이 험난할 때 시대가 더욱더 불안하고 불운할 때 유토피아에 대한
관념은 더욱더 증폭될 것이다. 종교가 발달할때 역시 그렇듯이 남명 시
대에도 많은 사람들이 청학동을 찾았는데 그만큼 시대가 불운했다는 것
을 반증하는 것이다.
-------------------------------------------------------

불일폭포 9초 현실의 혼란스러움을 뒤로하고
지리산의 청학동을 찾았지만
불일폭포 + 시 스크롤 13초 남명은 이곳에서도 역시 현실세계의 고민을
털어 버리지 못하고 시를 한편 남긴다.
청학이 나는 이상세계를 보면서도
남명은 물이 흐르는 현실세계를 간과하지
않았던 것이다.

☞정우락 교수 INT ------------------------------------
청학동에서 남명이 그것을 생각했다는 것은 현실을 생각했다는 것은 초
월공간을 그대로 자연공간에 매몰시키지 않고 끊임없이 현실화 시키는
---현실의 불의를 비판하는 것으로 나타나게 되었던 거죠.
-------------------------------------------------------

지리산 17초 세상이 혼란할 때
이상향을 찾아 들어오는 사람들처럼
남명 역시 지리산에서 청학동을 찾았지만
남명은 오히려 그곳에서 자신이 발딛고 서 있는
현실세계의 중요성을 깨달았다.
-------------------------------------------------------------------------------------------------

□ST 4.

#기본 셋트 + 산행 실루엣
남명의 산수유람은 현실을 직시하고
자신의 학문과 정신세계를 높이려는 뜻에서 이뤄졌습니다.
또한, 선비들에게 자신의 사상과 현실 인식을 자연스럽게 피력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습니다.
사실, 남명이 살던 16세기에는 선비들의 산수유람이 유행처럼 번져 있던 때였습니다.
전국의 이름난 산수를 돌아보며 호연지기를 기르는 것이 진정한 선비가 되기 위한
통과의례로 여겨질 정도 였는데요.
이들 중 일부는 자신의 여행과정을 기록으로 남기기도 했습니다.
지리산의 경우만 해도 김종직을 비롯해 김일손 정여창 이동항등
많은 선비들이 기행록을 남겼는데요.
이 기행록들은 당시 선비들의 산수유람이 어떻게 이뤄졌는지를 알려주는
좋은 자료가 되고 있습니다.
남명을 비롯한 당시의 선비들은 어떻게 산에 올랐을까요?
험한 산길, 변화무쌍한 기후, 긴 여정동안의 음식과 숙박등이 만만치 않았을 겁니다.
-------------------------------------------------------------------------------------------------

□VCR 4. 500년전 산행 이렇게 했다. (조선시대 등산 풍속도)

규장각 외경-점필재 16초 당시의 산행 풍속도를 알아보기 위해
선비들이 남긴 유람록을 살펴보기로 했다.
점필재 김종직, 그의 지리산 유람록에서
우리는 당시의 산행 모습을 알 수 있는
단서를 발견했다.

수친서 부분 C.G 12초 김종직은 수친서에 적혀있는 것을 참고하여
여행 도구를 준비했다고 적고 있다.
수친서, 오늘날의 여행 가이드같은 서적은 아닐까?

컴퓨터 앞 12초 수친서를 찾아 보기로 했다.
(자료 없음 보고)
백방으로 찾아보았지만
수친서의 존재는 어디에서도 확인할 수 없었다.

이동항의 방장유록 16초 (2-3초 흘리고)
다시 선비들의 유람기를 확인해 가던 중
18세기에 씌어진 이동항의 방장유록에서
재미있는 사실 한가지를 발견했다.

방장유록 C.G 12초 이동향이 지리산을 유람할때
점필재 김종직의 두류록을
소매에 넣고 다녔다는 부분인데
이는 선대의 기행록이 후대인들의 산행 지침서가
되고 있음을 알려주는 사실이다.

각종 기행록 C.G 12초 기행록은 김종직을 필두로 쏟아져 나오기 시작해
현재 전해지는 지리산 기행록만 70여종에 이른다.
이 기록들을 참고로 해서 당시의 산행 모습을
복원해 보았다.

산행자의 모습 C.G 15초 우선, 선비들의 산행 옷차림은 어땠을까?
기본 복장은 평소와 크게 다르지 않았으며
다만 변덕스런 날씨에 대비해
삿갓과 도롱이 짚신등을 따로 준비했다.

지리산 10초 긴 일정동안 작정하고 나선 길이라
산행의 규모는 오늘날처럼 단촐하지 않았다.

이동항 방장유록 C.G 10초 그리고 수우당 최영경의 경우는 그 보다 더
많아 일행의 수가 백여명이 넘었다고 적고 있다.

이동항 방장유록 C.G 12초 옛날 최수우의 경우는 그 보다 더 많아
일행의 수가 백여명이 넘었다고 적고 있다.

유두류록 C.G+산행C.G 20초 남명의 일행도 40여명에 이르는 꽤 큰 규모었다.
그렇다면 이 많은 인원이 다 선비들이었을까?
남명의 유두류록을 근거로
당시의 산행 모습을 복원해 보았다.

전대 20초 산행을 위해 당시에는 먹고 자고 즐기는데 필요한
모든 도구를 산으로 옮겨가야 했다.
그렇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필요했는데
산행의 맨 앞쪽은 걸음에 흥을 돋을 수 있는
악공과 기생들이 앞장 섰다.

중대 15초 중간 대열에는 선비들이 걷거나 말을 타고
따라갔다.
산수를 보고 느끼는 것이 목적인지라
선비들은 급하지 않게 천천히 움직였다.

후대-전체행렬 fs 13초 또 행렬의 맨 마지막은 노비 수십명이 산행에
필요한 각종 물건을 가지고 뒤 따랐다.
남명은 이 모습을 마치 물고기를 꼬챙이에
꿴 것처럼 질서가 있다고 묘사했다.

짐꾼 C.G 18초 선비 개개인이 준비했던 물품들도 살펴보면
아무때고 읽을 수 있는 시집 한 권과
산수에서 느끼는 감흥을 표현해 줄 문방사우-
그밖에는 옷과 이불등 생활필수품이었다.

<블랙 C.G -- 산행에 구급약은 필수!>
유두류록 C.G 15초 여름철 산행인 경우 특히나 각종
질병으로부터 자유로울 수가 없었다.
갑자기 찾아 온 복통과 설사로
남명 일행은 큰 고통을 겪게 되는데,
이때 사용한 약이 소합원과 청향유다.

경희의료원 15초 그렇다면 이것들은
오늘날의 구급약에 해당하는 약일까?
경희대의 육창수 교수는 소합원이
소합향원이라는 이름으로 전한다고 했다.
소합향원이 어떤 약인지 알아보기로 했다.

동의보감 C.G 12초 동의보감에 의하면 소합향원은
몸 안의 막힌 기를 뚫어주는,
병의 근본을 치료하는 기초 약으로 각종 약재를
환약으로 만든것이라고 한다 .

약재들 7초 이 약에는 백출, 목향, 침향, 사향등 수십가지의
약재가 들어 가는데 오늘날에는 잘 쓰이지 않는
귀한 약재들이다.

☞육창수 교수 EFFECT -------------------------------
필수약재는 사향 침향 정향 세 가지...당시에도 사향, 침향 전부 들어가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

약재들 15초 소합향원의 주 성분인 침향은 월남에서,
또 정향은 중국에서 수입해야 했기 때문에
값이 비싸 양반들만이 음용할 수 있던
귀한 약이었다.

단속사터 12초 한편, 산에 오른 선비들의 숙소는
지리산 곳곳에 산재한 절과 암자였다.
한때 지리산 일원에서 가장 큰 절 중 하나였던
이곳 단속사도 유람객들의 숙소로 이용됐다.

유두류록 C.G 30초 남명은 쌍계사와 신응사에서 며칠동안 머물며
호남 선비들과 어울렸으며
계곡물이 넘치면 스님들이 나무다리를 만들어
주기도 했다.

400여개에 이른다는 지리산의 절과 암자는
산 어디를 가도 만날 수 있는 안식처였고
산속의 지리에 누구보다도 해박한 스님들은
산행에 꼭 필요한 존재였다.
오늘날로 치면 절은 산장이고
스님은 산행 가이드였던 셈이다.

☞최석기 교수 INT ------------------------------------
유람하는 선비들이 백무동 밑의 군자사라면 군자사에서 자고 천왕봉을
오른다. 와서 베이스켐프 같은 역할을 하던 곳이 절들인데 그러다 보니
많은 선비들이 찾아오다보니 그 사람들 대접해야지 지체가 높은 분들은
가마에 태워서 산행까지 해야죠..
-------------------------------------------------------

지리산 부감 12초 16세기, 선비들의 산수유람은 일정한 경향을
가지고 이루어졌는데, 특히 여러사람이 함께하는
유람의 과정을 중요시 했다는 특징이 있다.
----------------------------------------------------------------------------------------
□ST 5.

#산천재 마당에 서서
자, 이곳은 남명이 말년을 보낸 산천잽니다.
지리산 자락을 마지막 삶의 안식처로 삼었던 것인데요.
나이가 들자 남명은 지리산과 더 가까운 곳에 자신을 둡니다.

#산천재 안 둘러보고
지리산을 향한 애뜻한 마음은 산천재의 구조를 통해서도 확인되는데요.
보통 이런 건물은 본채를 앞에 두고 양 옆으로 동재와 서재를 두게 돼 있습니다.
그런데, 보십시요.
본채를 중심으로 동재는 있는데 당연히 있어야 할 서재가 없습니다.
남명은 왜 이런 반쪽 자리 집을 지었을까요?

#서재 복원하고
원래 있어야 할 자리에 서재를 세워 봤습니다.
한눈에 들어왔던 지리산이 완전히 가려져 안 보이는군요.

#MC 동재에 앉아 + 카메라 천왕봉으로
서재를 짓지 않았던 것은 매일같이 천왕봉을 보기 위해서 였습니다.
더이상 지리산에 오르는 것이 어렵자,
여기 이렇게 앉아 지리산을 바라보는 것으로 위안을 삼았던 것이죠.
평생 지리산 자락을 떠나지 않은 남명다운 발상인데요.
그렇다면 지리산은 남명에게 어떤 의미였을까요?

----------------------------------------------------------------------------------------

□VCR 5. 지리산은 남명에게 무엇이었나?

부감 12초 (3초 흘리고)
경상남도 산청군 시천면
지리산이 포근히 감싸고 있는 이곳에
남명의 기질을 보여주는 시비가 하나 있다.

욕천시비 10초 남명이 마흔아홉살때 인근 산 계곡에서
선비들과 목욕하며 읊었다는 시 , <욕천>

시비 ts+최석기 교수 읽고 ☞최석기 교수 EFFECT -------------------------------
온몸 사십년 동안 쌓인 티끌 허물 천섬 맑은 연에 씻어서 다 버렸다. 그
쳤다 다 버려 버렸다. 티끌이나 먼지같은 나쁜 마음이 만약 내 오장육부
속에서 생겨난다면 지금 당장 내 배를 갈라 흐르는 물에 뭍혀 보내겠다.
-------------------------------------------------------
☞최석기 교수 INT ------------------------ --------------
내 마음속에 요만큼이라도 티끌만큼 사욕이 생기면 곧바로 그걸 버리고
다스리겠다 하시는 그런 말씀인데... 강한 현실 대결의식을 보이셨다.
-------------------------------------------------------

덕천서원 15초 학문적 노력과 현실에 타협하지 않는 처신,
남명에 매료된 수많은 학자들이
그의 문하에 모여 들었고
퇴계 이황과 더불어 영남 유학의 쌍벽을
이루는 남명학파가 형성된다.

☞신병주 INT -----------------------------------------
남명은 학자가 이론만 탐구하는 것은 본연의 학자가 아니라고 생각해.
학자는 현실에 부딪쳐서 위기적 상황이라든가 현실에 모순이 있을 때 과
감하게 표현하는 그 행위 그것을 엄청나게 강조했다.
-------------------------------------------------------

유두류록 C.G 8초 남명은 왜를 조그맣고 추잡한 오랑캐라며
특별히 경계했는데

유두류록 C.G 10초 왜구의 배가 해안에 정박했다는 소식에
당장 여행계획을 취소할 정도였고
심지어는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20년전부터
이를 예견하고 제자들에게 병법을 가르쳤다.

삼가식현 30초 (3-4초 보다가)
왜에 대한 이러한 인식은
남명의 국토 인식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남명은 산과 그 산 사이를 흐르는 강줄기를
경락과 혈맥으로 인식하며
우리 국토를 살아있는 하나의 거대한
유기체로 보았다.
국토를 생명체로 볼 정도로 남명은
우리 국토를 사랑했고
때문에 국토와 백성들을 유린하는
왜는 당연히 경계해야 할 대상이었다.

☞정우락 INT -------------------------------------------
남명은 항상 왜에 대해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항상 긴 칼을 차고 다녔
고 제자들에게 병법을 가르켰다---우리 산하를 사랑했다는 것을 알 수
있죠.
----------------------------------------------------

의병장 분포 C.G 21초 남명의 제자들 중에는 남명의 학풍을 이어
현실의 문제에 맞서 대응한 인물들이 많다.
특히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궐기했다.
남명문하들은 이때 활동한 이병장중 남명의
제자만도 곽재우 정인홍 김면 조종도 이대기 등이
넘는다.

극난을 극복하는데 크게 기여하는데
이 때 활동한 의병장 중 남명의 제자만 곽재우
정인홍 조종도 이대기등 약 50여명에 이른다.

진주 20초 이들의 활약상 중 특히 주목할 부분이
진주성 싸움이다
역사상 처음으로 영호남 의병장들이 연합해
왜군을 물리쳤던 전투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영호남 의병연합은,
그 이전부터 영호남 선비들의 교류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호남절의록 27초 (3초 흘리고)
박성무는 진주성싸움 때 두드러진 활약을
펼친 호남의 의병장이다.
그런데 그의 이력엔 좀 독특한 면이 있다.

임진왜란때에는 분명 호남의 의병장
김천일의 문하에 있으면서
왜구에 맞서 싸웠는데,
그 이전에는 남명 휘하에서
성리학을 배웠다는 점이다.

영호남 의병연합에 박성무가 기여했다면,
거기에는 또한 남명의 영향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쌍계사 5초 실제로 남명은 영호남 학자들이 교류할 수 있도록
꾸준히 자리를 마련해 왔다.

유두류록 C.G 25초 이와같은 사실은 유두류록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는데
호남의 관리가 술과 음식을 보내오고
호남 선비 4명과 신응사 계곡에서 3일동안
머무르며 현실정치와 세상돌아가는 얘기를 나눴다
남명은 호남 사림의 거두였던 기대승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다.

☞신병주 INT --------------------------------------------
남명의 지리산 유람에 호남지역의 선비들이 상당히 많이 합류를 한 모습
을 볼 수 있다. 지식인 그룹이 산에서 만나면 현실정치에 대한 얘기를
나눴을 것이고---교분의 장이 넓혀 졌을 것이다.
-------------------------------------------------------

지리산 33초 (3-4초 흘리고)
지리산은 남명에게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는
공간이자, 사상의 깊이를 채워주는 스승이었다.
크게 두드리지 않으면 소리가 나지 않는
거대한 종과 같은 지리산의 기상,
닮고싶은 존재였다.
(포즈)
지리산을 열두번 오르며
마침내는 지리산이 되고 싶었던 남명 조식 !
그러한 간곡한 생각은
천왕봉이 보이는 덕산동에 들어가
인생을 정리하는 것으로 그 인연을 더했다.

덕천서원 29초 지리산과 남명의 특별한 관계는
후대로 하엳금 남명의 학문과 덕행을 계승하고
있다
안으로 마음을 밝게 하고
밖으로 의로써 실천한다는 남명의 경의 사상은
이렇게 그 맥이 이어지고 있다

----------------------------------------------------------------------------------------

□ST 6.

#지리산 기본 셋트
남명의 사상과 학문은 하나의 학파로 정립됐고 수많은 후학이 뒤따랐습니다
남명은 조선 최고의 성리학자였습니다.
그런 대학자 남명이 죽으면서 이런 말을 남겼다고 합니다.
<내 평생 한가지 장점이 있었다면 죽는 한이 있더라도 구차하게 복종하지 않았던 정신이다.
사후에 나를 처사라고 불러라 그것이 내 평생의 뜻이다>라고 말입니다.
명망있는 학자로도, 관직으로도 아닌
그저 한 사람의 처사로 기억되고 싶었던 것입니다.
남명에게 처사는 부조리한 현실에 야합하지 않고
자신의 위치에서 꿋꿋하게 현실의 모순을 극복하고자 노력했던
실천하는 지식인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리고, 지리산은
남명이 처사로서의 정신을 잃지 않고 정진할 수 있도록
말없이 이끌어 준 스승과 같은 존재였습니다.

 

출처 : 진리를 추구하는 만대산
글쓴이 : 진리추구 원글보기
메모 :

'창녕조씨 인물 ,족보(23)' 카테고리의 다른 글

창녕조씨 애국지사의 묘  (0) 2012.06.17
덕양서원(德陽書院)  (0) 2012.06.16
조수미  (0) 2011.09.01
[스크랩] 52년 만에 무죄 조봉암 사건 [펌]  (0) 2011.08.30
금목문학 송하 전명수  (0) 2011.08.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