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화합 1
744년 초여름 당나라 낙양에서 이태백(44세)과 두보(33)가 만난다,
함께 노닐며 술잔을 주고받았고 작품을 주고받아 문학을 논했다.
한 번 만남으로 아쉬워 둘은 이듬해 가을 노군에서 또다시 만난다.
시선(詩仙) 이백(李白)과 시성(詩聖) 두보(杜甫)는 태양과 달이 만나듯,
전혀 다른 시상을 가지고 있지만, 서로의 작품을 존중하고 인정해 주는 마음이
있었다는 증거다.
이백(李白)은 낭만주의의 계보를 잇는 시를 많이 썼으며
두보(杜甫)는 냉철한 눈을 통해 비쳐진 사실주의의 시를 많이 썼다.
이백과 두보는 나이를 초월해서 우정을 나눈 사이다. 이백은 두보보다 11살
많았다.
두 사람이 친분을 맺은 시기는 742년에서 744년 사이로 미관 말직이던 이백의
울분과 두보의 가난한 한스러움이 맺혀있던 시기다.
두 사람의 역사적인 만남은 나라에서 추방된 이백이 제나라, 노나라, 송나라
일대를 유랑하던 시기에 두보 역시 과거 낙방 후 8, 9년동안 제나라와
노나라를 유랑하던 중 우연히 이백과 조우하게 된다.
이백은 타고난 자유분방함과 아름다움에 대한 뛰어난 감각으로 인간의 기쁨을
드높이 기쁨을 노래했다면, 두보는 인간의 고뇌에 깊이 침잠하여 안록산의 난
이라는 시대적 아픔을 깊은 울림으로 노래했다.
이태백은 정치에 뜻을 두고 관직을 얻어 포부를 펼치기위해 노력 했으며 그의
시는 하늘 나라에서 귀양 온 신선의 작품이라고 평했다.
이로서 이태백은 이적선이란 별명은 이렇게 얻게 되었다.
적선(謫仙)의 적(謫)은 귀양, 선은 신선(神仙)의 뜻으로 즉 하늘나라에서 쫓겨난
신선이라고 하였다.
두보의 시가는 대부분 안사의 난 때 백성들이 고통받는 모습을 쓴 것들이다.
풍부한 문장력과 현실을 꿰뚫는 그의 시는 후세에 역사,즉 시사(詩史)라는
이름으로 널리 추앙받았다.
두보의 시에 담겨있는 기쁨과 슬픔은 바로 당시 백성들의 기쁨과 쓸픔이엇던
것이다.
성인과 신선의 차이는 백성을 제도할 뜻이 있느냐, 없느냐에 달려있다.
그들이 인간으로서 완벽한 경지에 다다른 점에서는 차이가 없다.
하지만 성인은 백성의 안위를 근심하고 신선은 자신의 자족함에 머문다고 했다.
따라서 성인은 늘 세간에 머물고 신선은 자신만의 고요한 곳에 머문다.
성인과 신선은 각자의 길이 다르지만 지향하는 바가 같아 오늘날 우리가
본받아야 할 참으로 위대한 화합이 아니겠는가?
이태백은 시를 통해 혼자 술 마시고 선경을 노래했지만,
두보는 시를 통해 세상을 걱정하고 도탄에 빠진 백성의 처지에 한숨 쉬었다.
그러나 두 사람은 비록 성격은 달랐지만 지향하는 바가 같아 극진한
벗으로 지낸 것은 참으로 오늘날 본받을 만한 만남이 아니겠는가…
위대한 화합 2
기원전 518년 34세인 공자가 53세인 노자를 만나러 노자의 고향 하남 녹읍에
찾아가 공자는 열 아홉 연장자 노자에 예를 올리며 배움을 청했고 노자는 반가워 ‘송하량액’이라는 좋은 술을 내어 그를 환대했다.
이것이 바로 기원전 518년의 일이다.
이렇게 두 사상가는 시대만 함께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만나 교분을 나누는 성대한 만남을 이루었다. 까마득한 세월,
위대한 도가 사상의 노자와 유가 사상의 공자 근본부터 다르지만,
두 번이나 그를 찾아가 술잔을 기울이며 세상사를 논의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역사를 바꾸는 성대한 미팅이 아닌가?
정말로 성인다운 큰 그릇이 아닌감?
철학의 꽃이 피었던 춘추전국시대는 정치적으로 가장 핵심적인 역사적 시대이다.
정치적으로 혼란스러우면서도 사상적으로는 자유로운 시대에 살았던 두 성인의
만남은 사색 당으로 나뉘어 서로 헐뜯고 투기질하는 현 세태에 참으로 배워야 할 청량제 같은 고대 통신이다.
가장 긴 정치적 혼란기에 살면서도 풍부한 경험을 바탕으로 한 다양하고 풍요로운
삶의 철학이 오늘날의 생활의 지표가 되지 않는가?
지배계층의 통치이념으로 자리 잡은 공자의 유가사상과 잡초와 같은 민중철학으로
자리 잡은 도가 사상이 양존하는 시대,
즉 예에 관해서도 공자는 보여주기 위한 것, 드러나는 것을 중시하여 덕으로 보고,
노자는 보여주어서는 안 될것, 드러나지 않는 것을 도로 보고 중시하였다.
이것이 결정적 차이점이다.
그러나 근본적으로는 도와 덕은 같다고 보았다.
다만, 덕은 보이는 쪽에 있고, 도는 보이지 않는 쪽에 있다는 것이다.
보이지 않는 도가 보이는 쪽으로 가면 득이 되고,
보이는 덕이 보이지 않는 쪽으로 가면 도가 된다는 것이다.
이점이 노자와 공자가 근본적으로 같다고 생각한 것이다.
오늘날 진정으로 배워야 할 참으로 위대한 화합이 아닌감?
우리의 가정이나 사회도 각자의 사고가 다르겠지만, 이백과 두보,노자와 공자,
성인과 신선
처럼 완벽한 사회와 가정을 이루었으면…
2013년 12월 9일 조헌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