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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이야기

각재 하항(覺齋 河沆)

by 석암 조헌섭. 2011. 10.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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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재 하항(覺齋 河沆 1538 ~ 1590)

하항(河沆, 1538∼1590)의 자는 호원(浩源)이고, 호는 각재(覺齋)이며, 
본관은 진양(晋陽)으로 수곡(水谷)에 거주하였다. 
그의 문집은 {각재집(覺齋集)}이 있다.
 
15세 때(1552년, 임자) 남명선생의 문하에 출입하면서 문익성, 오건 등과 각별히
    지내면서 학문을 연마하였으며([玉洞先生年譜]),

19세 때(1556년, 병진) 남명선생의 문하에서 처음으로 수업하였다.
    남명선생은 하항이 재주가 있고 또 학문에 뜻이
    독실함을 사랑하여 드디어 여러 성리서(性理書) 읽기를 권하니, 

   그가 이로부터 전적으로 몸을 위하는 학문을 숭상하여 의리의 공부를 일삼으니 
   남명선생이 매양 사람을 얻어 가르친다고 하였다.

19세 때(1556년) 8월에 남명선생에게 공부하러 온 이광우를 만나 함께 수학하면서
    벗으로 사귀었다({竹閣集}). 26세 때(1563년, 계해) 2월에 남명선생이 남계서원을
    찾았고, 강익과 더불어 임훈의 집을 방문할 때에 하항, 조종도, 하응도, 유종지,
    진극경 등이 모시고 갔다. 
24세때(1561년) 최영경, 이조, 오건, 김우옹, 유종지 등과 서로 오가며 강마하였고,
    1566년 봄에 이정(李瀞)은 남명선생을 모시고 임훈을 방문하였는데, 이 때 하항,
    하응도, 유종지 등도 함께 갔으며, 노진의 집에 이르자 노진이 강익 및 제공들을
    불러 함께 남명선생을 모시고 안음(安陰) 옥산동(玉山洞)으로 가서
    심성정(心性情)을      공부하였다

27세 때(1564년) 겨울에 정사현, 박제현, 최영경 등이 박제현에게 정사시(精舍詩)를
    주었다. 29세 때(1566년) 이정(李楨), 김우옹, 노진, 강익, 정유명, 정구(鄭逑), 조종도,
    이광우 등과 더불어 남명선생을 모시고 단속사에서 산천재로 모였다. 

30세 때(1567년) 하항(河沆)이 덕천에서 이광우의 죽림정사를 방문하였다. 
   
    이때(1567년 식년 생원에 제1등으로 합격하였다. 

39세 때(1576년, 병자) 최영경, 유종지, 성여신 등과 더불어 덕천서원의 건립을
     의논하였고, 8월에 덕천에 남명선생의 사우(祠宇)를 세웠다.
    이 때 최영경, 손천우, 유종지, 하응도, 이천경, 이로, 이조, 권세륜, 이광우,
    이정(李瀞) 등과 힘을 합쳤다.

40세 때(1578년) 1월 11일에 경상 감사가, 진주(晋州)에서 사는 생원(生員) 
    하항(河沆) 등은 학식이 정밀하고 밝으며 조행이 보통 사람보다 뛰어나다는
    계본이 올려졌고({宣祖實錄} 11년), 남명선생이 돌아가시자 심상을 입었고,
   덕천서원의 원장이 되어서는 일시의 사표가 되었다. 

46세 때(1584년) 이대기를 방문하였다. 
    서원지(書院志)와 산해연원록(山海淵源錄)을 찬술하였는데,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었다고 한다. 

47세 때(1585년) 이정(李瀞), 유종지 등의 여러 선비들과 더불어 진주의
    공옥대(拱玉臺)에서 학문을 강론하였다. 

1589년 기축옥사때 최영경이 화를 입어 그의 억울함을 구하고자 힘썼으나
이루지 못해 안타까워하였다.
그의 저술은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어 대부분 전하지 않으나, 문장이
고답적(高踏的)이어서 그의 동료들은 그의 문장을 설중매(雪中梅)라고 평했다. 


 53세 때(1590년)  각재 하항 선생이 선생이 생을 마감항 후
1869년 에 조선시대 학문가 각재(覺齋) 하항(河沆) 선생을 기리기 위해
    세운
진주의 제1호인 대각서원(大覺書院)에 제향(祭享)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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