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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야기(463)

시(詩)와 인생

by 석암 조헌섭. 2022. 12. 11.
시(詩)와 인생


윤동주(1917.12.30~1945.2.16)

서시(序詩)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가난한데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송몽규(宋夢奎)는 윤동주(尹東柱)의 고종으로서 두 분은 명동
소 학
은진중학교 1938년 연희 전문 대학에 입학하였으나 
정부가 추진한 동화정책 강화로 말미암아 각급 학교에 조선어 수업이
폐지되고 일본어 사용을 장려하기에 이르자

이러한 정책이 조선 문학을 소멸시키고 조선의 고유문화를
말살시키려는 일은 조선을 멸망시키고 말 것이므로
어떤
일이 있어도 민족 문화를 유지해야 한다고 믿었기에

1939년 2월경 송몽규(宋夢奎), 백인준(白仁俊), 강처중(姜處重) 등과 
함께 조선 문학의 동인지를 출판할 것을 모의하여 동년 8월까지
학교 기숙사 또는 다방에서 수차에 걸쳐 조선 문화 유지에 힘썼으나

그 동인지의 간행이 불가능하게 되자 연희 전문대 동창회지에
문화의 유지와 민족의식의 앙양에 힘썼다.

송몽규(宋夢奎)가 과격하고 행동적(行動的)이라면
윤동주(尹東柱)는 온순하고 침착한 성격(性格)의 소유자였다.
1935년 4월 은진중학교 3학년 때 19세의 나이로 당시 남경에
잠복해 있던 독립운동 단체인 김구(金九) 일파를 찾아가
독립운동
교육을 동년 11월까지 교육을 받았다.

그러나 김구 일파의 내부 사정으로 목적 달성이 어려울 것을 알자 
다시 제남시(濟南市)에 있는 이웅(李雄)이라는 독립운동가를 찾아가 
함께 독립운동을했으나 사찰 당국의 압력으로 목적을 이루지 못하였다.

1943년 7월 14일에 재경 조선인 학생 민족주의 그룹 사건 책동 자로 

 체포되어 동년 12월 6일 경찰 조사를 받고 검사국으로 넘어갔다.
1944년 6월까지 미결수로 있다가 송몽규는 2년 6월
윤동주는
2년 의형을 받았다.

시인의 삶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복역 중 윤동주는 1945년 2월 26일에 29세
송몽규는 동년 3월 10일에 옥사 순절(獄死)하였다.

김소월(金素月)은 왜 33세의 젊음으로 이승을 떠났는가?
이장희(李章熙)는 27세의 짧은 생을 스스로 막음 했는가?.
김유정(金裕貞)과 이상(李箱)은 똑같이 20대에 요절했다

예수는 33세에도 못 미치는 그 나이로…
예를 들면 어찌 이에 그치겠는가?
천재는 요절 그래서 모두 다
서둘러 길 떠났는가.

박인환(朴寅煥), 신동엽(申東曄)이 그랬었고 최근의 시인들
무등산 밑에서 무한의 토혈(吐血)로 자신을
태우다간
김만옥(金萬玉)
중랑천 다리 아래서 실종된 임재홍(任宰洪)에
이르기까지
시인(詩人)들의 별들은 예고 없이 자취를 감추었다.

시(詩) 뿐만 아니라
노래 가사에도 미묘한 힘이 있다고 한다.
실제로 우리 가요에도 슬픈 노래나 이별(離別) 노래를 불렀던

차중락=낙엽따라 가버린사랑, 배호=영시의 이별, 김정호=간다,
하수영= 아내에게 바치는 래,
사형수가 된 육근성 등,
슬픈 노래를 부른 많은 가수가 그저세상 사람이 된 것이야 말로
노랫말도 씨가 된다는 것을 
실제로 보여준 것이다. 

우리는 누구에게나 머리가 좋고 좋은 성격이라 든지
선하고 의리 있고 신의가 있는 참 훌륭한 사람이라고 칭찬해주면
선이 되고 의가 되며 신의가 있는 정말 훌륭한 사람이
되기 쉽다고 한다. 


우리는 될 수 있는 한 시와 글을  아름다운 글과 시(詩)를쓰고
영화나 음악을 들을 때도 즐겁고 신나는 음악을 들으며 항상
웃으며 즐겁게 살았으면 한다.


한경애--옛 시인의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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