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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야기

춘성 스님의 육두문자(무소유 실천한 수행자)

by 석암 조헌섭. 2014. 3.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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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성 스님(무소유 실천한 수행자)
 
춘성(春成 스님(1891~1977)은
 한용운 스님의 상좌로 용성 스님과함께
〈화엄경〉 사상을 웅변적으로 전했던 화엄법사이기도 하다.
또한, 덕숭산 끝자락에서 장좌불와 하던 고집스러운 수행자로 시대의
만공 회상에서 지독히 참선 수행했던 간화선 수행자다.

춘성스님은 원래 육두문자를 잘 쓰셨던 분이랍니다.
버스를 타고 가는중 차장이 실수로 남자분을 내려주기로 한 정거장 지나치게
 되었는데 그 남자가 차장에게 몹시 화를 내며 행패 부리는 상황이 되었는데.  

이를 보다 못한 춘성스님께서 남자 승객 앞에 나서서
'여자 앞에서 성질 내는 것은 ×밖에 없어 임마' 라고 하였더니.
창피 당한 승객은 얼굴이 붉어져 급히 내렸답니다.

중대장,
한국전쟁이 끝나고 망월사를 중수할 때 산에서 나무를 베다가 작은 요사채를 
만들고 있었는데, 신고가 들어와서 파출소에서 경찰이 나와 야밤에 연행해
 
갔다고 한다. 
육두문자 사건은 이때부터다.

경찰관이 “당신은 누구요”
“중대장이다.”
경찰관이 보기엔 중대장이 아니라 스님이었다.
“그래 내가 중(僧)의 대장이다.”만해 한용운의 유일한 제자 춘성은 화엄경을
거꾸로 읽을 정도로 해박했다. 
산림법 위반으로 파출소에 잡혀온 춘성 스님에게 경찰이 물었다.

"당신 주소는?" 그러자 춘성은 "우리 엄마 ××다"라고 대답했다.
"그럼 본적은?" 잠자코 듣고 있던 춘성 왈 "우리 아버지 ××××이다.
" 
경찰은 춘성 스님을 실성한 사람이라고 여기며 다시 돌려 보냈다고 한다, 

짙은 화장을 하고 사치스런 털옷을 걸친 여자가 절에 오면
털옷을 벗게한 뒤 그 자리에서 태워버린 일까지 있었으며,
아무리 지체높은 귀부인이라도
즉석에서 “×부랄 년”
이라는 욕부터 쏟아냈다고 한다. 

이 세상에서 죽었다가 살아나는 건 자기 ××뿐이라고 한다.
또 불자들이 절에오면 파격적인 법문을 하였다.
시집 장가 가는 데는 ××와 ××가 제일이듯, 중창불사 하는데는 돈이 제일이니
오늘 이 법회에 온 년들아 돈 많이 시주하고 가거라!.
이렇게 춘성은 원색적인 욕을 잘해 “욕쟁이 스님”으로 유명했다.

춘성의 일화 중의 하나는 '청와대사건'으로 박 대통령 시절에 춘성 스님이 
육영수 여사 생일에 초대되어 간 적이 있었다.   
청와대에 도착하니 가족 친지들, 경호원들이 모두 자리를 갖춰 앉아 있다가
스님에게 예를 올렸다.

춘성 스님께서 법상에 오르시더니 일체 말씀이 없으셨다.  
30분이 지나도 한말씀도 없자 모두들 이리저리 몸을 뒤틀고 지겨워할 무렵
선사께서 갑자기 딱 한 말씀을 하고는 법상을 급히 내려오셨다."
오늘은 육영수 보살이 지 에미 ××에서 응아하고 나온 날이다!"

춘성이 강화도 보문사에 있을 때 육영수 여사가 찾아와 인사를 했다.
춘성은 "뽀뽀나 하자"고 달려들었다육여사는 당황하지 않고 웃으며
 대응했다.
 육 여사가 박 대통령에게 얘기하니 "근래 보기 드문 큰스님이 나왔구먼"

예수와 부처
어느 날 춘성스님이 열차여행을 하셨을 때 교회 전도사가 죽은 부처 믿지 말고,
부활하신 예수를 믿어라.
"예수는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박혔다
3일 만에 부활했나니…"
이때 춘성 스님이 좌석에서 벌떡 일어나서 말했다.

"뭐~ 누가 죽었다 살아났다고? 이놈들아, 내 평생에 죽었다 살아난 것은
내 × 밖에 못 봤다!" 그러니 너희들은 내×은 매일 새벽마다 부활하니
내×을 믿어라 하니 승객들은 폭소를 터트리며 깔깔대고 웃어대니
그 전도자들은 혼비백산 사라졌다고 한다.
 
하루는 소견이 몹시 좁은 딸을 둔 노보살이 이 장성한 딸을 춘성스님
처소에 보내서 소갈머리가 좀 터지는 법문을 청해 듣도록 했다.
춘성스님이 딸에게 말했다. "내 그 큰 것이 네 그 좁은데 어찌 들어
가겠느냐?" 
 
딸은 얼굴이 벌개지면서 방문을 박차고 울면서 달아났다
. 집에 돌아와서
스님의 법문 내용을 말하고, "큰 스님은 엉터리요"라고
어머니께 푸념을
하였다.

그러자 보살은 "그러면 그렇지, 바늘구멍도 못 들어갈 네 소견머리에 어찌
바다 같은 큰 스님의 큰 법문이 들어가겠느냐?"하며 혀를 찼다.
딸은 그제서야 울음을 그치고 스님의 법문을 잘못 알아차린 줄 알았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걸림없이 쏟아내는 춘성스님의 무지막지한 욕설과
털옷을 벗게 한 뒤 그 자리에서 태워버린 일까지 있어도 누구 한사람 감히 
항의하거나 대들지 못한 점이었다
.

뿐만 아니라 참 이상하게도 춘성 스님의 욕설에서는 천박한 냄새가
나는 게 아니라상큼하고 속 시원한 지혜가 번뜩였으니,  
이것은 아마도 걸죽 질퍽한 춘성 스님의 육두문자와 욕설 속에 
선지
(禪旨)가 담겨 있었던 탓이 아닌가 싶다.

춘성은 도인, 선지식, 큰스님이었지만,
춘성의 유언에는
“나에 대한 일체의 
그림자도 찾지 말라”로 인해 춘성에
대한 정리,
소묘 등은 지금껏 
그 누구도 접근하지 못한 미답의 대상이었다.

스님이 남긴 유일한 걸망 속에는 죽비 하나, 빼놓은 틀니 하나,
속옷 한 벌
뿐인 무소유를 실천한 스님이었다.

2014년 4월 1일 조헌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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