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정치 인물(72)

이회창 집중탐구

by 석암 조헌섭. 2011. 10. 8.

08

 

이회창 집중 탐구

 

 한나라당 대통령후보 이회창은 1935년 황해도 서흥에서 아버지 이홍규(李弘圭)어머니

김사순(金四純)의4남1녀중 둘째로 태어나 전라도 담양 창평 초등 학교에 입학 한다.

 

회창의 외조부는 창평 면장을 지낸 김재희(金在晞)는 만석군 소리를 들었다.

해방뒤 아들, 즉 회창의 외삼촌  김홍용(金洪鏞. 2대 민의원)  문용(汶鏞.2대 민의원)

성용(星鏞.6,7,9 대 전국구 의원) 3형제가 국회의원을 한것은 우리나라 에서는 이들 뿐이다.

6,25 발발직후 7월  큰 외삼촌 김홍용은

“ 백두산 상공에 태극기가 휘날릴 것 ” 이라고 연설 했다가 8월15일 공비에게 총살 당했다.

 

회창의 큰 이모 김삼순(金三純)은 균(菌) 학자로  한국 균학회가 

그의 아호를 딴 성지(聲至)학술상을 제정 해마다 시상하는 권위자이다.

 

회창은 초등 4학년 때  순천 남초등학교로  전학을 한다.

어머니 김사순은 직접 닭을 길러 달걀을 내다 팔았다.

회창의일기장엔 오늘은 닭갈을 하나 낳았다. 두개낳았다 고 적혀있었다.

 

회창은 5학년 말 형 희정의 권유로  월반 시험을 봐  광주 서 중학교에 합격 했다 .

그러나 부친이 한민당 전남지부장을  구속했다가  검찰 고위층의 질책을 받고 청주지청으로 

쫓겨가 입학식도 못하고 청주중학교로 전학간다.

48년 회창은 중 2때 경기중학교 로 전학한다.아버지의 발령에 따라 전학을 했던것이다.

쟁쟁한 수재들이 모인 학교에선 적응이 쉽지 않았던 모양이다. 

첫해 420명중 305등을 했다.

 

 

1950년 3월26일엔 회창의 아버지 이홍규는 남로당원 혐의자를 풀어줬다는 이유로

구속돼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된다.

회창의 아버지는

해방후 검사 구속 1호다. 충북지사를 구속했기 때문에 괘씸죄에 걸렸다고 한다.

 조사를 받는 동안 구타 .물고문. 전기고문. 잠안재우기 고문등 혹독한 고문을 받았다고 한다.

이홍규는 직권남용으로 기소 되었다가 몇달후 보석으로  풀려나 다시복직하고 형 희정은

캐나다 부대의 통역원으로 취직한다.

화창은 다시 학생으로 돌아가 달라진 모습을 보인다.

매사에 적극적이며 변론반장을 맡았고 3학년때 학도 호국단 중대장도 했다.

고3때는 싸움하다 코뼈가 부러지는 상처도입는다.

 

53년 회창은 서울대 법대에 들어간다. 입학동기 운영위원 네명 가운데 한명으로 뽑혀 신망도

있었고 자연스럽게 법대 선배들과 함께 당시 야당 지도자인 해공 신익희(申翼熙.민국당)을

 불러 강연을 듣는 거사를 벌인다.

 

 

야당 당수가 서울대에서 강연회를 갖는게 처음이라 파문이 컸다.

다들 동대문 경찰서에 불려가 조사를 받았다고 말했다. 

 

 

1957년 이회창과함께 사법고시에 합격생은 모두 108명그전의 합격생은 30 여명 이었다.

정원이 없었고 평균 60 점 이상이면 모두 합격이었다. 8회생은 법조계에 큰 인맥을 형성한다.

합격후 회창은 대학을 졸업 공군에 입대한다.

 

 

법무관으로 근무한뒤 4. 19 직전인60년 3월 서울지법 인천지원으로 발령난다.

이회창은 61년 5,16 발발 직후 혁명재판부에 차출돼 1심 배석 판사 였다.

그는 이때 진보적 일간지 민족일보 조용수 사장에게 사형판결을 내린 재판에 관여 했다.

 

61년 초가을 한성수(韓聖壽) 서울 고등 법원장의 둘째딸 한인옥(韓仁玉)과 만났다.

한성수가 이회창을 눈 여겨보고 김정규  부장 판사에게  중매를 부탁했다.

이회창은 상사의 딸이라 처음엔 거부했으나 한인옥의 사진을 보고 맞선을 보기로 했다고

한다.

둘은 몇개월의 연애 기간을 거쳐 62년 3월2일 명동 성당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81년 4월17일 유태흥 대법원장 출범과 대법관이 되었다.

47세[ 동기중 선두였고  3공화국 이래 가장 젊은 대법관이 였다.

이 인선을 주도한사람은 당시  당시 전두환 전대통령의 법율 비서관이 였던  박철언 이다.

변호사 박원순은 89년 시사저널 기고문에서 우리가 주목하는 젊은 이회창이 

 소수의견을 많이 냈다는 것보다 그 의견이 언제나 국민의 인권과  사회적 약자 편에 서

 있엇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러나 자신만 알고 조직은 외면 하는 사람 독선적 이라는 비판의 원인이 되기도 햇다.

 이회창 의 꿈은  대통령 이 아니었다 그는 대 법원장 이 되길 원 했다.

 

 

 

김영삼 대통령은  회고록 (2001년) 에서 이렇게 술회 했다.

총리 발탁때 반대가 많았다,

일체의 공직에도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고한다.

내가 외국을 방문 하는동안  안기부장에게 업무보고를  요구하는가 하면 나와 독대한 장관

 들에게 무슨 얘기를 나눴는지  자신에게 보고 하라고 해 청와대로 불려가 호되게 질책했다.

이회창 은 한번더 기회를 주십시요 라고 했지만 지금 당장 사표를 내지 않으면 해임 조치

하곗다고 호통을 쳤다.

고성이 박에까지 들렸다.  그는 집무실에 나가면서 출입문을 찿지못해 허둥 대기도 했다.

대통령 김영삼과 총리 이회창의 대결은 이회창의 완패로 끝났다. 

그러나 이는 외형상 의 손익 계산 뿐이다.

회임된 이회창의 인기는 급등했다.  정두언은 이회창이 물러난 날 총리실에 격려 전화가

 폭주했다며 총리실 역사상 하루에 전화가 이렇게 많이 오긴 처음이라고 말했다.

최근 정치권 화제가 노풍 이라면 당시엔 이풍이라고 했다.

  93년 2월 감사원장 때 청와대와 안기부 까지 법대로 청와대 비서실과 경호실에 대해

 현장감사를 시작 했다.

유신후 처음있는 일이 였다.  그결과 청와대 직원들의 정보비 접대비 유용을 적발했다.

그해 4월에는 주요 무기도f-16 전투기등 입을 골자로 하는 국방부의 육곡 사업에 손을댔다.

안보상 기밀이란  이유로 역시 성역 이었던 부분이다.

평화의 땜 건립경위도 파해쳤다.

이과정에서 전두환(全斗煥) 노태우(盧泰愚) 두 전직 대통령도 조사했다.

최고 정보기관인  안기부를 감사하러 가 문을 열어주지 않는다고 전화로 보고하자 그대로

들어 가라고 지시했다.

 

정보부 이래 감사원이 안기부에 들어와 감사한것은 처음이다.

그해12월에  ys 는 이회창을 국무총리로 지명한다.

국면 전환용 이였다. 대선 공약으로 쌀시장 개방을 않겠다고 한것을 우루과이 라운더(UR)

협상타결로 개방이  불가피 해 졌고 여론이 급격히 나빠졌다.이를 많이 하기 위해 그를

국무총리에 앉혔던 것이다.

 

그러나 ys와 총리 사이는 의견이 충돌하는 일이수시로 벌어져 결국 이회창은 1백27일만에

물러났다.

허정(許政)2개월3일)에 이어 두번째 짧은 재임기간을 기록 했다.

 

96년 1월 신한국당에 입당 하여 선거 대책 본뷰장을 맡는다.

16대 국회의원 공천에서 김윤환,이기택,신상우 등  당내 중진들을 대거 탈락 시킨다.

이같은 공천으로 정치쇄신 의지를 보여줘 이회창의 리더십을 구속했다는 평가와 함께

이회창은 무섭다  는 세간의 비평을 더욱 굳게 만들었다.

97년 대통령 후보를 놓고 그와 경합했던 이인제,이한동, 이수성 등이 결국 당을 떠났다.

한나라당 초대 총재조순,박근혜와도 결별했다.

이로 인해 포용력 부족이란 지적이 계속됐다.  이회창은 현정부들어 세풍, 총풍 ,안풍 등 으로

곤경에 처했다.

이회창이  해결해야 할 또하나의 과제는 주변 정리다.

미주당은 대선에서 호화빌라 파문과 아들의 병역문제  측근 정치와 친인척의 정치개입을 공개대상으로 삼을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회창은 97년 대선에서 39만 표차로 김대중에게 패배한 다음날 펑펑 울었다후보 경호를 위해 파견했던 경찰들이 복귀 인사를 하는 자리에서  한 경호원이 눈물을 터뜨라자  참았던 감정이 터져버린 때문이다 .

10여분간 동안 눈물을 흘렸고 당시 후보 사무실은  눈물 바다가 됐다차를 나르던 여직원들도

엉,엉, 소리내어 울어 됐다.

 

이회창은 강을 헤엄쳐 건너는게 대선이라면 상대는 자유형을 하는데 나는 개헤엄을 쳤니 ,,,,

라고 자신의 미숙함을  말했다고 친구인 서병국은 말했다.

또 당시 TV 토론 녹화를 보며  저러니 떨어졌지하는 하는 생각이들 정도로 나는 서툴렀다고

말한 일도있다.

2002년 5월 한나라당 두번째 대통령 후보수락 연설을 마치고는 단상에서 넙죽 업드려 큰

 절을했다 이장면을 보고 내가알던 그 이회창이 맞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고 한다.

그가 자유형 영법을 유연하게 구사해 노련한 정치인이 될지, 흉내만 내다가 자신의 표현처럼

타락만 하고 말지는 지켜볼 일이다.

 

 

 이회창

 

변웅전  대표와 서로 자리를 양보하고있다

이글은 여,야, 정치적으로 보시지 말고 한 시대의 인물로

 봐주시면 고맙겠습니다.

2002년 5월 10일~13일 중앙일보 스크랩한 것을 요점 정리함.

            

 

 

    

'정치 인물(72)'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 30, 40 대 좌절 분노 절망  (0) 2011.10.31
서울시장 두켐프  (0) 2011.10.28
서울시장후보 MB 사저   (0) 2011.10.08
이명박 대통령 세계 지도자 상  (0) 2011.09.22
박근혜와 은지원  (0) 2011.09.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