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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대 화상[布袋和尙]
땀을 흘리며 찾은 피안의 땅인가?간만의 여유로운 시간에 산사를 찾았다. 산사 하니까 무슨 80년대 영화에 나오는 실연한 여주인공의 고급스러운 말투라 영 어울리지 않는다. 그냥 절집이다. 일주문을지나 신라 원효대사가 창건하고, 이후 많은 고승대덕(高僧大德)들이 머물렀던 사찰 천태사 대웅전을 지나니~ 신라 원효대사가 창건하였다는 무량수궁 입구에 길옆의 거대한 배불뚝이 포대화상[布袋和尙]이 빙그레 웃는다. 포대화상[布袋和尙]? 포대[布袋]는 자루이고 화상[和尙]은 수행을 한 스님이다. 늘~커다란 자루를 둘러메고 다녀서 포대화상 이름으로 불린다고 한다. 뚱뚱한 몸집에 배는 풍선처럼 불룩하고 항상 웃는 얼굴이다. 정처 없이 돌아다니며 세속[世俗]의 사람들과 격의 없이 어울리며 하늘을 지붕으로 땅을 자리로 구름을 이불 삼아 자연과 더불어 살다가 자연[自然]으로 돌아간 걸림 없는 대 자유인 이었다. 배고픈 사람에게 먹을 것을 나눠주고 목마른 자에게 샘물을 퍼주며 특히 어린이들에게 포대속의 선물을 많이 준 동양[東洋]의 산타클로스 역할[役割]을 했던 분이란다. 이 스님은 중국 당나라 사람으로 법명[法名]은 계차이고 정웅대사라고 한다. 몸집이 뚱뚱하고 이마는 찡그리고 배는 늘어지고 말은 어눌하고 아무 데서나 눕어 자고 언제나 지팡이에 자루를 걸고 정처 없이 다닌다. 먹을 것은 무엇이나 주기만 하면 받아먹으면서 조금씩 나누어 그 자루에 넣곤 하여서 별호를 장정자[長汀子] 또는 포대화상이라고 불렀다. 사람들의 길흉화복[吉凶禍福]이나 날씨 등을 미리 말하는데 맞지 않는 일이 없었다고 한다. “나에게 포대가 하나 있으니 허공처럼 걸림이 없어라. 열어 펴면 우주에 두루 하고 오므리면 자제[自制]하도다.” 서기 916년 3월에 명주[明州]악림사 동쪽 행락 밑 반석에 단정히 앉아서 미륵진미륵[彌勒眞彌勒]--미륵이여 참 미륵이여 분신백천억[分身百千億]--천백억의 몸으로 나누어 시시시시인[時時示時人]--때때로 세상 사람들에게 보여주었으나 시인자불식[時人自不識]--세상 사람들은 스스로 알지 못하더라. 라는 게송을 남기고 열반하셨다고 한다. 이 스님과 비슷한 분이 우리나라에도 있었으니 이미 열반하신 법장스님이다. 어려운 사람이 찾아오면 주머니를 몽땅 털어 도와주었으며 입적 후에도 시신을 기증[寄贈]하여 다비식도 없는 영결식[永訣式]을 하였다고 한다. 이 법장스님은 아유일발랑[我有一鉢囊]- -나에게 바랑이 있으니 무구역무저[無口亦無底]- -입도 없고 밑도 없어 수수이불람[受受而不濫]- -담아도 담아도 넘치지않고 출출이불공[出出而不空]- -주어도 주어도 비지 않는다. 달불이도[達不二道]라! 높이 높이 올라도 떠나지 않는 진리[道]를 가져 나또한, 남은 삶을 저 바다처럼 담아도 담아도 넘치지 않고, 주어도 주어도 비지 않는 삶을 살고져… 높이 20m, 경사는 70도인 용연폭포에 이르니 정토는 커녕 숨 가쁜 속세가 따라와 갈증만 더해서 냉동실에 얼여놓은 시원한 탁베기와 아이스 커피를 꺼내 목구멍을 씻으니 감로수인가! 시원하다. 천태호 천태정을 돌아 천태산 자락 해발 401m 지점에 자리 잡고 있는 삼랑진 양수발전소의 상부댐 저수지는 심야의 잉여전력을 이용하여 하부저수지인 안태호의 물을 이곳으로 퍼올린 뒤, 전기 사용량이 커지는 낮시간에 다시 하부저수지로 흘려보내면서, 그 낙차를 이용하여 전력을 생산하는 데 사용된다는 천태호를 둘러보고 갈비탕에 반주로 쇄주 한 잔 걸치고 집에 돌아와 사워하니 기분이 상쾌하다. 2016년 6월 하지 날 아침 석암 조 헌 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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