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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야기(463)

여불위의 상술

by 석암 조헌섭. 2022. 6. 1.



◆여불위의 상술◆

이(利)를 쫓아 가는데는 중국 전국 시대의 여불위(呂不韋)를 따를
사람이 없을것이다.
여불위는 장사꾼 이었는데 상술이 뛰어났다.
진,초,연,제한,위,조,의 열국(列國)을 다니면서 장사를 잘하여
수 만금(數 萬金)을 지닌거부(巨富)가 되었다.
 
여불위가 초(超)나라 서울 한단에서 인질로 와있는 진(秦)나라
왕손인 자초(子楚)를 만나게 되었다.
그때 여불위는 자초(子楚)에게 투자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 했다. 

자초를 임금으로 만든다면 자신은 킹 메이커로서 임금위에
군림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면 천하를 내 손아기에 넣는 것이다.
얼마나 큰 이(利)를 보는 장사인가.
 
여불위는  자초를 임금으로 만드는 일에 나서 자초의 아버지
안국군(安國君)은 6년후 효문왕(孝文王)이 되었다.
 여불위는 자식이 없는 효문왕의 정실인 화양부인을 지모(智謨)와
황금으로 움직여 20여명의 아들 가운데 자초가 태자(太子)에
오르도록 하였다.
 
자초가 태자에 오른지 3일만에 효문왕이 죽고 드디어 자초가
 장양왕(莊襄王)이 되었다.
여불위는  장사꾼이 문신후(文信候)에 봉해지고 얼마지나
 승상(承相) 정승이 되어다시 국상(國相)이 되었다.

임금으로 부터는 아버지와 같다하여 중부(仲父)라 불렀다.
여불위의 장사는 대 성공 이었다.그때부터 천하의 학자를 불러
모아 여씨춘추(呂氏春秋)를  짓게 하였다.
 
그런데 장양왕이 등극한지 3년만에 죽고 아들 정(政)이 13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이 정(政)이 훗날 중국을 통알한 진시황이며 사실은 여불위의
 아들이다.

 장양왕의 자초가 조(趙)나라에 인질로 있을때 여불위의 애첩을
사랑하게 되어 여불위가 장양왕인 자초에게 애첩을 주었던
것이었다.
그때 이미 애첩은 여불위의 아이를 임신해 자초의아내가된 것이다.
 
그런데 이 여인은 하루밤도 남자 없이는 못견디는 음녀(淫女)였다.
 장양왕이 죽어 과부가 되자 옛 남편이던 여불위를 불러 들였다.
 태후의 신분도 아랑곳 없었다.

여불위는 불안하여 음경(陰莖)이 큰 노애라는자를 거짓 환관으로
만들어 태후에게 들여 보냈다.
이 사실이 시황제 9년에 들통이 났다.
 
노애는 참수(斬首)되고 여불위도 겨우 참형은 면하였으나
국상에서 파면되고 촉으로 유배되자 음독 자살(自殺)했다.
 결국 아들에 의해 죽음을 당한 것이다.
 
이렇게되면 여불위의 손익계산(損益計算)은 어떻게되는 것인가?
한마디로 조유로 무위(無爲)로 끝난 것이다.
사람이 아무리 약다 하여도 약은 고양이 밤눈 어두운 법이다.
 
호사유피 인사유명(虎死留皮 人死留名)이라했거늘 여불위는
더러운 이름을 남겼다.

석암 조 헌 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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