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대 대통령 문인] 운명처럼 … 노무현의 동지, 노무현 계승자 되다. [출처: 중앙일보] [중앙일보] 입력 2017.05.10 02:34 문재인이 걸어온 길 노무현 정부의 2인자가 아니라 노무현의 계승자이자 문재인 정부의 1인자다.
그는 마지막 도전이라던 2017년 5월 ‘장미대선’에서 19대 대통령으로 청와대에 입성하게 됐다. “김대중 정부, 노무현 정부를 잇는 제3기 민주 정부의 대통령.” 문재인이 7일 광주 유세에서 강조한 차기 대통령의 의미다. 인권변호사와 청와대 참모를 거쳐 정치인 그리고 대통령이 되기까지, 문재인이 걸어온 길은 평탄하지 않았다. ‘인생의 동지’ 노무현의 죽음을 가까이서 지켜봐야 했고, 눈물을 흘려야 했다. 또 5년 전 첫 번째 대통령 도전에선 쓴맛을 봐야 했다. 크레용 살 돈도 없던 피란민의 아들 대학 때 시위로 제적, 특전사 징집 #학생 문재인 “제 아버지는 공산주의가 싫어서 피란오신 분이다. 영하 27도 흥남 부두에서 출발한 미국 화물선에 부모님과 누님이 타고 있었다.”(지난달 24일 방송연설) 살던 부모는 어렵게 미군 배에 몸을 싣고 남으로 향했다. 영화 ‘국제시장’의 배경인 50년 12월 23일 흥남 철수 때였다. 곤궁한 삶과 교육 문제 때문에 문재인의 부모는 부산으로 이사했다. 문재인의 서류상 본적도 부산시 영선동이다. 신자가 됐다. 그는 대담집 『대한민국이 묻는다』에서 “12가지 색 이상인 크레용은 아예 사달라고도 하지 않았다”고 적었다. 가난했던 집안 살림에 대한 그의 기억들이다. 수석 입학했다. 승효상(건축가), 박맹우(국회의원), 박종웅(전 의원) 등이 경남고 동기였다. 고교 시절 초기에는 ‘문과에 문재인, 이과에 승효상’이라고 불릴 정도로 학업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하지만 술·담배에 손을 댔고 싸움을 하다 정학도 당했다.
학창 시절 별명은 ‘문제아’. 그는 “억압적이던 당시 교육 분위기와 안 맞아 부딪치다 보니 내 이름에서 따서 문제아라고 불렸다”고 회상했다. 그는 “원래 대학에서 역사를 전공하고 싶었다. 그런데 담임 선생님과 부모님이 반대해 할 수 없이 방향을 틀었다”고 소회를 밝혔다. (5일 부산 연설) 시위를 주도했다. 75년 4월 집회 때 구속되면서 그해 6월 징역 8월에 집행유예 1년을 선고받고 대학에서 제적당했다. 그는 “교도소로 송치되던 날 호송차 철망을 통해 어머니를 봤다. 나를 보고 막 뛰어오며 손을 내미는데 차는 점점 멀어져 가고…”라고 회상했다. 같은 학교 음대생이었던 부인 김정숙씨와의 인연도 이즈음 이어졌다. 군 복무 중 최우수 표창을 받기도 했다. 당시 특전사령관은 79년 12·12 때 신군부 세력에 총격을 받은 정병주 소장, 소속 여단장은 훗날 대통령이 된 전두환 준장 이었다. 반대하는 시위 도중 2차 시험을 치렀다. 하지만 시위로 구속되면서 2차 시험 합격증은 청량리경찰서 유치장에서 받았다. 3차 면접 시험을 앞두고는 안기부(현 국정원) 직원이 “데모할 때와 생각이 같은가”라고 물었고 고심 끝에 “내 행동이 잘못됐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답했다. 그러나 그는 사법시험에 최종 합격했다. 경희대 법대도 8년 만에 졸업했다. 문재인은 사법연수원(22기)을 차석 졸업했다. 수료식에서 법무부장관상도 받았다. 박원순(서울시장), 고승덕(전 국회의원), 조영래(변호사) 등이 연수원 동기였다. 하지만 그는 희망했던 판사가 되지 못하고 동기들이 판·검사로 임용되는 걸 지켜봐야만 했다. 시위 경력 때문이었다. ‘변호사’ 문재인은 김앤장 등 대형 로펌의 제의를 받았지만 82년 부산으로 낙향했다. 그곳에서 자신의 운명을 바꾼 사람을 만났다. 변호사 노무현이었다. 노무현과 합동법률사무소를 운영하며 인권변호사 생활을 시작했다. 김광일·이흥록·노무현 그리고 문재인이었다. 그는 ‘억울한 일을 당하고도 법을 잘 모르거나 돈이 없어 애태우는 근로자를 돕고자 한다. 상담료는 받지 않는다’고 적힌 명함을 들고 다녔다. 문재인은 3명 중 유일하게 정치 입문을 거절했다. 노무현이 정계에 입문해 ‘5공 청문회’ 스타가 된 뒤에도 그는 부산변호사협회 인권위원장을 지내면서 인권변호사로 일했다. 동의대학교 사건(89년) 등 굵직한 시국 사건도 변론했다. 90년 현대중공업 골리앗 크레인 농성 때는 82m의 크레인 꼭대기까지 올라갔다. 주변의 만류에 “거기에 노동자가 있고 나더러 도와 달라 하는데 가봐야 할 것 아니냐”고 했다. 시민사회수석, 비서실장 하면서 외교·안보·국방·국가경제·균형발전· 사회갈등 모두 다뤄봤습니다.”(7일 충주 연설) 거절했다. 하지만 ‘동지’ 노무현이 2002년 새천년민주당 대통령 후보가 되면서 조금씩 달라졌다. 노무현이 그해 지방선거를 앞두고 부산시장 출마를 권유했지만 ‘나는 참모용’이라면서 고사했다. 문재인은 “사법시험 합격과 노무현 대통령의 당선이 인생에서 가장 기뻤던 일”이라고 꼽는다. “민정수석으로 끝낸다” “정치하라고 하지 말라”는 두 가지 조건으로 청와대 입성에 동의했다. 급히 이동하느라 검은 비닐 봉투에 속옷·양말만 싸 들고 상경했다. 노무현 청와대의 초대 민정수석을 지냈지만 건강 악화와 총선 출마 압박이 겹치자 1년 만에 청와대를 나왔다. 변호인단 간사로 돌아왔다. 2005년에는 다시 청와대에 들어가 시민사회수석 ·민정수석·정무특보를 거쳤다. 2007년에는 노무현의 마지막 비서실장이 됐다. 그 사이 스트레스로 치아 10개를 뽑았다. 약점으로 지적되는 ‘새는 발음’은 그때 받은 임플란트의 영향이다. “운명 같은 것이 나를 지금의 자리로 이끌어온 것 같다. 노무현 변호사를 만나고 지금에 이르게 된 것도 마치 정해진 것처럼 느껴진다.”(자서전 『문재인의 운명』) 사저로 내려간 노무현과 자주 교류했다. 그러던 2009년 5월 23일, 새벽에 걸려온 전화벨이 문재인을 깨웠다. 그날 이후 그는 노무현 국장(國葬)의 상주가 됐다. 국장에 참석한 이명박(MB) 당시 대통령에게 백원우 전 의원이 “여기가 어디라고…. 사죄하시오”라고 외치다 끌려나가는 일이 발생했다. 그는 MB에게 다가가 “결례가 됐다”면서 고개를 숙이고 사과했다. 그리고 조용히 눈물을 닦았다. 노무현이 부산 선대본부 출범식에서 “노무현의 친구 문재인이 아니고 문재인의 친구 노무현입니다”라고 인사할 정도였다. 노무현이 떠난 뒤 문재인은 변호사로 일하면서 노무현재단 이사장직을 역임했다. 하지만 노무현 서거와 함께 정치권의 구애도 본격화됐다. 2009년 양산 국회의원 보궐선거 등에 차출해야 한다는 의견이 나왔지만, 그는 정치 입문을 여전히 꺼렸다. “제 인생의 마지막 도전입니다. 국민 모두의 대통령이 되기 위해 마지막까지 온 힘을 다하겠습니다.”(8일 기자회견) 해방됐지만 나는 당신이 남긴 숙제에서 꼼짝 못하게 됐습니다”라고 고백했다. 그러곤 2012년 4월 총선에서 부산 사상에 출마해 당선됐다. 6월엔 “보통 사람이 중심이 된 정의로운 나라를 만들겠다”면서 대선 출마를 공식 선언한다. 나섰다. 진보정의당 심상정 후보도 문재인 지지를 선언하며 후보직을 사퇴했다. 문재인 측은 국가정보원에서 ‘여론 조작’을 벌이고 있다고 12월 11일 공개했다. 하지만 19일 선거에서 1469만 표(48%)를 얻고도 새누리당 박근혜 후보에게 패했다. “‘노무현 대 박정희’의 프레임은 선거를 과거에 묶어버렸다. 노무현을 넘어서는 것이, 노무현을 이기는 것이 그의 마지막 부탁이라는 것을 안다. 꼭 그렇게 하겠다”고 다짐했다. 전당대회 연설에서 “제 앞에는 세 번의 죽을 고비가 있다. 당 대표가 안 돼도, 당을 제대로 살리지 못해도, 총선을 승리로 이끌지 못해도 제 역할은 없다”면서 박지원과의 대결에 나섰다.그리고 3.5%포인트 차이로 당 대표가 됐다. 물러난 그는 김종인 전 의원을 영입해 비상대책위원장을 맡겼다. 그리고 국민의당 지지도가 높았던 광주에선 “호남이 지지를 거두면 정계 은퇴, 대선에 불출마하겠다”고 배수진을 쳤다. 민주당은 지난해 4월 총선에서 원내 1당이 되며 고비를 넘겼다. 급박하게 돌아갔다. 문재인은 빨라진 ‘장미대선’ 무대에서 1위 후보로 부상했다. ‘든든한 대통령’을 대선 슬로건으로 내세운 그는 공식 선거운동 첫날부터 이렇게 외쳤다. “저 문재인, 대통령 준비를 끝냈습니다.” “개혁·통합의 도도한 흐름 만들어주십시오”
“오늘이 지나면 우리 모두는 새 대통령, 대한민국 새로운 세상을 만나게 됩니다. 긴 여정의 끝을 앞두고 두려운 마음으로 국민들께 마지막 호소를 드립니다. 압도적 지지로 새로운 세상을 열어주십시오.
저에게 당면한 나라의 위기를 극복할힘을 주십시오. 그 누구도 거스를 수 없는 개혁과 통합의 도도한 흐름을 만들어주십시오. 대한민국은 국가 비상 상황입니다.
안보와 외교, 경제 위기가 맞물려 있습니다. 하나 된 힘으로 이 위기, 극복해 나가야 합니다. 개혁만이 안팎의 위기를 극복하면서 국민의 삶을 지킬 수 있습니다.
개혁으로 낡은 시대와 결별해야 합니다. 개혁으로 부정부패, 반칙과 특권을 걷어낸 바로 그 자리에서 통합이 이뤄집니다. 그런 통합만이 나라의 갈등을 끝내고 국민의 힘을 하나로 모을 수 있습니다. 특별히 6월 항쟁 세대들께 호소합니다.
그때 우리는 하나였습니다. 온 거리를 땀으로 적시고 대통령 직선제를 따냈습니다. 그러나 끝내 민주주의를 완성하지 못했습니다. 이번이 그 기회입니다. 자식 세대에 민주주의 나라를 물려줄 절호의 기회입니다. 국민 모두의 대통령이 되기 위해 마지막까지 온 힘을 다하겠습니다. 그리고 국민의 선택을 받은 그날부터 바로 국민 모두의 대통령답게 일하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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