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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이야기131

예곡 곽율 (禮谷 郭𧺝, 1531년 ~ 1593년) 예곡 곽율 (禮谷 郭𧺝, 1531년 ~ 1593년)   임란 창의(倡義)의 고장 합천에서 '지릿재'를 넘어서면 경북 고령 쌍림면이다. 지금은 행정구역상 경상북도 땅이지만 예전엔 합천과 마찬가지로 창의의 고장이며, 경상우도 유맥을 이어온 고장이다. 경북 땅을 들어서 조금만 가면 길가에 '점필재 김종직선생 종가'가 보인다. 점필재 종가를 뒤로하고,  남명의 문인이며 임란 창의 인물인 예곡(禮谷) 곽율의 행적을 알기 위해 종택을 찾아갔다. 고령 가는 길목 '월막리(月幕里)' 라는 마을에 예곡 종택이 있었다. 현재 13대 종손 은열(殷烈)씨가 종택을 지키고 있는데, 후손들은 예곡이 세상을 떠난 후 이곳에 이주하여 지금까지 400여년을 살아왔으며, 종택 옆에 모례정(慕禮亭)을 세워 조상의 은덕을 기리고 있다.모.. 2024. 9. 1.
★단성소(丹城疎) 와 민암부(民巖賦)★ 〃남명 조식(南冥 曺植) 선생〃★단성소(丹城疎) 와 민암부(民巖賦)★단성소(단성현감 사직소  을묘사직소)● “나라의 기틀은 무너졌고 민심(民心)이 떠난 지 오래입니다.     높은 벼슬아치는 오직 재물(財物)에만 탐(貪)하여 물고기의 배가 썩어     들어가는데도 이를 바로 잡으려 하지 않습니다.“   대왕대비는 세상 물정 모르는 바깥소식이 막힌 깊은 궁궐 안의 한 과부(寡婦)에   지나지 않고 전하는 선왕(先王)의 어린 아들에 불과할 뿐이니 천 갈래, 만 갈래   흩어진 민심을 어떻게 수습(收拾)할 수가 있겠습니까?   나라의 형편(形便)을 바로 잡는 길은 여러 가지 법령에 있지 않고 오직 전하께서    크게 한 번 마음 먹기에 달린 것입니다. 라는 것이 상소문(上疏文)의 요지이다.”● “전하의 국사(.. 2024. 8. 18.
어우동(於于同). “ 어우동(於宇同)   ” 본명은 박어우동(朴於宇同) 아버지는 승문원 지사 박윤창(朴允昌) 어머니는 정귀덕(鄭貴德).  오빠 박성근(朴成根)이었다. 조선시대 당시 금기에 가까운 간통 사건을 일으켰기에 가문에서 파문되어  성을 뺀 어우동(於宇同)이란 이름으로 기록되었다.  양반 집안에서 태어나 곱게 자란 뒤 왕손인 종실 태강수(泰康守) 이강과  혼인(婚姻)하였으나 태강수 이강은 아내를 좋아하지 않았다. 타고난 미색은 있었으나 시집간 지 얼마 안 되어 방사(房事)에 미흡했기 때문이었다.  결국 이강은 이혼할 속셈으로 아내 어우동이 집에 온 은장이와  바람이 났다고 모함했는데 조사 결과 무고로 밝혀져서 어우동과 재결합하라는 명을 받았으나 이를 실행(房事)치 않고 오히려 어우동을 내쫓았다.  황당하게 소박(疏薄.. 2024. 6. 21.
곽재우와 의병의 날 “ 곽재우와 의병의 날 ”  지난 이명박 정부는 6월 1일을 의병의 날로 지정(指定)하였다.  1592년 음력으로 4월 14일은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난 날이다. 망우당 곽재우(忘憂堂 郭再祐)가 의병을 일으킨 날은 1주일 뒤쯤인 음력 4월 22일이다. 정부가 정한 날짜는 의병(義兵)을 일으킨 그날을 양력(陽力)으로 환산한 것이다. 십여 명의 집안 젊은이부터 규합(糾合)하여 시작되었다. 6월은 현충일도 있고 6.25도 있다. 그런즉 6월은 호국보훈(護國報勳)의 달이다. 공교롭게도 이달은 제22대 국회의원 개원한 달이다. 나름대로 지역을 위해 팔을 걷어  부치겠다고 나선 의원들을 보면서 의병의 날 선포(宣布)와 그 역사적 의미를 새겨 본다. 의병(義兵)은 문자 그대로 의병이다. 의기로 일어난 민병(民兵).. 2024. 6. 5.
“황진이(黃眞伊 1506년?~1567년?) ” “황진이(黃眞伊 1506년?~1567년?) ”황진이는 중종 때 개성 황진사(黃進士)의 서녀(庶女)로 태어났다고도 하고,  맹인의 딸이었다고도 전하는데, 생부에 대해서는 전해지지 않는다.  황진이가 기생이 된 동기는 15세경에 이웃 총각이 혼자 황진이를 연모하다  병으로 죽자 서둘러서 기계(妓界)에 투신하였다고 한다.   황진이(黃眞伊)는 조선 중기의 시인, 기녀, 작가, 서예가, 음악가, 무희이다.  이름은 진랑(眞娘)이고 기생 이름은 명월(明月)이었다.   용모가 출중하며 뛰어난 총명과 민감한 예술적 재능을 갖추어 그에 대한  일화가 많이 전하고 있다.   당대의 석학 서경덕(徐敬德)을 유혹하려 하였으나 실패한 뒤 사제관계를  맺었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사숙(私淑)하여 거문고와 주효(酒肴)를 가지고.. 2024. 6. 4.
“ 장희빈(張禧嬪1659년~1701년) ” “ 장희빈(張禧嬪1659년~1701년) ”장희빈(張禧嬪)은 조선의 제19대 왕 숙종의 빈(嬪)으로 제20대 왕  경종(景宗)의 어머니다.  숙종 임금보다는 2년 연상이었고, 본명은 장옥정(張玉貞) 본관은 인동(仁同)이다.  아버지는 역관(驛官) 출신인 장형(張炯)이며 어머니는 장형의 계실 윤씨였다.  조선 왕조 역사상 유일하게 궁녀 출신으로 왕비까지 오른 입지적인 여인이다.  희빈 장씨는 본래 소의(昭儀)의 신분에 있었다. 하지만 오랫동안 자식을 보지 못한 숙종의 총애를 받아  원자 균(훗날 경종)을 낳아 희빈으로 책봉되었다. 그리고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서인의 영수 송시열이 사사되고 남인이 집권하자  장희빈(張禧嬪)은 인현왕후(仁顯王后)를 폐출하고 왕비 자리까지 올랐다.  하지만 갑술환국(甲戌換局)으.. 2024. 6. 4.
“장녹수(張綠水)” “장녹수(張綠水)”      장녹수(張綠水)는 본래 제안대군(齊安大君)의 여종이었지만   용모가 뛰어나고 가무에도 능해 연산군에게 총애를 받으면서   숙원(淑媛)에 봉해졌다.   외모 자체는 평범하여 그다지 미인이 아니었지만   몸매가 탁월하고 엄청난 동안(童顔)이라 서른이 넘은   나이에도 10대 소녀와 같은 얼굴이었다.  연산군이 원하는 것을 잘 알아 비위를 잘 맞추어 주었는데   연산군의 아명(兒名)을 부르며 데리고 놀았는데 때리고 꼬집고   조롱했다고 하니 어떤 식으로 아양을 떨고 비위를 맞추었는지   가히 짐작이 가지요 하지만 그가 왕(王)의 총애(寵愛)를 이용하여   국사에 간여하며 연산군(燕山君)의 실정(失政)을 부추기자   뒤이어 일어난 중종반정(中宗反正)으로 참형을 받았다.   그래서 화.. 2024. 6. 4.
최영경(崔永慶) 선생 최영경(崔永慶) 최영경(崔永慶, 1529∼1590)의 자는 효원(孝元)이고, 호는 수우당(守愚堂)이며, 본관은 화순(和順)으로 진주(晋州)에 거주하였다. 그는 1529년(중종24년) 7월 16일에 한양(漢陽)의 원동리(院洞里)에서 아버지 세준(世俊)과 어머니는 평해(平海) 손씨(孫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에 관한 자료는 [수우당실기(守愚堂實紀)]가 있다. 32세 때(1561년, 신유) 오건(吳健), 이조(李晁), 김우옹, 하항(河沆), 유종지(柳宗智) 등과 서로 강마하였고([桐谷實紀]), 33세 때 이로(李魯)가 아우 보(普)·지(旨)와 함께 문하에서 글을 읽었으며(松巖集), 35세 때(1564년, 갑자)에 남명선생의 명성을 듣고 서울로부터 동생 여경과 함께 선생을 찾아 뵙고 제자가 되었다. 36세 때.. 2024. 4. 15.
“고구려 건국 이야기” “고구려 건국 이야기” 잘 아는 얘기지만, 고구려 건국(建國) 이야기 간단하게 정리해 볼까 한다. 고구려 발상지인 압록강 중류 지역은 요동 지역이나 동해안으로 통하며, 남으로 대동강 유역의 평야 지대, 북으로 송화강 유역의 평원(平原)지대로 통할 수 있는 교통로(交通-路) 상의 중요지점이다. 고구려 최초의 발상지인 졸본 지역(오늘날의 중국 요녕성 환인)은 꽤 넓은 분지(盆地)를 이루고 있다. 이 지역의 기후는 중국 동북 지역에서 가장 온난(溫暖)하며 강수량(降水量)도 풍부(豊富)하여 사람이 살기에 적합한 곳이다. 고구려를 건국한 시조 동명성왕(東明聖王)의 출생 설화(說話)에는 탄생의 신비감과 주몽의 능력에 대해 잘 나와 있다. 동명성왕 주몽에 관한 설화는 "삼국사기", "삼국유사", "위서", 광개토대왕.. 2024. 2. 1.
“래암 정인홍(來庵 鄭仁弘)” “래암 정인홍(來庵 鄭仁弘)” 내암 정인홍(來庵 鄭仁弘 )선생 일대기 내암 정인홍(來庵 鄭仁弘 )은 조선 중종 때 합천 야로현 남사촌에서 증 영의정(贈 領議政) 윤(倫)의 아들로 태어나 광해군 때의 문신으로 대북의 영수이며 자는 덕원 호는 내암으로 가야 출신이다. '정내암연구논총(鄭來庵硏究論叢)'의 '내암연보(來庵年譜)', 서산(瑞山) 대동보(大同譜) 등 문중 기록은 가정(嘉靖) 병신생(丙申生.中宗 31년: 1536년)으로 되어 있으나 객관적 공식자료에 따르면 1535년생이라고 밝히고 있다. 즉 문중 기록은 1536년으로 되어 있고, '내암집해제'를 비롯한 자료들에는 1535년으로 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는 내암 사후 그에 대한 기록들이 온전할 리 없었으므로 생기는 일일 것이다. 내암의 자는 덕원(德遠).. 2024. 1. 12.
암행어사 정위도 암행어사(暗行御史) 정위도 과거에는 충신(忠臣)이나 효자 효녀를 높이 사는 것 못지않게 남편이 죽은 뒤에도 재혼(再婚)하지 않고 시부모를 모시며 자식을 키우면서 사는 여인들을 매우 훌륭한 인물로 여겼다. 때문에 나라 에서는 열녀문(烈女門)도 새워주고 상도 내렸다. 인조 7년 어느 한 고을에 지아비가 죽고 삼 년 동안 시묘살이하는 여인에게 열녀 상을 보내 주자고 하자 예조판서(禮曹判書) 정위도는 시묘살이했다고 모두다 열녀상을 주는 것은 반대했다. 정위도는 자신이 직접 경험한 터라 이유는 말하지 않고 무조건 반대(反對)했다. 강원도 어느 양반집에 태어난 그는 사춘기가 되자 이웃마을 고모 집에 갔다가 하인 옥섬이를 만남으로서 절세미인(絶世美人) 옥섬이 에게 반해 버렸다. 하루는 아무도 없는 빈집에 옥섬이만 있.. 2023. 8. 13.
백사 이항복(李恒福) 백사 이항복(李恒福)1556-1618년 이항복은 다섯 번이나 병조판서에 올랐으며 삼정승을 지낸 높은 벼슬을 누렸지만 백사(白沙) 이항복도 알고 보면 어린 시절 장난꾸러기였고 노는 일에만 급급한 골목대장이었고 그가 16살 때 어머니가 돌아가 그의 가족들은 큰 걱정이 앞섰다. 결혼할 나이가 되었는데도 허구한날 밖으로 나가 놀기만 하여 철없이 보이는 것이었다. 엄마 없는 건달인데도 백사에게 어느누가 딸을 주겠는가 하며 걱정하든 차 하루는 권율 장군의 아버지인 권철(權轍)이라는 정승이 중매쟁이를 대리고 그의 집을 찾았다. 백사가 비록 건달 생활을 하지만 건장한 청년 인데다 머리가 영리하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에 자신의 손주 사위를 삼기위해 직접 그를 만나러 온 것이다. 정승이 집을 찾아왔으니 가족들은 긴장하지 않.. 2023. 7. 22.
죽각 이광우(竹閣 李光友) 죽각 이광우(竹閣 李光友) 이광우(李光友, 1529∼1619)의 자는 화보(和甫)이고, 호는 죽각(竹閣)이며, 본관은 합천(陜川)으로 단성(丹城)에 거주하였다. 그는 1529년(기축) 단성 배양 마을에서 아버지 참봉(參奉) 잠(潛)과 어머니 성주 이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의 문집 (죽각집(竹閣集)이 있다. 10세 때(1538년) 백부 이원(李源)에게 {소학}을 배웠다. 이원은 남명·퇴계 선생과 동갑으로 도의로 교유했던 인물이다. 이광우는 (소학)을 읽으면서 '사람의 도리가 모두 이 책에 있구나'라고 하면서 부지런히 공부하여 학문의 기본으로 삼기도 하였다. 11세 때(1539년) 종형인 송당 이광곤과 함께 (효경)을 공부하였고, 14세 때(1542년) (중용)과 (대학)을 공부하였으며 18세 때(1546.. 2023. 6. 3.
한강 정구(寒岡 鄭逑)선생 한강 정구(寒岡 鄭逑)선생 한강 정구(寒岡 鄭逑, 1543∼1620)의 자는 도가(道可)이고, 호는 한강(寒岡)이며, 본관은 청주(淸州)로 성주(星州)에 거주하였다. 그는 1543년에 성주군(星州郡) 대가면(大家面) 칠봉동(七峯洞)에서 판서공 사중(思中)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문집은 {한강집(寒岡集)}이 있다. 7세 때(1549년, ) [논어]와 [대학]을 통달하여 신동이라는 칭찬을 받았으며, 손님 앞에서 자기의 포부와 기상은 요순과 같다는 기상천외의 대답을 하였고, 9세 때(1551년) 부친상을 당하자 성인처럼 집상(執喪)하여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10세 때(1552년, 임자) 학문에 뜻을 두고 발분독서(發憤讀書)하여 [대학(大學)], [논어(論語)]를 읽고 그 대의(大義)에 통하였다.. 2023. 4. 8.
탁계 전치원(濯溪 全致遠, 1527∼1596) 탁계 전치원 탁계 전치원(濯溪 全致遠, 1527∼1596) 전치원(全致遠)의 자는 사의(士毅)이고, 호는 탁계(濯溪)이며, 본관은 완산(完山)으로 초계(草溪)에 거주하였다. 1527년 초계군 도방리(지금의 합천군 쌍책면 하신리)에서 전인(全絪)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문집은 {탁계집(濯溪集)}이 있다 15세 때(1541년) 당시 재령(載寧) 군수로 있던 할아버지(永綏)를 따라가서 공부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할아버지는 손자의 자질이 호방한 것을 알고 무예를 가르치고자 했다. 16세 때(1542년) 재령에 머물면서 여름에 {소학}을 들고 이희안(李希顔)을 찾았는데, 이희안은 {소학} 책 배울 나이가 넘었다고 제자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로부터 전치원은 5일 동안 움직이지 않고 한 자리에 앉아 가르침을 청.. 2023. 3. 18.
덕계 오건德溪 吳健(1521-1574) 덕계 오건(德溪 吳健1521-1574) 오건(吳健, 1521∼1574)의 자(字)는 자강(子强)이고, 호(號)는 덕계(德溪)이며, 본관(本貫)은 함양(咸陽)이다. 그는 1521년) 4월 6일 경상남도 산음현(山陰縣) 석답리(石沓里)에서 오세기(吳世紀)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문집 및 저술은 [덕계집(德溪集)]과 [역년일기(歷年日記)]가 있다 오건(吳健)의 자(字)는 자강(子强)이고, 호(號)는 덕계(德溪)이며, 본관(本貫)은 함양(咸陽)이다. 그는 1521년) 4월 6일 경상남도 산음현(山陰縣) 석답리(石沓里)에서 오세기(吳世紀)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문집 및 저술은 [덕계집(德溪集)]과 [역년일기(歷年日記)]가 있다. 9세 때에는 양희(梁喜)와 만나 경서를 강론하였으며, [대학], [논어] 등.. 2023. 2. 22.
남명 조식(南冥 曺植) 선생의 일대기 수정 2023년 2,10일남명 조식(南冥 曺植) 선생의 일대기    위 사진을 클릭 크게 볼 수 있음남명선생숭모비       평시조   두류예찬     평시조         홍살문     남명 조식(南冥 曺植) 선생의 일대기조식 영정 사진 남명 조식 선생은 1501년 6월 26일합천 삼가에 태어나 성리학의 대가이며사림의 영수로서 한평생 갈고 닦아쌓아 올린 학문(學文)과 도덕(道德)인격(人格)과 사상(思想) 철학(哲學)정신을 후세에 전하기 위하여 많은영재들을 모아 가르쳤으며, 여기에서배운 학생들이 조선 시대의 문(文)과 무(武)와 정치(政治)와 학술계를주도하는 중심인물이 되었고, 남명 사후 20년인 1592년 4월 14일 임진왜란을 당하여 의령에서 왜적을 물리친 망우당 곽재우(忘憂堂 郭再祐)(조식 외손서).. 2023. 2. 10.
한원당 김 굉필 (寒暄堂 金宏弼 1454∼1504) 한원당 김 굉필 (寒暄堂 金宏弼 1454∼1504) 만추의 계절 가을 단풍의 끝자락 11월셋째 휴일 날 제가 좋아해 까끔 찾아가는 한원당 김굉필 (寒暄堂 金宏弼)을 모신 도동서원(道東書院) 과 사효굴을 다녀와 오랜만에 역사서(歷史書)를 써 본다. 대구 달성군 구지면 도동에 가면 낙동강변에 도동서원(道東書院)이 있다. 선생은 동방 오현 중의 한 분으로 조선조 유학사에 큰 획을 그은 분이다. 도동서원 앞 낙동강변 만추 풍경 400여 년된 도동서원 앞 은행나무 김굉필(金宏弼) 은 조선 전기의 문신(文臣)이자 학자이다. 본관은 서흥(瑞興). 자는 대유(大猷), 호는 사옹(簑翁)·한훤당(寒暄堂)이다. 그는 할아버지 이래 살아오던 한성부 정릉동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는 호방하고 거리낌이 없어, 저잣거리를 돌아다니면서.. 2022. 11. 20.
함벽루(涵碧樓) 조헌섭 2022년 10월 28일 수정 함 벽 루(涵碧樓) 함 벽 루(涵碧樓) 함벽루는 문화재자료 59호 고려 숙충왕 8년 1321년 김 아무개가 새움, 기문 6편은 1. 예조참판 학촌 안진과 2. 남이장군을 죽인 익대공신 사숙제 강희맹, 3. 82세 때 제주도로 귀양 갔다가 서울로 올라 오던 중 정읍에서 사약을 받아 항문을 막고 사약을 먹여 죽음을 당한 좌의정 송시열, 4. 호조참판 화천 이채, 5. 합천군수 조지항, 6. 춘산 이상학의 6편의 기문이 있고 누각에 시(詩) 를 남긴 사람은 철종 임금때 영의정을 지낸 심암 조두순, 명종 임금 때 영의정 추증을 받은 남명 조식, 대제학 의 벼슬에 오른 퇴계 이황, 조선의 개국공신 좌의정 송당 조준,과 영의정 부사 삼봉 정도전, 대원군때 을사조약에 반대하다가 .. 2022. 10. 28.
중국 9人의 지혜 중국 9人의 지혜 운(運)도 지지리 없는 놈이라고 하늘의 무심(無心)함을 탓하지 말라! 내가 수십년 간 낚시를 벗하며 때를 기다리는 동안 조강지처(糟糠之妻)마저 나를 버리고 도망가 버렸다. 검은 머리가 백발이 되고서야 문왕 서백을 만나 은나라 주왕(紂王)을 멸하고 주나라를 세웠다. 나는 숱한 세월(歲月)을 낚으며 늙은이가 되었지만 결코 하늘을 원망(怨望)하거나 포기(抛棄)하지 않았고 그 인내의 결실(結實)이었던 단 한 번의 기회(機會)로도 천하를 얻을 수 있었다. 용모(容貌)가 볼품없어서 되는 일이 없다고 푸념하지 말라! 나는 어렸을 때 보잘 것 없는 외모때문에 불량배의 가랑이 사이를 기어 다니는 치욕(恥辱)을 당했고, 빨래터 노파의 밥을 빌어먹기도 했다. 초패왕 항우는 나의 볼품없는 용모를 업신여겨 범.. 2022. 7. 7.
독대 독대 조광조(趙光祖)·김정(金淨) 등의 사림들이 화(禍)를 입은 기묘사화(己卯士禍)를 신무문(神武門)의 변(變)’이라고도 한다. 중종이 재위 14년(1519) 11월 신무문으로 남곤(南袞) 등을 불러 밀지(密旨)를 내린 것이 시작이기 때문이다. 다른 궐문의 열쇠는 승정원에서 관장했지만 북문인 신무문만은 환관들이 관장했기에 승지들을 따돌리기 위해 신무문으로 부른 것이었다. 중종은 남곤 등을 신무문으로 불러들여 추자정(楸子亭)에서 몰래 만나고 난 후 합문(閤門)으로 대신들을 불러 마치 조정에서 조광조 등을 죄 주기를 청한 것처럼 꾸미려 했던 것이다. 승지(承旨) 성운(成雲)은 중종에게 “승지와 사관이 이 일을 몰라서야 되겠습니까? 임금의 호상(好尙)좋아하고 숭상하는 것)은 자연스러워야지 이렇게 비밀스러워서는.. 2022. 4. 2.
이성계(李成 桂) 1355-1408년 이성계 영정 보물931호 이성계(李成 桂) 1355-1408년 참 오랜만에 제가 좋아하는 역사(歷史) 글을 올려본다. 1392년 7월 공양왕을 원주로 내쫓고 새 왕조의 태조(太祖)로서 왕위에 올랐다. 그는 새 왕조의 국호를 조선(朝鮮)으로 확정하고 1393년 3월 15일 새 국호를 쓰기 시작했고 다음에는 새 수도 건설을 왕사인 무학대사 박자초(朴自超)의 의견에 따라 한양을 새 서울로 삼기로 결정하였다. 또한, 유교 정신을 국가의 기본으로 삼고 농본주의(農本主義)를 건국이념 으로 삼아 조선 500년의 근본 정책이 되게 하였고 농상 장려 관세 정비등 조선의 기틀을 다지는데 큰 업적을 남겼다. 1394년 정도전(鄭道傳)의 조선 경국전(經國典)과 각종 법전이 편찬되었고 승유척불 정책을 시행 서울에는 성균관 지방.. 2020. 12. 14.
퇴계 이황(退溪 李滉)선생 자명(自銘) 퇴계 이황(退溪 李滉)선생 자명(自銘) 퇴계 이황(1502년 1월 3일) 경상도 예안현 온계리에서 태어났다. 진보이씨 21세 때 허씨와 결혼 28세때 진사시험에 합격 49세의 끝날 무렵 용기를 내어 풍기군수 자리를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와 원대한 학문과 인격완성의 꿈을 꾸면서 58새 때 2월 어느 날 청년 율곡 이이가 계상서당으로 찾아와 3일 동안 도학에 관하여 토론 도학을 공부했다. 70세(1570) 1월 8일 아침 “분재 매화에 물을 주라”명하고 눈을 감으셨다. 퇴계 선생께서 스스로 지은 묘비 시 도산서원 선비문화수련원에 자명(自銘)을 커다란 바위 세계 놓았다. 퇴계선생 자명(自銘) 생이대치(生而大癡)--태어나서는 크게 어리석었고 장이다질(壯而多疾)--장성해서는 병도 많았네. 중하기학(中何嗜學)--중년.. 2020. 10. 29.
중국 9人의 지혜 . 중국 9人의 지혜 ◆강태공(姜太公) 운도 지지리 없는 놈이라고 하늘의 무심함을 탓하지 말라! 내가 수십년 간 낚시를 벗하며 때를 기다리는 동안 조강지처마저 나를 버리고 도망가 버렸다. 검은 머리가 백발이 되고서야 문왕 서백을 만나 은나라 주왕(紂王)을 멸하고 주나라를 세웠다. .. 2020. 2. 17.
이제신(李濟臣, 이제신(李濟臣, 이제신(李濟臣,1510∼1583)의 자는 언우(彦遇)이고, 호는 도구(陶丘)이며, 본관은 철성(鐵城)으로 의령(宜寧)에 거주하였다. 그는 1510년 (중종 5년) 창녕 외가에서 태어났다. 그에 관한 자료는 {도구실기(陶丘實紀)}가 있다. 그는 10세 때(1519년, 기묘) 고향 사람 안주(安宙)에게서 공부하여 {소학}, {시경}, {서경}, 사학(史學)을 배웠다. 18세 때(1528년, 무자) 외간상(外艱喪)을 당하여 장제사(葬祭祀)를 한결같이 가례(家禮)에 따랐다. 35세 때(1544년, 갑진) 김해(金海) 신어산(神魚山) 밑 산해정에서 학문을 연마하던 남명선생을 찾아가 한 달 남짓 곁에서 극진히 모셨는데 44세 때 남명선생이 그의 정숙한 행동을 칭찬하기도 하였다. 이 후 남명선생이 삼.. 2019. 11. 19.
동래부사 민영훈(東萊府使 閔永勳) 동래부사 민영훈(東萊府使閔永勳) 부산대 입구 사거리에 가면 작은 공원에는 부사 민영훈 거사비(閔永勳去思碑)가 부산광역시 금정구 부곡2동 255번지 대우 아파트 앞 산업 도로에서 부산대학교사범대학부설고등학교로 가는 골목길에 있다. 문과방목(文科榜目)에 의하면 민영훈은 1775년(영조 51)에 태어났으며, 본관은 여흥(驪興)이고, 아버지는 민종길(閔種吉)이다. 1835년(헌종 1년) 9월 동래부사로 부임하여 2년 만인 1837년(헌종 3) 3월 이임 하였다. 비(碑)는 1838년(헌종 4) 봄 민영훈이 동래 부사에서 교체된 지 1년 만에 세웠다. 거사비란? 목민관이 재임 중에 선정을 베풀어 향민(鄕民)이 그가 떠나고 난 후 그의 공덕을 기려 비석을 세운 것이다. 비문에는 “조선 말기 동래부사로 부임한 민영훈.. 2019. 4. 13.
연 산 군(燕山君) 1476~1506년 연산군(燕山君) 1476~1506년 겨울이 지나가고 봄을 맞게 되어 대동강 물도 풀린다는 우수(雨水) 닐 아침 대구에도 고운 비가 내리는데 오랜만에 역사서(歷史書)를 써 본다.. 이때쯤이면 날씨가 많이 풀려 봄기운에 초목이 싹이 트고 우리 선조(先祖)들은 우수가 되면 수달이 물고기를 잡아 제사를 지낸다고 하였다. 또 기러기가 시베리아로 찾아가고, "우수 경칩이 되면 우주 만물이 소생한다.” 하였으니 엄동에서 그렇게 기다려온 봄이건만, 희뿌연 황사와 미세먼지가 봄바람 타고 날아드니 꽃비라도 내렸으면 좋겠다. 꽃비내리는 날이면 생각나는 사람이 있다. 조선조 연산일기에는 연산이 꽃비를 소재로 한 시가 있다. 피의 역사를 써 내려간 그의 악심에도 순수한 열정은 있었는 지 외롭고 아픈 과거가 숨겨진 그의 회문고시.. 2019. 2. 19.
퇴계이황(退溪)의 도산서원과 지폐이야기 퇴계이황(退溪李滉)의 도산서원과 지폐이야기 매화를 너무나 사랑한 퇴계(退溪) 선생은 그냥 매화라 하지 않고 매형(梅兄), 매군(梅君), 매선(梅仙) 이라는 존칭으로 대하였다. 그리고 이 매화와 함께 퇴계를 이야기할 때는 늘 떠오르는 한 명의 여인이 있는데 단양의 관기 두향(杜香)이다... 2018. 12. 26.
“입재 노흠 (立齋 盧欽) “입재 노흠 (立齋 盧欽1527∼1602)” 노흠(盧欽, )의 자는 공신(公信)이고, 호는 입재(立齋)이며, 본관은 광주(光州)로 삼가(三嘉)에 거주하였다. 그는 1527년 아버지 수민(秀民)과 어머니 일직 손씨(一直孫氏) 생원 세기(世紀)의 딸 사이에 태어났다. 그의 문집은 {입재집(立齋集)}이 있다. 19세 때(1545년) 남명선생을 만나 제자가 되었다. 37세 때(1563년) 김우옹, 정구(鄭逑), 박성(朴惺), 노흠, 김면, 배신, 이기춘(李起春) 등의 제현들과 더불어 도의(道義)로 교유하였다. 38세 때(1564년) 생원시(식년 생원 3등)에 합격을 하였다. 벼슬 : 성균관에서 추천하여 참봉의 벼슬을 내렸으나 받지 않았으며, 뒤이어 봉사(奉事)의 벼슬을 내렸으나 나아가지 않고 학문과 수행에 전념.. 2018. 10. 27.
김종필의 묘비명 김 전 총리가 작성했던 묘비명 전문. '思無邪'를 人生의 道理로 삼고 한평생 어기지 않았으며 '無恒産而無恒心'을 治國의 根本으로 삼아 國利民福과 國泰民安을 具現하기 위하여 獻身盡力 하였거늘 晩年에 이르러 '年九十而知 八十九非'라고 嘆하며 數多한 물음에는 '笑而不答'하던 者- .. 2018. 6.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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