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정 2015, 11, 23.
발췌=김희룡 기자
도공 이삼평 [陶工 李參平] 일본 도자기의 원조는 정유재란(1598년)때 일본으로 끌려간 조선 도공(陶工) 40여명(원래 80여명이 끌려갔으나 도중 상당수가 사망함)이다. 이 가운데 이삼평과 심수관(1대는 심당길)이 일본에서 가장 유명하다. 큐슈 사가현에 있다. 사가현 아리타 지역은 일본 도자기의 산실로 육성[育成]돼 있다. 그는 1616년 아리타 동부의 이즈미산에서 자기의 원료 백자광을 찾아내고 마침내 백자를 구워내는 데 성공[成功]했다. 이로써 일본 자기의 역사가 시작되었고 오늘날까지 이삼평[李參平]은 일본의 '도조[陶祖]'로 받들어지고 있다. 매년 5월 4일에는 도조[陶祖] 축제[祝祭]가 열리고, 도산 신사에는 이삼평을 끌고 온 사가 번주 나베시마 나오시게와 끌려온 이삼평[李參平]을 함께 기릴 정도다. 도조 이삼평의 예술혼은 15, 16세기를 풍미했던 계룡산[鷄龍山]의 철화분청사기[ 강진·부안의 고려청자[ 우리나라 도자기[陶瓷器]의 3대 본산[本山]이다. 하지만 사람들에게 알려져 있지 않다. 정부와 지방자치의 노력[努力]도 미약하다.
‘뫼흔 길고 길고 물은 멀고 멀고 / 어버이 그린 뜻은 많고 많고 하고 하고/ 어디서 외기러기는 울고 울고 가느니.’
고산 윤선도(1587~1671)가 이 시조를 지은 것은 1616년, 29세 때였다. 함경도 경원에 유배되었을 때의 작품[作品]이다. 산과 물은 끝없이 이어져 있고, 부모님에 대한 그리움은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유배지[流配地]에서의 회한과 효심[孝心]이 절절하다.
엄청난 일이 벌어진다. 조선 출신 도공 이삼평이 아리타(有田) 지방의 이즈미야마(泉山)에서 양질의 고령토를 발견해 일본 최초의 백자를 구워낸 것이다. 지난 주말 사가현 기차 여행길에 아리타역에 내렸을 때 처음 마주친 것은 ‘2016년은 일본 자기산업 40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라는 플래카드였다. 우리 아리타 주민의 은인입니다!”라고 외쳤다. 기분이 묘했다. 그 밝고 친절한 표정에 대고 ‘이삼평이 사실은 당신네 선조들이 납치해간 거 아니냐’는 말을 꺼내기는 어려웠다.
임진왜란·정유재란은 ‘도자기 전쟁’이라 불릴 정도로 일본군 측이 수많은 조선 도공을 다투어 끌고 간 전쟁[戰爭]이었다. 그들이 도자기 문화[文化]를 일본에 전파[電波]했고, 유럽에 일본 도자기 붐을 일으키는 선구자 역할[役割]을 했다.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일본편』의 덕을 톡톡히 보았다. 책을 미리 읽었기에 이즈미야마의 거대한 자석장(磁石場) 터와 도조(陶祖) 이삼평 기념비, 이삼평을 신으로 모시고 있는 도산신사(陶山神社) 등을 흥미[興味]롭게 둘러볼 수 있었다.
도산신사 경내에서 도판에 새겨진 마쓰오 바쇼(1644~94)의 하이쿠(俳句) 작품을 보게 된 것도 유 교수의 책 덕분이었다. ‘구름 따라서 / 사람을 쉬게 하는 / 달맞이런가’. 모신 장소라면, 바쇼의 담담한 하이쿠보다는 부모에 대한 진한 그리움을 담은 윤선도[尹善道]의 시조가 어울리지 않을까 싶었다.
시조를 지은 해와 이삼평이 향수[香水]를 억누르며 오랜 세월 헤매다 자석광을 발견[發見]한 해가 맞아떨어지기도 하니까. 한편으로 답답함이 밀려왔다.
왜란 때 일본에 끌려가지 않은 도공이 조선 땅에 훨씬 많이 있었을 텐데, 왜 조선의 도자기 산업은 더 발전하지 못하고 세계적인 명성[名聲]을 얻지도 못했는지, 후손[後孫]에 제대로 전수[傳受]되지도 못했는지… 조상들이 원망[怨望]스러운 생각도 들었다.
정부나 지방자치의 노력[努力]도 미약하며 사람들에게 알려져 있지 않고, 일본[日本]우리것을 2016년 400주년 축제 준비에 분주하다는데, 계룡산 길가에 뒹구는 도편은 우리 정부의 기능공[技能工] 양성[養成]의
당시 조선[朝鮮]에 남은 수많은 도공 중 우리가 기억[記憶]하는 이가 과연[果然] 한 명이라도 있는가? 우리의 것을 지키지 못하는 것이 아쉽다.
통일신라[統一新羅]시대 석굴암 건축주인 김대성[金大城]은 매일 절을 드리며 온갖 정성을 쏟아 천 년을 넘게 버틴 천하 명품을 만들은 석굴암[石窟庵]과 600년의 숭례문[崇禮門]을 21세기를 사는 우리는 왜 복원, 관리도 못하는지?
일본의 가나자와(金澤)성도 가문의 명예를 걸고 공사를 마무리 하기 위해 가문의 문장을 쓰게하여 만일 부실, 졸속공사가 발견되면 해당 책임자는 할복으로 책임[責任]을 지는 것이 원칙[原則]이었다니, 섬뜩하지만, 관리 행정에서도 목숨과 바꿀 정도 치열한 장인[丈人]정신을 요구한 셈… 현재 우리나라 장인[丈人]의 값어치가 고작 130만 원 이라니 어느누가 장인을 이어 받으려 하겠는가? 2015년 11월 23일 석암 조 헌섭 |
.
|
'역사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소크라테스의 철학 정신 BC 470경 ~BC 399년 (0) | 2014.02.15 |
---|---|
일신당 이천경(李天慶)(1538∼1610) (0) | 2014.01.13 |
우암 송시열(尤庵 宋時烈)1607-1689년 83세. (0) | 2013.11.24 |
'한국 자유·독립조항' 루스벨트가 주연 (0) | 2013.11.17 |
래암 정인홍(來庵 鄭仁弘) 선생 일대기 (1) | 2013.10.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