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녕 조씨(昌寧 曺氏)
조씨(曺氏)의 본관은 문헌에 10여 본이 전해지고 있지만,
모두창녕조씨의 분파라는 것이 통설이어서 오늘날에는사실상 창녕 단본으로 통한다. 창녕조씨의 시조는 조계룡(曺繼龍)으로, 신라 제26대 진평왕의
사위로 알려져 있다.
그의 어머니는 한림학사 이광옥의 딸 예향(禮香)인데
창녕현 고암촌(鼓岩村) 태생이다. 그녀가 자라서 혼기에 이르렀을 때 우연히 복중에 병이 생겨 화왕산 용지에서 기도하니 병이 완쾌되었고 문득 태기가
있었다.
그리고 꿈에 한 남자가 “이 아이의 아버지는 용의 아들 옥결이다.
잘 기르면 자라서 경상이 될 것이며 자손만대 번영이 있을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626년(진평왕 48)에 아들을 낳으니 용모가 출중하고 겨드랑이에 붉은색으로 조(曺)가 쓰여 있었다.
이 사실이 왕에게 알려지자 왕은 조(曺)를 성으로, 이름은 계룡,
자는 인경(鱗卿)이라 하사하였다.
나중에 부마로 삼고 창성부원군에 봉하였다.
벼슬은
보국대장군상주국대도독총지휘제군사(輔國大將軍上柱國大都督總指揮諸軍事) 금자광록대부태자태사(金紫光祿大夫太子太師)에 이르렀다.
조계룡 이후 세계(世系)가 실전되어 신라 말에 아간시중을 지내고 고려 태조 왕건의 딸 덕공공주와 결혼하여 부마가 된 조겸(曺謙)을 중시조로 삼아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
창녕조씨는 고려시대 이래 삼남의 명족으로 고려시대에는 조겸의 손자
조연우(曺延祐)로부터 조자기(曺自奇)에 이르기까지 8대에 걸쳐 문하
평장사를 배출하였다.
조선시대에는 문과 급제자 113명, 상신 1명, 호당 1명, 공신 7명을 배출
했는데, 그 가운데에서도 남명 조식(曺植)[1501~1572)이 유명하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 감사공파(監司公派)
- 상호군공파(上護軍公派)
- 사의공파(司議公派)
- 낭장공파(郎將公派)
- 대사헌공파(大司憲公派)
- 대호군공파(大護軍公派)
- 문익공파(文翊公派)
- 문정공파(文貞公派)
- 문간공파(文簡公派)
- 밀직사공파(密直使公派)
- 병조참의공파(兵曹參議公派)
- 부사직공파(副司直公派)
- 사성공파(司成公派)
- 사정공파(司正公派)
- 사직공파(司直公派)
- 수찬공파(修撰公派)
- 시랑공파(侍郞公派)
- 시중공파(侍中公派)
- 양평공파(襄平公派)
- 장양공파(壯襄公派)
- 좌시중공파(左侍中公派)
- 중추공파(中樞公派)
- 지중추공파(知中樞公派)
- 진사공파(進士公派)
- 청구당공파(靑邱堂公派)
- 충간공파(忠簡公派)
- 충순위공파(忠順衛公派)
- 태복경공파(太僕卿公派)
- 부위공파(副尉公派)
- 태학사공파(太學士公派)
- 현감공파(縣監公派)
- 헌납공파(獻納公派)
- 시직공파(侍直公派)
- 승지공파(承旨公派)
- 지평공파(持平公派)
- 직장공파(直長公派)
- 희천공파(熙川公派)
- 참의공파(參議公派)
- 부제학공파(副提學公派)
- 부사공파(府使公派)
- 충정공파(忠貞公派)
- 충익공파(忠翼公派)
- 조익청(曺益淸) : 좌정승
- 조민수(曺敏修) : 창성부원군
- 조상치(曺尙治) : 부제학
- 조비형(曺備衡) : 공조판서
- 조효문(曺孝門) : 예조참판
- 조숙기(曺淑沂) : 지중추부사
- 조한보(曺漢輔) : 학자
- 조계상(曺繼商) : 이조참판
- 조석문(曺錫文) : 영의정
- 조치우(曺致虞) : 대구부사
- 조효연(曺孝淵) : 함안군수
- 조위(曺偉) : 호조참판
- 조신(曺伸) : 역관
- 조광원(曺光遠) : 우찬성
- 조식(曺植) : 성리학자, 종성부사
- 조광익(曺光益) : 형조좌랑, 의금부도사
- 조호익(曺好益) : 형조정랑, 정주목사
- 조성환(曺成煥) : 독립운동가
- 조만식(曺晩植) : 독립운동가, 정치가
- 조정환(曺正煥) : 외무부장관
- 조봉암(曺奉岩) : 농림부장관
- 조재천(曺在千) : 법무·내무부장관
집성촌[편집]
항렬자[편집]
22세 |
23세 |
24세 |
25세 |
26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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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세 |
31세 |
32세 |
33세 |
34세 |
35세 |
36세 |
37세 |
38세 |
39세 |
승(承) 흥(興) |
병(秉) 병(柄) 상(相) |
환(煥) 섭(燮) 열(烈) |
규(圭) 희(喜) 재(在) |
현(鉉) 호(鎬) 종(鐘) |
영(永) 한(漢) 수(洙) |
근(根) 식(植) 목(穆) |
용(容) 형(炯) 연(然) |
재(載) 곤(坤) 훈(塤) |
일(鎰) 건(鍵) 용(鏞) |
순(淳) 태(泰) 연(淵) |
동(東) 상(相) 영(榮) |
섭(燮) 열(烈) 행(杏) |
균(均) 중(重) 중(垣) |
용(鎔) 진(鎭) 석(錫) |
윤(潤) 준(準) 문(汶) |
직(稷) 백(栢) 표(杓) |
희(熙) 영(煐) 형(螢) |
- 1985년 72,213가구 299,669명
- 2000년 105,282가구 338,222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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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연혁
본관소재지 : 경상남도 창녕 창녕(昌寧)은 경상남도 북부에 위치한 지명으로 옛 창녕현(昌寧縣)과 영산현(靈山縣)이 합하여 이루어진 곳이다.
본래 삼한시대에
불사국(不斯國), 이후의 빛벌가야(非火伽倻) 지역이었다.
신라에 의해 555년(신라 진흥왕 16) 하주(下州)가 설치되었고,
565년(진흥황 26) 비자화군(比自火郡) 또는 비사벌군(比斯伐郡)으로 개칭
되었고, 757년(경덕왕 16)에 화왕군으로 바뀌었다.
940년(고려 태조 23)에 창녕군으로 고치고, 1018년(현종 9)
밀성군(密城郡: 密陽)의 속현이 되었다. 1172년(명종 2)에 창녕군에
속하기도 하였다. 1274년(원종 15)에 영산현에 감무가 파견되면서
독립하였다.
1414년(태종 14)에 창녕현으로 되었고, 1631년(인조 9)
창녕현이 영산현에 합쳐졌다가 얼마 후에 복귀되었다.
1895년(고종 32) 지방제도 개정으로 대구부 창녕군·
영산군이 되었으며, 1896년에 경상남도 창녕군·영산군이 되었다.
1914년 군면 폐합으로 영산군의 일부를 병합하였다.
1960년 창녕면이 읍으로 승격되었다.
- ↑ “[김성회의 뿌리를 찾아서] <47> 조(曺)씨, 창녕조씨(昌寧曺氏)”.
- 세계일보. 2013년 4월 1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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