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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이야기(124)

한원당 김 굉필 (寒暄堂 金宏弼 1454∼1504)

by 석암 조헌섭. 2022. 11. 20.



한원당 김 굉필 (寒暄堂 金宏弼 1454∼1504)

만추의 계절 가을 단풍의 끝자락 11월셋째 휴일 날  
 제가 좋아해 까끔 찾아가는 한원당 김굉필 (寒暄堂 金宏弼)을
 모신 도동서원(道東書院) 과  사효굴을  다녀와 오랜만에 역사서(歷史書)를 써 본다.

대구 달성군 구지면 도동에 가면 낙동강변에 도동서원(道東書院)이 있다.
선생은 동방 오현 중의 한 분으로 조선조 유학사에 큰 획을 그은 분이다.
        도동서원 앞 낙동강변 만추 풍경

        400여 년된 도동서원 앞 은행나무
         
김굉필(金宏弼) 은 조선 전기의 문신(文臣)이자 학자이다.
본관은 서흥(瑞興). 자는 대유(大猷), 호는 사옹(簑翁)·한훤당(寒暄堂)이다.  
그는 할아버지 이래 살아오던 한성부 정릉동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는 호방하고 거리낌이 없어, 저잣거리를 돌아다니면서 사람들을 매로 치는

 일이 많아 그를 보면 모두 피했다고 한다. 그러나 성장하면서 분발해 점차 학문에
 힘쓰게 되었다.

 김굉필은 주로 영남 지방의 현풍 및 합천의 야로(처가),
성주의 가천(처외가) 등지를 내왕하면서 사류(士類)들과 사귀고 학문을 닦았다.
이때 김종직(金宗直)의 문하에 들어가 ’소학(小學)‘을 배웠다.
이를 계기로 소학에 심취해 스스로를  ‘소학동자’라 일컬었고, 여기서 받은 감명을…

“글을 읽어도 아직 천기를 알지 못했더니,
 소학 속에서 지난날의 잘못을 깨달았네.
이제부터는 마음을 다해 자식 구실을 하려 하노니, 어찌 구구히 가볍고
따스한 가죽옷과 살찐 말을 부러워하리오.”라고 술회했다고 한다.


이후 평생토록 소학을 독신(篤信)하고 모든 처신을 그것에 따라 행해
소학의 화신이라는
평을 들었으며, 나이 삼십에 이르러서야 다른 책을 접했고
육경(六經)을 섭렵하였다.

1480년(성종 11) 에 생원시에 합격해 성균관에 입학하였다.
 이때 장문의 상소를 올려 원각사(圓覺寺) 승려의 불법을 다스릴 것을 포함한
척불과
유학의 진흥에 관한 견해를 피력하기도 하였다.

1494년 경상도 관찰사 이극균(李克均)이 이학(理學)에 밝고 지조가 굳다는 명목의
 유일지사(遺逸之士)로 천거해 남부 참봉에 제수되면서 관직 생활을 시작하였다.
이어서 ·전생서 참봉· 북부 주부 등을 거쳐, 1496년 군자감주부에 제수되었으며,
곧 사헌부감찰을 거쳐 이듬해 형조좌랑이 되었다.

1498년 무오사화가 일어나자, 김종직의 문도로서 붕당을 만들었다는 죄목으로
장(杖) 80대와 원방부처(遠方付處)의 형을 받고 평안도 희천에 유배되었다가
2년 뒤
순천에 이배(移配)되었다.

그는 유배지에서도 학문 연구와 후진 교육에 힘써, 희천에서는 조광조(趙光祖)에게
 학문을 전수해 우리나라 유학사의 정맥을 잇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1504년 갑자사화()가 일어나자 무오 당인이라는 죄목으로 극형에 처해졌다.

중종반정 뒤 연산군 때에 피화한 인물들의 신원이 이루어지면서 도승지에
추증되었고,
자손은 관직에 등용되는 혜택을 받게 되었다.

그 뒤 사림파의 개혁 정치가 추진되면서 성리학의 기반 구축과 인재 양성에 끼친
업적이
 재평가 되어 그의 존재는 크게 부각되었다.
이는 조광조를 비롯한 제자들의
정치적 성장에 힘입은 바 컸다.

그 결과 1517년(중종 12) 정광필(鄭光弼)·신용개(申用漑)·김전(金詮) 등에 의해
학문적
 업적과 무고하게 피화되었음이 역설되어 다시 우의정에 추증되었고,

도학(道學)을 강론하던 곳에 사우를 세워 제사를 지내게 되었다.

그러나 1519년 기묘사화가 일어나 그의 문인들이 피화되면서 남곤(南袞)을 비롯한
 반대 세력에 의해 그에게 내려진 증직 및 각종 은전에 대한 수정론이 대두되었다.
 당시의 이같은 정치적 분위기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그 뒤 그를 받드는 성균관 유생들의
문묘종사(文廟從祀) 건의가 계속되었다.


그리하여 1575년 영의정 추증, 1577년(선조 10) 시호가 내렸졌으며,
1610년(광해군 2) 대간과 성균관 및 각 도 유생들의 지속적인 상소에 의해
정여창(鄭汝昌)·조광조·이언적(李彦迪)·이황(李滉) 등과 함께 오현(五賢)으로
 문묘에 종사되었다.

학문적으로는 정몽주(鄭夢周)·길재(吉再)·김숙자(金叔滋)·김종직으로 이어지는
우리나라
 유학사의 정통을 계승하였다. 그러나 김종직을 사사(師事)한
기간이 짧아 스승의
후광보다는 자신의 학문적 성과와 교육적 공적이
더 크게 평가되는 경향이 있다.


사우(師友)들 가운데에는 사장(詞章)에 치중한 인물이 많았으나,
 정여창과 함께 경학(經學)에 치중하였다. 이러한 학문적 성향으로 인해
‘치인(治人)’보다는
 ‘수기(修己)’에의 편향성을 지니게 되었다.

 또한 현실에 대응하는 의식에서도 그러한 성격이 잘 나타나,
 현실상황에 적극적, 능동적으로 대응하려는 자세는 엿보이지 않았다.

이로 인해 20여 인에 달하는 문인들은 두 차례 사화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크게 타격을
 받지는 않았다.

나아가 유배지 교육 활동을 통해 더욱 보강되어 후일 개혁 정치를 주도한
기호계(畿湖系)
 사림파(士林派)의 주축을 형성하게 되었다.


소학에 입각한 그의 처신(處身)은 당시 사대부들의 귀감이 되었으며, 
‘한훤당의 가범(家範)’으로 숭상되었다.
후학으로는 조광조(趙光祖),,이장곤(李長坤),,김정국(金正國), 이장길(李長吉),
이적(李勣), 최충성(崔忠誠), 박한공(朴漢恭), 윤신(尹信) 등이 있다.


김굉필(金宏弼)의 위패는 아산의 인산서원(仁山書院), 서흥의 화곡서원(花谷書院),
 희천의 상현서원(象賢書院), 순천의 옥천서원(玉川書院),
현풍의 도동서원(道東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경현록·한훤당집·가범(家範) 등이 있다.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이 비석은 사우당 김대진이 후손과 사림 및 경남감사 이민구의 협력으로 세운 비석이다.

 그 글은 여헌 정현광이 지었고, 사헌부 감찰인 배홍우가 썼다. 
이 비는 현재 도동서원(道東書院) 좌측편에 있다.
『여헌선생문집』 제12권 비명(碑銘) 묘갈(墓碣) 묘지(墓誌)에 들어 있다.

수월루
 담장은 장식 효과를 최대로 활용한 아름다운 곳으로 전국에서 최초로 보물로 지정된
 것이라한다.  뒤편 사당은 일반적인 사당으로 제향 공간인 관계로 내부를 공개하지 않는다.
 

도동서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록일 2019년 7월 6일 등재되었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우리나라 서원은 모두 9곳

조선의 첫 서원인 영주= 소수서원

안동 = 도산서원과 병산서원
경주 = 옥산서원
함양 = 남계서원
정읍 = 무성서원
장성 = 필암서원
논산 = 돈암서원 
달성 = 도동서원
.,
김굉필 묘소=대구 달성군 구지면 도동리 산 1~1

한빙계(寒氷戒) 18條

1. 동정유상(動靜有常) -- 움직임과 움직이지 아니함에도 떳떳한 법칙이 있다.
2. 정심솔성(正心率性) -- 마음을 바르게 하고 타고난 본성을 따르라.
3. 정관위좌(正冠危坐) --갓을 바로 쓰고 무릎 꿇고 앉아, 자세를 바르게 하라.
4. 심척선불(深斥仙佛)  --선과 불을 깊이 배척하라.
5. 통절구습(痛絶舊習)  --옛 버릇을 철저히 끊어버려라.
6. 질욕징분(窒慾懲忿)  --욕심을 막고 분한 마음을 참으라.
7. 지명돈인(知命敦人)  --하늘의 뜻을 알고 어짐에 힘쓰도록 하라.
8. 안빈수분(安貧守分)  --가난함 속에서도 편안한 마음으로 분수를 지키도록 하라.
9. 거사종검(去奢從儉)  --사치를 버리고 검소하게 지내라.
10. 일신공부(日新工夫) --날마다 새로워지는 공부를 하라.
11. 독서궁리(讀書窮理)  --책을 많이 읽고 깊이 생각하도록 하라.
12. 불망언(不妄言) -- 말을 함부로 하지 마라.
13. 주일불이(主一不二) -- 마음을 한결같이 하여 두 갈래로 하지 말라.
14. 극념근근(克念克勤)  --잘 생각하고 부지런히 하라.
15. 지언(知言)  --말을 알라.
16. 지기(知幾)  --일의 징조를 알라.
17. 신종여시(愼終如始) -- 마지막을 시작할 때처럼 조심하라.
18. 지경존성(持敬存誠) -- 공경하는 마음을 지니고 성실함을 지켜라.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은 점필재 김종직(金宗直)의 제자로 김일손김전,
 남곤정여창 등과 동문이었다. 
정통적인 성리학(性理學)을 전수받은 대유(大儒). 조광조(趙光祖)에게 학문을 전한
 대학자이다.
그는 스스로 소학동자(小學童子)라 짓고 끊임없이 실천학문을 알렸던 선지식인으로
 “얼음처럼 찬 이성으로 지켜야 할 계율”을 몸소 지어 놓고 이를 철저히 지켜나가
 자기관리에 대한 의지가 강하였다.

어느 날 문신이었던 반우형(潘佑亨)이 집으로 찾아왔다.
선생은 평소 지켜온 18조목의 “한빙계(寒氷戒)”를 글로 써 주었다. 
“한빙”이란 “얇은 얼음을 밟듯이 경계하고 또 경계하는 삶”을 의미한다.

이 한빙계는 조광조(趙光祖)를 비롯한 이황(李滉), 이이(李珥) 등 후대 선비들이
지켜야할 계심(戒心)이 되었다고 한다.

사효굴(四孝窟)


▶ 달성군 유가면 양리 360번지에 있는 사효굴의 유래는 임진왜란 때 아버지를 위해
목숨을 바친 네 아들의 효행()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망우당 곽재우()의
사촌형인 곽재훈의 아들 결, 청, 형,호의 네 아들은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자 이들은 병환 중인 부친을 모시고 비슬산 중턱에 있는
동굴에 숨어 피난
생활을 하였다. 


천식이 심해 기침 소리가 끊이지 않자 어느 날 굴 밖을 지나던 왜병들이 기침 소리에 
굴 안에 사람을 밖으로 나오라고 하여 이에 효성이 지극한 큰아들이 부친을 대신해 
나갔다가 죽임을 당했고, 같은 방법으로 나머지 세 아들이 차례로 살해당했던 곳!

결국, 마지막에는 곽씨가 굴 밖으로 나가게 되었는데, 이에 그간의 정황을 알게 된
 왜장은 네 형제의 효성에 감동하여 곽씨의 등에 '네 효자의 아버지(四孝子之父)'라는
글을 써 붙여 
석방하여 마을 사람들은 이 곳을'사효굴(四孝窟)'이라 이름하여

 네 형제의 효성을 추모(追慕)하였다.

나라에서도 이 사실을 알고 정려(旌閭)를 내려 아버지를 대신해 같은 날 함께 죽은
 네 아들의 효심, 네 아들의 죽음 앞에서 무력함과 슬픔으로 몸을 가누지 못했을
 병든 아버지의 고통, 420여 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암벽에 매달려
사효굴(四孝窟) 글자를 새긴 사람의 착한 마음을 헤아려 보는 것이
인성교육(人性敎育)이 아닐는지…

2022년 11월 일
昔暗 조 헌 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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