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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이야기(124)

남명 조식(南冥 曺植) 선생의 일대기

by 석암 조헌섭. 2023. 2. 10.

수정 2023년 2,10일

남명 조식(南冥 曺植) 선생의 일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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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명선생숭모비          평시조     두류예찬
    평시조
         홍살문







 
 
 
 남명 조식(南冥 曺植) 선생의 일대기


조식 영정 사진
  남명 조식 선생은 1501년 6월 26일
합천 삼가에 태어나 성리학의 대가이며
사림의 영수로서 한평생 갈고 닦아
쌓아 올린 학문(學文)과 도덕(道德)
인격(人格)과 사상(思想) 철학(哲學)
정신을 후세에 전하기 위하여 많은
영재들을 모아 가르쳤으며, 여기에서
배운 학생들이 조선 시대의 문(文)과
무(武)와 정치(政治)와 학술계를
주도하는 중심인물이 되었고,
 
남명 사후 20년인 1592년 4월 14일
임진왜란을 당하여 의령에서 왜적을
리친 망우당 곽재우(忘憂堂 郭再祐)
(조식 외손서)), 합천에서 의병을
 창설한 창의장 래암 정인홍
(來庵 鄭仁弘 의정),과 고령에서
절충
장군인 송암 김면(松庵)金沔),
 함양에서 충의공인 대소헌 조종도
(大笑軒 趙宗道),와 초계에서 의병장
설학 이대기(雪壑  李大期)와
탁계 전치원(濯溪 全治源) 외
























57남명의 제자들로서 왜놈의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일으킨 
임란을 승리로 이끌어 일본 정부는 남명 조식을 의병의 아버지라 해서 두려움과
미움을 표했다.

또한, 학계와 정계에 명망 높은 분은 덕계 오건(德溪 吳健홍문관전한),
 옥계 노진(玉溪 盧禛이조판서), 각제 하항(覺齊 河沆  설중매평),
수우당 최영경(守愚堂 崔永慶 희세의 인물),
 동강 김우옹(東岡 金宇顒 대사헌 조식 외손서),
 한강 정구(寒岡 鄭逑대사헌), 약포 정탁(藥圃 鄭琢 좌의정),
신암 이준민(新庵 李俊民좌참찬<조식 생질>), 김효민(金孝民)등이 남명 문하에서
 글을 배운 사람들이다.

남명의 죽마고우로는 일제 이항(一齊 李恒감찰장령), 동고 이준경(東皐 李俊慶영의정)

숭덕제 이윤경(崇德齊 李潤慶 평안감사)
목계 강혼(木溪 姜渾함경 감사)등과 함께 자랐으며,
 
20살 때 생원 진사 시험에 1~2등으로 합격했을 때 사귄 평생 지우
  대곡 성운(大谷 成運명종때 은사 ), 청송 성수침(聽松 成守琛 명종 때 은사 좌의정 추증)과
  더불어 영남의 3선배라 불리는 황강 이희안(黃江 李希顔 고령 현감 판관),
  송계 신계성(松溪 申季誠) 외, 동주 성제원(東洲 成悌元 보은 현감),
  칠봉 김희삼(七奉 金希參)과 친하였다.
 
남명사상(南冥思想):수기치인(修己治人), 실천궁행(實踐躬行)으로" 몸소 갈고 닦은
것을 실제로 행동에 옮긴다 는 실천유학(實踐孺學)을 강조했으며,

남명 철학(哲學) : 경(敬)과 아울러 의(義)를 강조한 경의협지로 "경(敬)으로써
 내면을 밝혀 마음을 곧게 하고 의(義)로서 행동을 결단하여 모든 사물을
처리해 나간다 는 생활철학(生活哲學)을 견지하였으며,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당시 사회 현실과 정치적 모순에는 적극적인 비판의 자세로 임하였다.


                                             남명 조식 동상

남명선생을 문인들이 평하기를......

한강 정구(寒岡 鄭逑대사헌) :선생의 기질은 태산교악(泰山喬嶽)으로 행동이 태산과
                              같이 크다 하였고,
 
동강 김우옹(東崗 金宇顒대사헌);성정은 추상열일(秋霜烈日)로 가을의 서릿발
                             이나 여름의 태양처럼 엄정하고 권위가 있었으며,

미수 허목(眉叟 許穆 우의정) : 선생의 처세를 불구종(不苟從) 불구묵(不苟默)으로
               불의를 보고 구차하게 따르지도 않았고 구차하게침묵하지도 않았다 하였으며,

우암 송시열(尤庵 宋時烈 좌의정) : 선생의 공덕은 입유렴완(立濡廉頑)으로 나약한
               선비를 강하게 만들었고 탐악한 관료들을 청렴하게 만들었다고 하였고,
                      
율곡 이이(栗谷 李珥  이조판서) : 선비의 지조를 끝까지 지킨 이는 오직 이 세상
                             오직 남명뿐이라 하였으며,

택당 이식(澤堂 李植 이조판서) : 고고한 자세로 세상을 내려다보았다고 하였으니
                             진정한 처사야말로 나뿐이야 라는 말을 남겼을 만큼 우리 역사에
                             유일한 처사요 가장 성공한
교육자로 평가받고 있다.


 남명선생의 일대기를 정리해보면
 
아버지 조언형(曺彦亨정3품 승문원 판교), 어머니 인천 이씨, 국(菊)의 따님
사이에 3남 5녀 중 둘째로 태어나,

5살 때 부친이 문과급제로 서울 종로로 이사가 아버지에게 문자를 배웠으며,

9살 때 큰 병을 앓았는데 어머니가 이를 걱정하자, 하늘이 나를 생(生)함에 반드시
      할 일이 있어서일 것이니 요절할 일 없다고 오히려 어머니를 위로하였고,

18살 때 아버지가 함경도 단청 군수로 있을 때 유학 경전 외 천문, 지리, 의학,
      수학, 궁마, 항진, 병술 등 다양한 재능을 익혔으며 마음은 있으되 몸이
      따라 주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면서 정신력과 지구력 인내심과 담력을
      키우느라 물그릇을 받쳐 들고 밤을 꼬박 지새우기도 하였다.
          
20세 때 생원 진사 양 과에 1~2등으로 합격을 했으나, 1519년 기묘사화로
     개혁을 부르짖던 정암 조광조(靜庵 趙光祖 대사헌)가 죽고
     숙부인 조언경(曺諺卿이조좌량)이 멸문하며 아버지 조언형(승문원 판교)이
     좌천당하자 이를 슬퍼하고 시국을 한탄한 선생은 벼슬을 단념하고
     학문에만 전념하였으며,

22세 때 충순위(忠順衛) 조수의 따님 남평 조 씨와 결혼하였고,

25세 때 성리대전을 접하고 크게 깨달은 것이
     벼슬에 나가서 하는 일이 있어야 하고 집에 있으면 지조를 지킨다.”

     대장부가
벼슬을 하면서 하는 일이 없고 집에 있으면서 아무런 지조가

     없으면 배우고 익힌 것을 어디에 쓸 것인가?"라며
     그때까지 이것저것 공부하던 것을 다 버리고 오로지
     사서(論語, 大學, 中庸, 孟子)와 육경(易經, 詩經, 書經, 春秋, 禮記)에만
     전념하였으며엇을 공부하고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방향을 잡았다.

         
26세 때 아버지가 세상을 뜨자, 21년 간 서울 생활을 마감하고 고향 합천 삼가에서
     장사를 지내고 3년 동안 여묘 생활을 하였고 가난과 싸우면서 민생의  
     고초가 어떤 것인가를 뼈저리게 체험하였으며,

    남명 사상 속에 항상 민생을 잊지 못하는 것은 이때 생민의 어려움을 실제로
     체험해 보았기 때문이다.


산해정(신산서원)에서는 지금도

매월 초하루 보름날은 김해 유
에서 남명 조식 선생과
송계 신계성 선생에게 제향을
올리고 있.



30세 때
처가가 있는 김해로 이사하여 산해정
(신산서원)을 짓고
안정된 공부에
들어가니
태산에 올라 사해를 바라보는
기상을 길렀고 ,학문과 인격을 닦았으며

여기에
대곡 성운(大谷 成運),
청향당 이원(淸香當 李源),
황강 이희안(黃江 李希顔)
송계 신계성(松溪 申季成) 등
명류들이
모여 기묘사화 이후
퇴상했던 사기를
응집 재기를
도모하는 중심인물이
되었고,
















38세 때 남명선생은 중종 34년 회재 이언적(晦齋 李彦迪우찬성)의 추천으로

     헌릉 참봉으로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았으며, 그 후 종부사 주부사로
      임명되어 이곳을 주부동 이라 한다.

     몇 년 뒤 이언적이 경상도 관찰사로 와 만나기를 청하여도
     대감이 벼슬에 물러난 뒤 만나도 늦지 않을 것이라며 거절했다.

     그 뒤에도 몇 차례 임명되었으나 번번이 사양했고 , 1554년 벼슬에
     나아가라는 퇴계 이황(退溪 李滉예조판서)의 권고마저 물리쳤다.

44세 때 1544년 6월에 늦게서야 얻은 외아들 조차산(次山)이 9살의 나이에
     죽었는데, 남명은 9살 때 죽을병에 걸렸다가 살아난 적이 있건만
     아들은 9살 때 살아나지 못하고 죽고야 말았다.

     아들이 뒷산에 묻혀 있어 조차산이라 불리기도 한다.
     조식 선생의 본처 정경부인의 묘소가 신산서원 입구 야산에 묻혀 있다.
   
45세 때 1545년 을사사화로 친구인 이림(李霖), 성우(成遇), 곽순(郭珣) 등이 죽고
    모친도 사망 3년 동안 시묘 생활을 하였으며 18년 동안의 김해 생활을 마감하고

48세 때 고향 합천 삼가로 다시 돌아와 계부당과 뇌룡정을 짓고 제자들을 가르치고,


뇌룡정


뇌룡정은 신명사 마음의 집으로 눈 < 경, 마음 > 귀 외단자의 내명자경
처사로서 언론을 발하여 국정을 비판하였으며, 이때 학문(學文)과 도덕(道德)
인격(人格)과 사상(思想)은 널리 알려져 오건(吳建), 정인홍(鄭仁弘), 노진
(盧鎭) 하항(河沆) 등 기성학자들이 남명문하에 들어와 사림의 영수로 추대되었다.

뇌룡정에서 읊었다는 좌우명은 남명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준다,
뇌룡이란 장자의 연묵이뇌성(淵默而雷聲) 시거이용견(尸居而龍見) 깊은
연못처럼 고요하다가 우뢰처럼 소리치고, 죽은 듯이 가만있다가 용처럼 나타난다.

남명은 타락한 권력을 질타하고 무기력한 지식사회에 경종을 울림으로써
어지러운 시대에도 재야의 정신은 시퍼렇게 살아 있음을 증명한 것이다.
       
 뇌룡뒤편 남명선생이 심은 정자나무 옆의 시
.


52세 때 몇 년 전 음식과 의복 손질할 손이 필요하여 삼가에 살던 선비 송린(宋璘)의 
    딸을 부실로 맞아 송씨(宋氏) 부인에게서 아들 차석(次石)을 얻었다.


55세 때 1555년 단성 현감에 제수 되었는데 현감 직을 받는 대신 온 나라를

    진동시킨 상소문 단성소(丹城疎)를 올리자 선생의 명망은 극치에 달했다.



다음은 단성소와 민암부의 내용을 알아볼까 한다.
 
단성현감 사직소( 단성소 을묘사직소)


● “나라의 기틀은 무너졌고 민심이 떠난지 오래입니다. 높은 벼슬아치는 오직  재물에만
    탐하여 물고기의 배가 썩어 들어가는데도 이를 바로 잡으려 하지 않습니다.“


   대왕대비는
세상 물정 모르는 바깥소식이 막힌 깊은 궁궐 안의 한 과부에
   지나지 않고 전하는 선왕의 어린 아들에 불과할 뿐이니 천 갈래, 만 갈래
   흩어진 민심을
 어떻게 수습할 수가 있겠습니까.....


 나라의 형편을 바로 잡는 길은 여러 가지 법령에 있지 않고 오직 전하께서 크게

 한 번 마음 먹기에 달린 것입니다...... 라는 것이 상소문의 요지이다”.

● “전하의 국사는 이미 글렀고, 나라의 근본은 이미 망했으며, 하늘의 뜻은 벌써

 가버렸고, 인심도 이미 떠났습니다. 마치 큰 나무를 벌레가 백 년 동안 속을
 갉아먹어서 고액이 이미 말라 버린 채, 멍하니 질풍 폭우에 쓰러질 날만 기다린
 지가 오래된 것과 같습니다.

 조정에 충성스러운 신하와 근실한 선비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미 형세가
 기울어서 지탱할 수 없으며, 사방을 둘러봐도 손을 쓸 수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민암부(民巖賦)

"백성은 물이요, 임금은 물 위의 배에 지나지 않는 것. 배는 모름지기 물의 이치를
알아야 하고 물을 두려워해야 한다."는 지론을 거침없이 갈파한 남명(南冥)
벼슬아치는 가죽 위에 돋은 털에 지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백성들의 가죽을
벗기는 탐관오리(貪官汚吏)를 질타한
 내용이다.


남명 조식은 상소문 단성소와 민암부에서 대왕대비(문정왕후)를 세상 물정 모르는
 과부 또는 아녀자라 하고 22세의 전하(명종)를 물 위의 배에 비유하며
 어린애(고아)에 불과하다고 했으며 벼슬아치는 백성을 껍데기를 벗기는

 탐관오리만 한다고 하였으니, 왕조시대인데도 온 나라를 진동시킬 만큼 국정을
 극렬하게 비판한 것은 조선조 500년 역사상 전무후무(前無後無)한 것이다.

남명이 이렇게 직방 강직한 상소문을 올렸어도 포도청에 한 번 안 끌려간 것을
 보면 정말 대단한 분이라 생각된다.

남명의 성격이 엄격하고 강직한 성품은 아버지 조언형(曺彦亨)에게 물려받았다.
언형이 정삼품 벼슬인 승문원 판교(判校)로 있을 때 목계(木溪) 강혼(姜渾함경감사)
라는 소꿉친구가 있었는데,

강혼은 연산군 때 대문장가로서 연산군의 청에 따라 후궁의 죽음을 추모하는 글을
 쓰게 되자, 언형은 강혼과 절교를 선언한다.

그 후 언형이 단청 군수로 있을 때 직속상관인 강혼이 감사(監査)가 되어 찾아오자,
 언형은 감사를 맞이할 생각도 않고 집으로 가버렸고 집으로 찾아온 강혼을 보자
언형은 하인에게 술독을 가져오라고
먼저 큰 잔으로 떠 마셨고 그러자 강혼도
혼자서 서너 잔
떠 마셨다.

 긴장된 순간이 흐르자 언형이 말하기를…

"자네는 개, 돼지보다 더 못한 짓을 했네. 그런 자네가 먹다 남은 이 술을 내가
 어떻게 마시겠나 조그마한 글재주로 부끄럽게 사느니 차라리 죽는 게 어떻겠나?" 
 
이 말을 들은 강혼은 고개를 떨구고 말없이 눈물만 흘리다 떠났다고 하는 것이
(연려기술)이란 책에 전해오는 내용이다.

57세 때 부인에게서 둘째 아들 조차마(次磨 칠원 군수)가 태어났으며,

60세 때 송씨 부인에게서 셋째 아들 조차정(次碇 종이품 가선대부)이 태어났다. 
   남명에게 
딸이 하나 있었는데,
   그 딸이 회령포 만호(萬戶) 김행(金行 정사품 문관직)에게 시집가서 두 딸을 낳았다.

   큰딸은 김희삼(金希三)의 아들 김우옹에게 시집 보내고,
   작은딸은 곽월(郭越) 아들 망우당 곽재우에게 시집 보냈다.

61세 때 선생의 고향 합천 생활 22년을 마감하고 마지막 도장으로 지리산 천왕봉을
     바라보는 덕산의 시윤동에 산천재(山天齋)를 짓고 후진 양성에 힘을
     기울였으며, 이때 배우러 온 사람들은 조종도, 김면, 곽재우, 최영경,
     김우옹, 정구, 정탁, 조이천, 조수천, 조응인, 변옥희, 등이었다,
 


천재

산천재(山天齋)의 뜻은 주역의 대축괘로 독실한 마음으로 공부하여 날로 그 덕을
새롭게 한다는 의미이다.

천재(山天齋) 네 기둥에 쓴 칠구언시 는 덕산복거(德山卜居)덕산에 자리 잡고서,


춘산지처 무방초(春山厎處 無芳草) 봄 산 어디엔들 향기로운 풀 없으랴만,

지애천왕 근제거(只愛天王 近帝居) 옥황상제가 사는 곳 가까이 있는 천왕봉만을 사랑했네

                                                       
백수귀래 하물식(白手歸來 何物食) 빈손으로 돌아왔으니 무얼 먹고살 건가 ?

은하십리 끽유여(銀河十里 喫猶餘) 은하십리 맑은물 마시고도 남으리.



남명시비

제덕산 계정주(題德山溪亭株) 덕산의 시냇가 정자 기둥에 쓴다.

청간천 석종 (請看 千石鐘) 천 섬 들어가는 큰 종을 보소서,

비대 구무성 (非大 扣無聲) 크게 치지 않으면 소리가 없다오,

쟁사 두류산 (爭似 頭流山) 어떻게 해야만 두류산(지리산)처럼,

천명 유불명 (天鳴 猶不鳴) 하늘이 울어도 울지 않을까.


욕천(浴川) 세심정에서 목욕하고 나서 쓴




전신사십년 전루(全身四十年 前累) 온몸 40년 동안 쌓인 티끌

천곡청연 세진휴(千斛淸淵 洗盡休) 천 섬 되는 맑은 물에 싹 씻어 버렸다,

진토당능 생오내(塵土倘能 生五內) 만약 티끌이 하나라도 내 오장에 생긴다면,

직금고복 부귀류(直金刳腹 付歸流) 지금 당장 배 쪼개 흐르는 물에 부쳐보내리.

위의 詩는 남명선생이 삼가에 있는 모든 것을 동생에게 맡기고 홀몸으로 와서
아무 사욕 없이 쓴 시이며 이곳에서 지은 것으로 선생의 훌륭한 뜻과 높은 기상,

그리고 남명의 정신세계를 나타내고 있다.

산천재 의 벽화의 그림은



1, 신들이 바둑을 두는 그림이고,


2, 허유 소부 고사도,

'장자'의 소요유편에 나오는 은자(隱者) 소부와 허유의 일화를
묘사한 것이다.
소부와 허유는 요 임금이 천하를 맡기고자 했지만 모두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허유는 자신이 잘못 들었다며 귀를 씻었고,
허유가 영천에서 귀를 씻고 있는 것을 본 소부는 소에게도 그 물을 마시게 할 수

 없다며 돌아갔다고 한다. 처사의 삶을 지향한 조식의 모습과도 매우 닮아 있다.


3. 선생의 제자가 벼슬길에 나간다 하자 저기 밭 가는 소 한 마리 끌고 가라는
   말씀을 하셨던 그림이다.
 
                     성성자                       칼













남명 선생은 항상 성성자(惺惺子)작은 두 개의 방울을 옷고름에 달고 다녔는데
 성(惺)은 깨달음이니 스스로 경계하여 방울 소리를 들을 때 마다 자신을
 일깨우자
했던 것이고,


내명자경(內明者敬) 외단자의(外斷者義)를 새긴 경의 검(敬義 劍)을 차고
다닌 것은
경(敬)으로써 안을 밝히고 의(義)로써 밖을 단연케 한다는 것이다.


남명선생이 죽기 전에

성성자는 외손서인 김우옹에게 주고 경의검은 정인홍에게 주었다.

66세 때 1566년 명종 임금이 5, 7, 8월 연이어 상서원 판관에 재수한다는

     교지(敎旨)를 내리자 명종과 독대(獨對)하여 나라를 다스리는
     방법에 대하여 임금과 신하는 깊은 정과 믿음이 있어야 하고,

     훌륭한 제왕은 신하를 친구처럼 허심탄회(虛心坦懷)한 의견을 나누어야
     하며, 백성들이 가난에 시달려 시급한 대책을 세울 것을 건의하고
     11일 만에 덕산으로 돌아왔다.
                  
     이 당시 시국은 중종이 죽고 12살에 왕이 된 명종 임금제위 기간
     내내 문정왕후의 등살에 시달려야 했고, 섭정을 놓은 뒤에도 툭하면 왕을
     불러 지시하고 심지어 임금의 뺨을 때렸다고 야사는 전한다.

     누이를 등에 업고 설친 윤원형(尹元衡)의 세도는 차마 눈 뜨고 못 볼 지경
     이었고 윤원형의 서울의 집만 해도 서울에 16채나 되었다고 하니
     왕의 권위는 땅에 떨어졌고, 조정 대신들은
     배 채우기에 급급했으니 임꺽정(林巨正) 같은 군도가 설치고 왜구가 들끓는
     것은 정한 이치였다.

72세 때 1572년 2월 8일 남명이 천수를 다하고 운명(運命)하자 조정에는 재물과
     제관을 보내어 치제하고 사간원 대사간의 벼슬을 추증하고 다시 광해군 때
     영의정으로 추증(追贈)되고 문정(文政)의 시호가 내려졌다.

남명의 유적은

 
합천(陜川) 에는 조식 생가, 용암서원, 뇌룡정, 을묘사직소
          (단성소)비(碑),남명 조식 형상과, 남명 선생 시 비가 있고,
 
김해(金海) 대동면 에는 신산서원(山海亭) 숭도사(崇道祠), 유위재 ,환성재,
          지숙문 남명 선생의 본처 정경부인 묘소,가 있으며,
 
산청(山淸)에는, 덕천서원, 세심정, 숭덕사,산천제, 묘소, 남명기념관,
          신도비 등이 있고,

1, 정인홍 2. 허목 3. 조경 이 지은 것은 철폐됨, 지금은 우암 송시열이 지은 글이
    있으며, 묘소 비문 (대곡 성운이 지은 묘갈명)등이 있다.



덕천서원에는 매년 음력 3월과 9월의 첫 정일에 제사를 올리며 매년
양력 8월 18일에는 남명선생의 탄생을 기념하는 남명제가 열리고 있다.
주소=경남 산청군 시천면 원리 222-3번지 전화번호 055-970-6000


숭덕사


1 .남명 기념관


 남명선생 신도비문 국역비

 


                     신도비                                           선조대왕 사제문 국역비

2, 선생의 부실인 숙부인 송씨(宋氏) 묘(墓)가 앞뒤로 쓰여 있고, 묘소(墓所) 앞에는
   덕천서원, 세심정 숭덕사, 산천제 묘소, 남명기념관, 신도비,

3, 남명의 묘소에는 3개의 비문(碑文)이 허영을 싫어하는
   남명의 마음처럼 시류를 한탄하듯 지금도 정과 총에 맞았는지 구멍이 나 그 자리에 있다.
 

남명 묘소

주요 저서로는 문집(文集)인 남명집과 학기유편이 있고 작품에는 남명가
 권선지로가 등이 있다.

남명의 행장(일대기)은 외손서 김우옹이 지었으며, 정인홍이 지은 것도 있다.

학문 방법론에서도 동년에 태어난 퇴계(退溪) 이황(李滉예조판서) 선생과는
 단 한 번도 만나지는 않았지만 초 학자들에게
심경, 태극도설 등을 먼저 가르치는 퇴계의 교육방법을 비판했고 소학, 대학 등
 기초적인 내용을 먼저 가르쳐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당시 이황과 기대승의 이기심성 사단(仁, 義, 禮, 知)과
 칠정(喜, 怒, 哀, 樂, 愛, 惡, 欲)
논쟁에 대해서도 비판적인 시각에서 이를 하학 인사를 거치지 않은 상달천리로
 규정하고 하학 이상달 의 단계적이고 실천적인 학문(學文)방법을 주장했다.

해방 이후 우리나라의 최초로 조선 교육사를 정리한 이만규의 저서(조선 교육사)

에는 남명의 교육 방법에 대해,

첫째 : 학생들로 하여금 스스로 해명하고 스스로 깨달도록 하였고,


둘째 : 선생의 모범을 보여 학생들로 하여금 감흥이 일게 하였으며,


셋째 : 개인 자질에 따라 한껏 재능을 키웠고,


넷째 : 질문을 받으면 아주 작은 부분까지 설명해 추호의 의심도 없게 하였으며,


다섯째 : 잘못을 교정할 때 간략하고 함축적인 말로 설명해야 싫증을 안 내고

               의심을 안 받는다는 게 남명 조식 선생의 교육 방법이다.
           
그런데 요즘은 암기식 교육으로 사물의 본질(本質) 파악과 비판의식을 키울 기회를
차단당하고 대학에 가서는 또다시 취업시험을 위해 단편적이고 기술적인 지식만
습득하는 오늘의 교육 현실은 남명의 교육 방법과 비교해볼 때 너무도 부끄럽고
후진적이라 하겠다.

남명은 비판의식과 주체사상(主體思想)을 상실한 학자들은 정치의 모래 배나

 자본의 힘에 농락당하기 쉽다고 지적하며 사태의 본질을 파악하는
능력이 부족하고 지조가 없으면 만변하는 상황에 대처
할 수 없으며
조그마한 위험이나
압력에도 굴복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옛말에 이르기를 왕비(王妃)를 배출한 집안보다 재학을 배출한 집안이 낫고

 대 재학을 배출한 집안보다는 문묘 배향자를 낳은 집안이 나으며 문묘 배향자를
 배출한 집안보다는 처사(處士)를 배출한 집안이 낫다고 하였다.

같은 해에 태어난 퇴계(退溪) 이황이 죽을 때 영정에 벼슬 이름을 적지 말고
 처사라고 쓰라는 말을 듣고 남명은
할 벼슬 모두 다하고 처사라니 진정한 처사(處士)야 말로 나 뿐이야 라고 하였다.

지금까지 남명학 연구(硏究)와 행사는 경상대 덕천서원이 매년 8월 16~18일 3일간

도맡아 왔지만 남명 탄신 500주년 (2001년 8월 13~18일)에는 경남도에서
70억 원을 들여 18개 분야 기념사업을
펼쳤고
대학교수 유림학자 후손 등 주민 3~4천여 명이 모여 선비문화 축제를

 성황리에 개최하였으며, 국제 학술대회(學術大會)를 8월 16일 삼성연구소에서
 9월에는 한국 정신문화 연구원에서 11월에는 대규모 국제 학술대회를 열었고,
또한 경상대에서는 도비와 민간 후원금 42억 원으로 대학 내 지하 1층 지상 3층
 규모의 남명 기념관(記念館)을 건립하고
 
합천에서는 생가 복원과 용암서원을 건립하고 있으며, 2001년 출범한 남명학회는
서울대 철학과에 사무실을 두고 문(文)과 사(史) 철(哲))은
물론 한문학(漢文學) 예술학(藝術學) 전공자 100여 명의 교수가 회원을
 구성하였다.
 
서울대 철학과 이남영 교수가 회장을 맡고 서울대 금장태, 성균관대 송재소 교수가
부회장을 맡아 남명학회는 학회지를 내는 한편 매년 8월 16~18일 남명제를 열어
남명학 붐을 조성하고 있으니 남명 조식의 명성(名聲)이 용이 하늘을
 승천(昇天)하듯 더욱 빛날 것이다. 


 
  • 2010년 3월 1일.
    2023년 2월11일 수정
  • 南冥 曺植 先生 後裔
    13代 孫
  • 昔暗 曺 憲 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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