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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와 시조(52)

매천(梅泉) 황현(黃玹) 절명시(絶命詩)

by 석암 조헌섭. 2020. 4. 6.


 

매천(梅泉) 황현(黃玹) 절명시(絶命詩


매천 황현 선생께서 1910년 한일합병조약이 체결되자, 황현이 경술국치를 당하여 

선비의 절개를 지키면서 8월 7일(음력) 더덕술에 아편을 타 마시고 자결한 

황현선생을 생각하면서 남긴 절명시 네 수를 올려본다. 

매천 황현의 절명시는 칠언절구 4수이다. 김택영(金澤榮)이 편찬한

『매천집(梅泉集)』(7권, 1해) 권5에 수록되어 전한다.

 1910년 국권이 늑탈되자, 선생은 아래 4수를 절명시를 남기고 자결하였다고 한다.

 

절명시(絶命詩) 매천(梅泉) 황현(黃玹) 


一 首 
 
난리곤도백두년(亂離滾到白頭年) -- 난리를 겪다 보니 머리가 하얗게 세었구나.

기합연생각말연(幾合捐生却末然) -- 몇 번이나 목숨을 끊으려다 이루지 못했도다.

금일진성무가내(今日眞成無可奈) -- 오늘날 참으로 어찌할 수 없고 보니

휘휘풍촉조창천(輝輝風燭照蒼天) -- 가물거리는 촛불이 푸른 하늘에 비치는구나. 

 
二 首 
 
요기엄예제성이(妖氣掩翳帝星移) -- 요망한 기운에 가려져 제성(帝星:황제의 별)이 옮겨짐에

구궐침침주루지(九闕沈沈晝漏遲) -- 구중궁궐은 침침하여 하루해가 더디겠구나.

조칙종금무부유(詔勅從今無復有) -- 이제부터는 조칙(어명)조차 받을 길이 없으니

임랑일지루천사(琳琅一紙淚千絲) -- 구슬 같은 눈물이 천 가닥으로 흐른다. 

 
三 首 


조수애명해악빈(鳥獸哀鳴海岳嚬) -- 나는 새와 들짐승도 슬피 울고 바다와 산도 찡그리니 

근화세계이침륜(槿花世界已沈淪) -- 무궁화 우리 세상 이미 잠기고 빠져버렸구나 

추등엄권회천고(秋燈掩卷懷千古) -- 가을 등잔 아래 책 덮고 흘러간 긴 역사 생각하니 

난작인간식자인(難作人間識字人) -- 인간 세상의 글 아는 자 되기 정말로 어렵도다. 

 
四 首 
 
증무지하반연공(曾無支廈半椽功) -- 내 일찍이 나라 위해 서까래 하나 놓은 공도 없었으니

지시성인부시충(只是成仁不是忠) -- 내 죽음은 겨우 인(仁)을 이룰 뿐 충(忠)을 이루진 못했어라.

지경근능추윤곡(止竟僅能追尹穀) -- 이제 겨우 윤곡(尹穀)처럼 죽음에 거칠 뿐

당시괴불섭진동(當時愧不躡陳東) -- 그때의 진동(陳東)처럼 나라 위하지 못함이 부끄럽구나. 

 
윤곡 : 중국 송나라 진사로, 몽골 침입 때 가족이 모두 몰살당하자 따라서 자살을 한 선비.
진동 : 중국 송나라 선비로, 국가의 기강을 세우는 상소를 하고 황제의 노여움을 사서 억울하게 죽음 
 
제1수에서 작자는 이미 을사년부터 순명을 결심해왔음을 말한다. 

창천을 비출 촛불에다 자신의 외가닥 양심을 비유하고 있다. 

“난리통에 어느새 머리만 허예졌누나 / 그 몇 번 목숨을 버리섰건만 그러질 못했던 터

하지만 오늘은 정녕 어쩔 수가 없으니 / 바람에 흔들리는 촛불만이 아득한 하늘을 비추는구나.

 
제2수는 나라의 종언(終焉)을 고하는 양국조서(讓國詔書)이건만 

옥음(玉音 : 임금의 음성)이 다시는 없을 것이라 하며 슬퍼하였다. 


제3수는 식자인(識字人)으로서의 자책을 드러내었다. 

“새짐승 슬피 울고 산과 바다도 찡기는 듯/무궁화 삼천리가 다 영락하다니

/가을밤 등불 아래 곰곰 생각하니/이승에서 식자인 구실하기 정히 어렵네
 
제4수는 자신이 죽는 것은 충(忠)을 다하고자 함이 아니라 인(仁)을 이루기 위함이다. 

그러나 적을 탄핵하다가 참형 당한 진동(陳東)을 본받지 못하고 

겨우 몽고병의 침입 때에 자분(自焚)하고 만 윤곡(尹穀)의 뒤나 따를 뿐이라고 통탄하였다. 

「절명시」는 우국(憂國) 의식이 짙은 높은 수준의 시이다. 
 
한말 4대 시인의 한 사람으로 불리는 매천(梅泉) 황현(黃玹, 1855. 12. 11 ~ 1910. 9. 10)선생은

 장수 황씨 황시묵을 아버지로, 풍천 노씨를 어머니로 하여 세도 정치기가 한창인

 1855년(철종 6년) 12월 11일 전라도 광양현 봉강면 서석촌에서 태어났다. 


자는 운경(雲卿)이다. 선생의 선조 중에는 세종대왕 시절 명재상으로 잘 알려진 황희와 

임진왜란 당시 진주성 전투에서 전사한 황진과 병자호란 때 의병장을 지낸 황위 등이 있었다. 

그러나 인조반정 이후 몰락한 황씨 가문은 그가 태어난 시절에 이르면 

정계에 유력한 인사를 배출하지 못하여 그는 시골의 유생으로서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선생은 어려서부터 총명함이 남달랐고, 11세가 되는 해에 서당에서 

천사(川社) 왕석보(王錫輔)를 스승으로 하여 시와 문을 본격적으로 배우기 시작하였다. 

이후 20대가 되어서부터 많은 시를 짓기 시작하였다. 

왕석보는 1816년에 태어나 1868년 사망한 학자였다. 그의 문인으로는 황현 선생을 비롯하여 

대종교를 창시한 나철, 대한제국 시기 계몽운동가 해학 이기 등이 유명하다. 

 성삼문의 임사부절명시(臨死賦絶命詩)


격고최인명(擊鼓催人命) -- 북소리 둥둥둥, 이내 목숨 재촉하는데,

회두일욕사(回頭欲斜) -- 고개를 돌려 바라보니, 서산에 해는 지려 하네

황천무(黃泉無) -- 저승으로 가는 길에는 주막이 하나도 없다거늘,

금야숙수가(今夜宿誰家) -- 오늘 밤에는 누구네 집에서 묵고 가야 하나?


임로가(臨路歌)-임종의 노래…이백  

대붕비혜진팔예(大鵬飛兮振八裔) -- 대붕이 세상 끝까지 떨쳐 날다가,  

중천최혜력불제(中天崔兮力不濟) -- 중천에서 날개 꺾여 힘이 모자라는구나.  

여풍격혜출만세(餘風激兮出萬世) -- 남은 바람은 만세에 떨치련만,  

유부상혜괘좌몌(游扶桑兮掛左袂) -- 부상나무에서 노닐다 왼 소매가 걸렸다.  

후인득혜지전차(後人得之兮傳此) -- 후대 사람들이 이 소식을 들어 전하려 해도,  

중니망혜수위체(仲尼亡兮誰爲涕) -- 공자가 없으니 누가 눈물 흘려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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