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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이야기

도공 이삼평[陶工 李參平]

by 석암 조헌섭. 2013. 12.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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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 2015, 11, 23.

발췌=김희룡 기자

 

도공 이삼평 [陶工 李參平] 

 

일본 도자기의 원조는 정유재란(1598년)때 일본으로 끌려간 조선

도공(陶工) 40여명(원래 80여명이 끌려갔으나 도중 상당수가 사망함)이다.

이 가운데 이삼평과 심수관(1대는 심당길)이 일본에서 가장 유명하다.

충남 공주 출신인 이삼평[李參平]은 일본에서 고령토를 발견해 일본백자를 만든
최초의 인물로, 그를 기린 신사(神祀)가 남일본 지역인

 큐슈 사가현에 있다.

 사가현 아리타 지역은 일본 도자기의 산실로 육성[育成]돼 있다.

 

그는 1616년 아리타 동부의 이즈미산에서 자기의 원료 백자광을

 찾아내고 마침내 백자를 구워내는 데 성공[成功]했다.

 이로써 일본 자기의 역사가 시작되었고 오늘날까지 이삼평[李參平]은

 일본의 '도조[陶祖]'로 받들어지고 있다.

 

 매년 5월 4일에는 도조[陶祖] 축제[祝祭]가 열리고,

 도산 신사에는 이삼평을 끌고 온 사가 번주 나베시마 나오시게와

 끌려온 이삼평[李參平]을 함께 기릴 정도다.

도조 이삼평의 예술혼은 15, 16세기를 풍미했던 계룡산[鷄龍山]의

 철화분청사기[]가 바탕이다.

 

강진·부안의 고려청자[/], 여주·이천 등지의 백자와 함께

 우리나라 도자기[陶瓷器]의 3대 본산[本山]이다.

 하지만 사람들에게 알려져 있지 않다. 정부와 지방자치의 노력[努力]도

 미약하다.

 

 

‘뫼흔 길고 길고 물은 멀고 멀고 /

어버이 그린 뜻은 많고 많고 하고 하고/

어디서 외기러기는 울고 울고 가느니.’

 

고산 윤선도(1587~1671)가 이 시조를 지은 것은 1616년, 29세 때였다.

 함경도 경원에 유배되었을 때의 작품[作品]이다.

 산과 물은 끝없이 이어져 있고, 부모님에 대한 그리움은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유배지[流配地]에서의 회한과 효심[孝心]이 절절하다.


같은 시기, 눈을 일본으로 돌려보면 1616년 규슈 북쪽 사가(佐賀)현에서

 엄청난 일이 벌어진다. 조선 출신 도공 이삼평이 아리타(有田) 지방의

 이즈미야마(泉山)에서 양질의 고령토를 발견해 일본 최초의 백자를

구워낸 것이다. 지난 주말 사가현 기차 여행길에

 아리타역에 내렸을 때 처음 마주친 것은 ‘2016년은 일본 자기산업

 40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라는 플래카드였다.

 아리타역의 관광안내원은 내가 한국인이라 하자 대뜸 “이삼평 선생은

 우리 아리타 주민의 은인입니다!”라고 외쳤다. 기분이 묘했다.

 그 밝고 친절한 표정에 대고

‘이삼평이 사실은 당신네 선조들이 납치해간 거 아니냐’는 말을

 꺼내기는 어려웠다.

 

 임진왜란·정유재란은 ‘도자기 전쟁’이라 불릴 정도로 일본군 측이

 수많은 조선 도공을 다투어 끌고 간 전쟁[戰爭]이었다.

그들이 도자기 문화[文化]를 일본에 전파[電波]했고,

유럽에 일본 도자기 붐을 일으키는 선구자 역할[役割]을 했다.

나는 아리타 여행길에 가져간 유홍준 명지대 교수의 저서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일본편』의 덕을 톡톡히 보았다. 책을 미리

 읽었기에 이즈미야마의 거대한 자석장(磁石場) 터와 도조(陶祖) 이삼평

 기념비, 이삼평을 신으로 모시고 있는 도산신사(陶山神社) 등을

 흥미[興味]롭게 둘러볼 수 있었다.

 

 도산신사 경내에서 도판에 새겨진 마쓰오 바쇼(1644~94)의

 하이쿠(俳句) 작품을 보게 된 것도 유 교수의 책 덕분이었다.

 ‘구름 따라서 / 사람을 쉬게 하는 / 달맞이런가’.

 그러나 적어도 이삼평 기념비 바로 아래 위치하고 이삼평을 신으로

 모신 장소라면, 바쇼의 담담한 하이쿠보다는 부모에 대한 진한

 그리움을 담은 윤선도[尹善道]의 시조가 어울리지 않을까 싶었다.

 

 시조를 지은 해와 이삼평이 향수[香水]를 억누르며 오랜 세월 헤매다

 자석광을 발견[發見]한 해가 맞아떨어지기도 하니까.

 한편으로 답답함이 밀려왔다.

 

왜란 때 일본에 끌려가지 않은 도공이 조선 땅에 훨씬 많이 있었을 텐데,

 왜 조선의 도자기 산업은 더 발전하지 못하고 세계적인 명성[名聲]을

 얻지도 못했는지, 후손[後孫]에 제대로 전수[傳受]되지도 못했는지…

 조상들이 원망[怨望]스러운 생각도 들었다.

 

정부나 지방자치의 노력[努力]도 미약하며 사람들에게 알려져 있지 않고,

 일본[日本]우리것을 2016년 400주년 축제 준비에 분주하다는데,

계룡산 길가에 뒹구는 도편은 우리 정부의 기능공[技能工] 양성[養成]의
무심함을 비웃는 듯하여 씁쓸하다.

 

 당시 조선[朝鮮]에 남은 수많은 도공 중 우리가 기억[記憶]하는 이가

과연[果然] 한 명이라도 있는가? 우리의 것을 지키지 못하는 것이

 아쉽다.

 

통일신라[統一新羅]시대 석굴암 건축주인   김대성[金大城]은 매일 절을

 드리며 온갖 정성을 쏟아 천 년을 넘게 버틴 천하 명품을 만들은

 석굴암[石窟庵]과 600년의 숭례문[崇禮門]을 21세기를 사는 우리는 왜 

  복원, 관리도 못하는지?

 

일본의 가나자와(金澤)성도 가문의 명예를 걸고 공사를 마무리 하기 위해

 가문의 문장을 쓰게하여 만일 부실, 졸속공사가 발견되면 해당 책임자는

 할복으로 책임[責任]을 지는 것이 원칙[原則]이었다니,  

섬뜩하지만,

관리 행정에서도 목숨과 바꿀 정도 치열한 장인[丈人]정신을 요구한 셈…
“장인 정신[精神]과 기술은 다듬으면 다듬을수록 더욱 빛이 나는 법”  

 현재 우리나라 장인[丈人]의 값어치가 고작 130만 원 이라니 어느누가

 장인을 이어 받으려 하겠는가? 

2015년 11월 23일

석암 조 헌섭

.

‘이삼평 가마’[커버스토리]

 200년간 맥 끊기고 외면당하고 …서글프구나

 입력 2015-11-27 00:02:00
수정 2015-11-27 10:0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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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라쓰 히젠 나고야성에서 바라본 현해탄. 이 성에서 왜군 12만 명이 조선을 향해

출격했다. 임진왜란 당 이 일대에 10만여 명이 살았다고 한다.

이번 규슈(九州) 여행은 여행이라기보다 답사(踏査)에 가까웠다. 규슈에 간 조선

 도자의 현장을 돌아보는 여행은, 결국 복잡하게 얽힌 한일 두 나라의 역사를

파헤치는 일이었다.


도자를 들여다볼수록 역사가 보였고, 사람이 보였다. 혹여 민감할 수도 있는 대목을 캐묻는 한국인 기자 앞에서 일본인은 한 번도 싫은 표정을 짓지 않았다.

신흥 도자기 명소 - 하사미
규슈의 조선 도자기를 둘러보기 전에 먼저 알아야 할 게 있다. 도자기,

일본어로 야키(燒き)의 정확한 뜻이다. 도자기는 도기(陶器)와 자기(磁器)를 합친

 말이다. 둘을 쉽게 구분하는 방법이 있다. 도기는 흙을 빚어 구운 그릇이다.

 하여 토기와 제작 원리가 같다(토기가 훨씬 원시적이다). 반면에 자기의 원료는

 흙이 아니라 돌이다. 돌을 으깬 뒤 물과 함께 반죽을 해 그릇을 빚는다.


하사미(波佐見)를 먼저 들렀다. 인구 1만5000여 명의 이 작은 마을이 현재 일본

 식기의 15%를 생산한다. “가격이 부담이 없는데다 디자인이 세련됐기 때문”이라는 게 잇신(一眞)가마 마사키 젠타(眞崎善太·57) 대표의 설명이다. 잇신 가마는 1925년 시작한 하사미 야키의 신흥 강자다.


하사미도 자기의 고장이다. 자기 가마만 150개에 이른다. 역사도 깊다.

 1598년 조선 도공 이우경이 가마를 들였다는 기록이 전해온다.

 22m 길이의 일본 최대 가마는 현재 복원 중이라고 했다. 그러나 하사미 야키는

 최근까지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 이유가 있다. 하사미에서 자동차로 10분 거리에

 아리타(有田)가 있고, 40분 거리에 항구도시 이마리(伊万里)가 있다.

 

 하사미 야키는 아리타·이마리 야키와 섞여 이마리항에서 배에 실려 일본은

 물론이고, 전 세계로 팔려나갔다. 하사미 야키는 때로 아리타 야키로, 또 때로

 이마리 야키로 불렸다. 우리에게도 유사한 사례가 있다. 영덕대게가 그러하고,

 춘양목이 그러하다.

하사미에서 인상적인 곳은 니시노하라(西の原) 공방이었다.

 옛 도자공장 터에 카페·갤러리·공방 10여 곳이 모여 있었다.

 아기자기하게 꾸며놓은 모양은 규슈의 온천 명소 유후인(由布院)이 연상됐다.

 도쿄(東京)에서도 찾아오는 사람이 있으니, 이내 한국에서도 인기를 끌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사미에서 도자기는 매력적인 관광자원이었다. 
도자 신의 슬픈 얼굴 - 아리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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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자로 빚은 이삼평 조각상 앞에서 14대 손이 환히 웃고 있다. 영락없는 한국인의 얼굴이다.

일본의 도자 역사가 임진왜란 때 끌려간 조선인에 의해 시작됐다고 하지만,

 임진왜란 이전에도 일본 토기는 있었다. 조선인이 일본에 전파한 기술은 자기에

 관한 것이 대부분이었다.

 

도기는 보통 1000도에서 굽지만, 자기는 1300도 이상에서 굽는다.

 그 300도의 차이를 당시의 일본인은 극복하지 못했다. 난제는 하나 더 있었다.

 일본인은 자기의 원료로 쓰이는 돌을 가름하는 눈이 없었다. 자기를 빚으려면 질

 좋은 고령토(백토) 원석을 알아볼 수 있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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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타 오카와치야마에 있는 도공무연고탑. 조선 도공 800여 명을 기린 비석이 탑처럼 쌓여 있다.

 

일본 자기의 시조, 아니 도자의 신으로 떠받들어지는 이삼평(?∼1655)의 최대

 업적이 바로 우수한 고령토 광산을 발견한 것이다. 그 광산이 있는 마을이

 아리타다. 이삼평은 원석을 찾아 몇 년을 헤매다, 1616년쯤 아리타의 이즈미야마(泉山)에서 고령토 광산을 찾아냈다. 그 현장이 일본 국가사적으로 지정돼

 보전되고 있다.


놀라운 풍경이었다. 거대한 산 하나가 통째로 파헤쳐져 있었다. 400년 세월 만에

 산 하나가 사라진 것이었다. 그 현장에서 이삼평의 14대 손을 만났다. 명함에 ‘14대 가네가에 산페이(金ヶ江三兵衛)’라고 적혀 있었다. 가네가에 산페이는 이삼평이

 일본에서 받은 이름이다. 그 이름을 후손이 대물림하고 있었다.

 14대 이삼평은 영락없는 한국인 아저씨의 인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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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천황에 바치는 명품 자기 가마 가키에몬의 공방. 모든 작업이 분업화돼 있다.

일본에서 이삼평은 신과 같은 존재였다. 광산을 지키는 신사가 있고, 초대 이삼평을 모시는 신사가 따로 있었다. 그러나 마냥 유쾌하지만은 않았다.

 

이삼평 가마는 200년 동안 맥이 끊겼다가 지난 71년 13대 이삼평에 의해 다시

 열렸다. 전통이 단절된 이삼평 가마는 현재 일본 도자 시장에서 외면당하는

 형편이다. 일본 황실에 바치는 가마로 유명한 가키에몬 가문의 공방을 들렀을

 때는, 그 화려한 색깔과 엄청난 가격 앞에서 열패감마저 일었다.
생(生)과 사(死) - 이마리와 가카라지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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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카라지마 해안에 있는 백제 무령왕 탄생지.

이마리에서는 오카와치야마(大川內山)를 방문했다. 이름이 의미심장하다.

 산 안의 큰 강이라. 실제로 오카와치야마는 이름처럼 생겼다. 마을 앞으로 개천이 흐르고, 가마와 도자 매장 가득한 마을 뒤로 겹겹이 산이 서 있다.
조선에서 이삼평을 끌고 왔던 인물이 나베시마 나오시게(鍋島直茂·1536∼1618)다.

 

그는 조선 도공들을 이 외진 산중으로 데려와 외부와 접촉을 일절 차단한 채

 도자기만 빚게 했다. 여기에서 생산한 도자기는 모두 일본 황실에 갖다 바쳤다.

 그래서 이 마을의 별칭이 비요(秘窯)의 마을, 즉 비밀 가마가 있는 마을이다.

 현재 오카와치야마에는 30개가 넘는 가마가 있고, 나베시마는 세계적인 도자

 브랜드가 됐다.


오카와치야마에 가면 꼭 들러야 할 곳이 있다. 마을 왼쪽 산기슭에 공동묘지가

 있는데, 여기에 조선 도공 800여 명을 모신 ‘도공무연고탑’이 있다.

 마을 여기저기에 버려진 조선 도공의 무덤이 안쓰러워, 1939년 주민들이 비석을

 한데 모아 탑을 쌓았다고 한다.


여정은 동떨어졌지만, (唐津) 앞바다의 가카라지마(加唐島)를 여기서 소개한다.

 가라쓰 요부코(呼子)항에서 배로 20분 거리인 가카라지마는

 백제 무령왕(462∼523)이 태어난 장소로 전해진다.

 섬 서쪽 해안의 오비야우라(オビヤ浦)라는 작은 동굴에서 무령왕이 태어났단다.

 섬 토박이 후쿠모토 히데키(福本英樹·65)는 “어렸을 때 여기에서 한국의 높은

 사람이 태어났다는 얘기를 들었다”고 기억했다.

 

 무령왕의 일본 탄생설화는 일본 최초의 역사서 『일본서기』에 등장한다.

 전설인 줄만 알았는데, 충남 공주 무령왕릉을 발굴한 뒤로 역사적 사실에 한발

 다가섰다. 무령왕의 관이 일본에서만 나는 금송으로 돼 있었던 것이다.

가카라지마는 이번 여행에서 유일하게 조우한 생(生)의 흔적이었다.
역사는 돌고 돈다 - 가라쓰 히젠 나고야성  

히젠 나고야(肥前名護屋)성은 우리 민족에게 치욕의 현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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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라쓰 나고야성 박물관에 전시된 거북선 모형.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1536∼98)가 조선을 침략하기 위해 세운 전진기지다. 성 안 면적만 약 1.65㎢(50만 평)이고, 성곽 둘레는 6㎞에 달한다. 한때 성 안팎에

 10만 명 이상이 살았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은 폐허다. 히데요시에 이어 패권을 잡은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1543∼1616)가 성을 완전히 파괴했다.

 혹시나 모를 히데요시 세력의 재결집을 차단하기 위해서였다. 그 후로 성은

 400년이 넘도록 내버려졌다. 그 성터를 규슈올레 가라쓰 코스가 관통한다.

성터 곳곳에 규슈올레 이정표 ‘간세’가 놓여 있다. 규슈올레에 쓰이는 간세는

 제주올레와 똑같이 생겼다. ㈔제주올레에서 제작해 규슈에 보낸다. 굴욕의 장소에 놓인 제주올레의 상징은 묘한 기분을 불러 일으켰다.


히젠 나고야성 정문 앞에 박물관이 있다. 침탈의 현장 앞에 들어선 박물관은

 놀랍게도 평화를 말한다. 박물관 입구에 돌하르방이 서 있고, 안에 들어서면

 천하대장군과 지하여장군이 서 있다. 장승 건너편에는 일본어 ‘키즈나(絆)’ 자와

 한국어 ‘정’ 자가 나란히 걸려 있다. 언어는 다르지만 뜻은 같다.

 전시실 어귀에 버티고 서 있는 건 거북선이다. 한국에서 만들어 보냈다고 한다.

 더욱 놀라운 건, 일제강점기를 설명한 한글 안내문이다.


‘조선반도의 사람들은 삼일운동 등 대규모의 독립운동을 전개하고 격렬하게

 저항했다. 일본은 이를 철저히 탄압하고 황민화 정책과 강제연행 등을 실시했다.

 36년에 걸친 일본의 식민지 지배는 조선 반도의 사람들에게 깊은 상처를 남겼다.’
역사교과서 국정화 논란으로 시끄러운 참에 일본이 스스로 평가한 일제강점기는

 신선했다. 취재에 동행한 가라쓰시 공무원이 귀띔했다. “일부 우익 세력이 박물관에 항의하러 오기도 해요.” 역사는 진정 누구의 것도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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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정보= 취재기간에 경험한 료칸(旅館)을 소개한다. 우선 가라쓰의 요요카쿠(사진). 126년 역사의 전통 료칸이다.

 

오코우치 아키히코(81)·오코우치 하루미(71) 부부가 운영하는데,

 부부 모두 한국어를 구사한다. 김용옥·박유천 등 한국 유명인도 여럿 방문했다.

 천연 온천이 아니지만 음식이 유명하다. 식기부터 다기까지 가라쓰 야키의 거장

 나카자토 다카시(中里隆·78) 부자의 작품을 사용한다.

 

 객실 1인 1만8360엔(약 17만원)부터. 다케오(武雄)시의 도요칸(東洋館)은 전설의 검객 미야모토 무사시(1582~1645)가 묵었다는 료칸이다. 도요칸은 아리타 야키를 쓴다. 객실 1인 1만6350엔(약 15만원)부터. 가라쓰 요부코항에서 가카라지마로

 가는 여객선은 하루 4번 뜬다. 어른 왕복 970엔(약 9000원). 요부코항은 오징어

 활어회가 유명하다. 1인분 2860엔(약 2만7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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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기사] │ 일본 규슈에 간 조선 도자기 [커버스토리] 파헤친 광산에 조선 도공 400년 숨결이…

2015년 11월 27일 

글·사진=손민호 기자 ploveson@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