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산(白頭山)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량강도 삼지연군과 중화인민공화국
지린 성 연변 조선족자치주에 걸쳐있는 화산이다. 중국에서는 창바이 산
(중국어 간체: 长白山, 정체: 長白山, 병음:Chángbái shān, 장백산), 만주어로는
)이라고 부른다. 골민 샹기얀 알린(만주어:ᡤᠣᠯᠮᡳ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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높이는 2,750m로,[1] 한반도에서 가장 높은 산이다. 산머리가 1년 중 8개월이
눈으로 덮여 있는데다가 흰색의 부석(浮石)들이 얹혀져 있어서 '흰머리산'
이라는 뜻으로 '백두산'이라 부르게 되었다.
백두산의 최고봉은 장군봉(將軍峰)이다.[2] 2,500m 이상 봉우리는 16개로
향도봉, 쌍무지개봉, 청석봉, 백운봉, 차일봉 등이 있으며, 그 밖에 대각봉,
녹명봉, 천문봉, 망천후 등 2,500m 미만인 봉우리도 여럿 있다.
정상에는 칼데라 호인 천지(天池)가 있다.
백두산부터 지리산(智異山)까지 이르는 백두대간(白頭大幹)은 한반도의 기본
산줄기로서 모든 산들이 여기서 뻗어 내렸다 하여 예로부터 한민족과 만주족에게
성스러운 산으로 숭배되었고,
환웅이 신시(神市)를 열고 단군이 태어난 성지라 여겨 신성시되었다.
또한, 백두산은 남만주 북동에서 서남서 방향으로 뻗은 장백 산맥(창바이 산맥)의
주봉이기도 하다.
백두산 명칭의 기원[편집]
백두산은 과거 백산, 태백산, 불함산, 개마대산 등으로도 불렸는데,
1280년대에 쓰여진《삼국유사 제왕운기》에서는 고조선의 건국 신화, 부여,
고구려를 설명하면서 태백산으로 언급하고 있다.
백두산(白頭山)이라는 명칭은 조선 건국 초에 편찬된 《고려사》의 고려 성종
10년(991년) 조[3]에 처음으로 문헌에 나타난다.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주로 백두산이라고 칭하였는데,
장백산(長白山), 백산(白山)이라는 명칭도 간간히 나타난다.
1962년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중화인민공화국 사이에 체결된
조중변계조약과 그 의정서에서도 이 산을 백두산(중국어 간체: 白头山)이라고
칭하였다.
중국측 장백산 명칭의 기원[편집]
백두산에 관련된 신화는 한민족(조선민족)뿐만 아니라 만주족에게도 나타난다.
만주족의 기원신화의 중심지 또한 백두산이며, 청나라 시절 백두산은 만주족의
영산으로써 특별 취급을 받았다.
중국에서는 산해경의 기록에선 불함산(不咸山)으로, 이후 위진남북조
시대(221∼589)에는 태백산(太白山), 도태산(徒太山) 등 여러 이명으로
불리었다.
현대에는 '창바이산(長白山)'
이라고 통일되었는데, 이는 만주어로 '긴 흰 산', '큰 흰 산'이라는 뜻의
'골민 샹기얀 알린(golmin šangiyan alin)'을 의역한 것으로, 역사적으론 요,
금나라 시기부터 쓴 것으로 추정된다.
문헌 기록[편집]
단군신화에서 환인의 아들 환웅이 내려와 신시(神市)를 건설한 태백산은 대개
백두산으로 간주되어 왔다. 현존하는 태백산(太伯山)에 관한 가장 오래 된
기록은 삼국유사이다. 제왕운기 세종실록지리지 · 동국여지승람 · 동국사략
· 동사강목은 '태백산(太白山)', '백두산(白頭山)'"백산(白山)' 등으로 표기하고
있다. 고구려에서는 이 산을 태백산(太白山) 또는 백산(白山)
이라고 불렀으며 이 산 주변에 백산부(白山部)라는 고구려에 속한 말갈 세력이
존재했다.
고려 중기의 일연은 《삼국유사》에서 단군신화를 설명할 때는 환웅이 자리잡은
태백산에 '묘향산(평안도 지방)을 이른다'는 주석을 달았으나 고구려 건국신화
부분에서 동부여 왕 금와가 태백산 남쪽 우발수에서 유화를 만난 부분에서는
태백산에 특별한 주석을 달지 않았는데, 지리적인 상황으로 보아 한국
사학계에서는 고조선의 태백산을 일연의 주장항 묘향산으로 보지 않고
백두산으로 본다.
반면 이승휴의 《제왕운기》에서는 처음부터
태백산이라고만 적고 별도의 주석을 달지 않았으며, 부여, 옥저,
신라(원문: 시라(尸羅)),
고례(高禮), 예맥이 모두 단군의 자손이라고 보았다.
여기서 단군신화의 태백산을 일연이 묘향산이라고 주석을 단 데에는 백두산으로
바로잡아야 한다는 설(서대석 교수 주장), 묘향산이 불교의 성지라서 그 영향을
받았다는 설, 백두산에 대한 인식이 희박해지면서 백두산 신앙의 요소가
묘향산으로 이동한 것을 반영했다는 설(최남선 주장), 고조선의 수도가 요동
지방의 아사달에서 한반도 북부의 왕검성(지금의 평안도 일대)으로 이동하면서
평양 지역에 토착화되면서 변했다는 설 등이 있다.
백두산은 상단부가 직경 5km, 깊이 850m의 거대한 칼데라에 의해 함몰된
성층화산이다. 이곳 칼데라는 969년(±20년) 화산분출로 인해 형성되었으며,
물이 차서 천지(天池)를 이루고 있다.
[4] 이 화산분출로 인한 화산재는 멀리 일본의 홋카이도에서도 발견된다.
천지는 둘레가 14km이고, 평균 깊이 213m, 최대 수심은 384m에 이르며,
10월 중순부터 5월 중순까지는 보통 눈과 얼음으로 덮여 있다.
산의 정상은 매년 2cm씩 솟아오르는데, 이는 산의 중앙부 천지를 둘러싼
칼데라 환의 2500m 아래 마그마의 활동에 의한 것이다.
최고봉인 장군봉은 1년 중 8개월이 눈으로 덮여 있고,
경사는 1,800m에 이르기까지는 비교적 완만한 편이다.
이 부분의 본문은 천지입니다.
천지(天池)는 백두산 정상에 위치한 화산호로, 쑹화 강(松花江)의 발원지이다.
그 수면은 해발 2,257m,면적은 9.165㎢,둘레 14.4km,평균 깊이 213.43m,
최대 수심은 384m이며, 수량(水量)은 19억5,500만m³로서 한반도뿐만 아니라
중화인민공화국에서도 가장 깊은 호수이다.
세 강의 발원지[편집]
천지의 물은 "승사하"(昇嗣河. 승차하(乘搓河)라고도 한다)를 통해 흐르다가
68m의 장대한 비룡폭포 (장백폭포)에서 수직으로 떨어져 쑹화 강의 발원이 된다.
백두산은 쑹화 강 외에도 백두산 산정(山頂) 남쪽에서 압록강이, 무두봉(無頭峰,
높이 1,930m)의 북쪽 기슭에서 두만강이 발원하는 압록강과 두만강의
발원지이기도 하다.
백두산 16봉[편집]
단위는 해발 고도(m)이다.[5]
- 백운봉(白云峰) 2691
- 관일봉(觀日峰) 2670
- 천문봉(天文峰: 응취봉,鷹嘴峰) 2670
- 옥주봉(玉柱峰: 청석봉,青石峰) 2664
- 화개봉(華蓋峰: 황암봉,黄岩峰) 2640
- 천활봉(天豁峰) 2620
- 자하봉(紫霞峰) 2618
- 고준봉(孤隼峰) 2611
- 녹명봉(鹿鳴峰: 지반봉,芝盤峰) 2603
- 용문봉(龍門峰) 2595
- 금병봉(錦屏峰) 2590
- 직녀봉(織女峰) 2558
- 제운봉(梯云峰) 2543
- 철벽봉(鐵壁峰) 2560
- 와호봉(卧虎峰) 2566
- 관면봉(冠冕峰: 옥설봉,玉雪峰) 2525
냉대 기후의 백두산 지역은 산지 기후의 특징을 지녀 월평균기온이 연간 34 ℃
사이의 편차로 크게 변한다. 강수량은 연 1,400mm에 이르는데,
눈이 많이 내린다. 겨울은 춥고 매우 길며,여름은 온난 습윤하다.
백두산의 기후는 매우 변덕스럽다. 산 정상의 연평균 기온은 - 8.3 ℃이다.
여름은 18 ℃ 정도이지만, 엄동기는 -47.5 ℃까지 내려갈 때가 있다.
1월의 평균기온은 -24 ℃, 7월의 평균기온은 10 ℃이며,
9월 하순부터 이듬해 6월 초순까지 연중 8개월은 영하까지 내려가서 입산이
통제된다.
산 정상의 평균풍속은 초속 11.7 m, 12월에는 평균 초속 17.6 m의 강풍이 분다.
평균 습도는 74%, 연강수량은 1,400 mm 정도로 강수량이 비교적 많은 편인데,
해양과의 거리가 가깝고 삼림지역이어서 수증기가 많고 지세가 높기 때문에
눈이 많이 내린다.
동식물[편집]
백두산에는 검은담비, 수달, 사향노루, 사슴, 백두산사슴, 산양은 물론 호랑이,
큰곰, 표범 등의 희귀동물이 서식하거나 서식하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또, 204종의 조류가 서식하는데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삼지연메닭(348호)
·신무성세가락 딱따구리(353호) 등이 있으며, 특별보호대상 조류로 멧닭,
세가락메추라기, 북올빼미, 긴꼬리올빼미, 흰두루미, 재두루미, 원앙,
청둥오리, 붉은허리제비, 숲새 등이 있다.
북살모사와 긴꼬리도마뱀 등의 파충류와 무당개구리·합수도룡뇽 등의 양서류가
있으며, 천지에는 천지산천어가 서식하고 있다.
식물 분포[편집]
백두산은 식물이 복잡 다양하게 분포한다. 과거 제3기(第三纪)의 식물에서부터
한국은 물론 시베리아, 일본, 유럽의 식물종도 있으며, 심지어 중국 남방의
아열대 식물종까지 발견된다.
해발 고도가 높고 지리적 위치가 독특하여 하곡(河谷)에서부터 주봉에 이르기까지
유라시아 대륙의 온대, 냉대, 한대에 이르는 거의 모든 주요 식물이 집합해 있으며,
지리학적으로 고산 수직 자연대(高山垂直自然帶)의 분포에 속한다.
2,700여 종의 식물이 분포하는데 분비나무, 가문비나무, 종비나무, 잎갈나무,
좀잎갈나무, 백두산자작나무가 많은 비중을 차지하며, 빙하기 이후 고산 조건에
적응한 담자리꽃나무, 시로미, 물싸리, 두메김의털, 장군풀, 산할미꽃, 두메아편꽃,
큰산싱아, 각씨투구꽃, 끈끈이주걱, 두루미꽃, 눈사버들, 구름국화, 바위구절초,
만병초 등 한대성 식물들이 자란다.
또 매저지나무·들쭉나무· 백산차 등의 냉대성 관목들이 군락을 이루고 있으며,
금방망이·삼잎방망이·자주꽃방망이· 무수해·황기·부채붓꽃·손바닥란·동의나물·
분홍노루발풀·왕바꽃· 메바꽃·구름범의귀풀·물매화 등 냉대성 초본식물들이 있다.
정일봉을 비롯한 일부 지역에서는 백두산의 다른 지역에서 볼 수 없는 흰병꽃나무·
구름꽃다지· 백리향·만삼·왜당귀 등 화산 분출에 의해 피해를 입기 전의
식물종들이 자란다.
지질 환경 변천사[편집]
백두산은 화산활동이 활발했던 지역으로, 약 200 ~ 300만년 전 제4기 분출로
백두산의 천지가 형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최근 300여 년 동안 3차례의 분출이
있었으며,이로 인해 화산암-현무암 대지, 경사진 현무암 고원 등이 형성되었다.
목탄(木炭) 등이 자주 발견되는데, 이는 화산 분출 전후의 백두산이 빽빽한
삼림이었음을 증명한다. 여러 광물질이 함유된 화산재는 비옥한 토양을 형성하여
동식물 번식에 좋은 환경을 제공한다.
한국에 현존하는 사서(史書)의 기록은 남아 있지 않으나, 최근의 지질학적 연구에
의하면
9세기와 10세기에 백두산의 분화가 있었고, 이 가운데 9세기의 분화는 발해의
멸망에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백두산은 고려가 후삼국을
통일한 후인 10세기 중반에 폭발하여 그 화산재가 멀리 일본의 혼슈와
홋카이도까지 날아갔다.
당시 백두산의 화산 활동으로 분출한 화산재의 양은 100 ~ 150㎦로 추정되는데,
이는 2010년 유럽의 항공대란을 일으킨 아이슬란드 화산 폭발 분출량(0.11㎦)의
1천배나 되는 엄청난 양이다.[6][7][8]
사서(史書)의 기록 등에 따르면 1413년, 1420년, 1597년, 1668년, 1702년
등에 백두산이 화산재나 화산가스를 내뿜었거나 이를 추정할 수 있게 하는
기록들이 있으며, 조선왕조실록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
"세종 2년(1420년) 5월, 천지의 물이 끓더니 붉게 변했다. 소떼가 크게 울부짖었고 이러한 현상은 열흘 이상 지속됐다. … 검은 공기는 인근지역으로 가득 퍼졌다."
"현종 9년(1668년) 4월, 한양과 함경도 등 일대에 동시에 검은 먼지가 하늘에서 쏟아져 내렸다."
"숙종 28년(1702년) 6월, 한낮에 함경도 지역 일대가 갑자기 어두워지며 비린내가 나는 황적색 불꽃이 날아왔다. … 같은날 인근 지역 현성에서는 연기가 가득한 안개가 갑자기 북서쪽 지역에서 몰려들어 … 사방에 생선 썩는 냄새가 나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눈송이 같이 날라 다니던 재는 1촌(약 3cm) 두께로 쌓였고, 재는 마치 나뭇조각 같았다."
이후 백두산은 1903년 마지막으로 분화한 후 100여년 넘게 화산활동을
멈추었다.[9]
백두산 부근의 국경과 영토 분쟁[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조중 변계 조약, 백두산정계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