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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조의 향기 춘분이 열흘 앞으로 다가오니 꽃샘추위에도 우리 집 앞 무궁화 놀이터엔 하얀 매실꽃이 눈꽃처럼 활짝피었네요.! 추사는 세한도에서“세한연후지송백지후조야(歲寒然後知松栢之後彫也)”라 "세밑 추위를 지난 뒤에야 소나무·잣나무가 시들지 않음을 안다"라고 하였고, 1910년 3월 안중근 의사가 만주의 여순 감옥에서 보물 제569-10호로 남긴 글씨이다. 황벽선사는 “쟁득매화 박비향”이라 하여 추운 겨울을 넘긴 매화가 이듬해 코를 찌르는 향기(香氣)가 있다고 했것다. 모두 추운 겨울을 지켜내는 강인(强靭)한 지조를 일컫는 말이다. 지조라면 동탁(東卓) 조지훈(趙芝薰)을 빼 놓을 수 없다. 조지훈 선생은 주실이라는 조그마한 마을에서 태어나 조씨 문중에서 한국 인문학의 대가인 혈족(血族)으로부터 교양을 쌓았으며 선조의 삼불차(三不借) 정신을 배우며 성장했다. 문중의 삼불차 정신은 세상을 살면서 3가지를 빌리지 않는다는 뜻인데, 첫째가 재불차(財不借)=어떻한 일이 있어도 재물(財物)을 빌리지 않는다. 재물을 빌리지 않기 위해 소유한 땅은 어떠한 일이 있어도 팔지 않고 대를 물렸다고 한다. 둘째가 문불차(文不借)=문장을 빌리지 않는다. 선비 집안의 채통을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 셋째가 인불차(人不借)=사람을 빌리지 않는다. 즉 양자를 들이지 않는 다는 의미다. 그래서 370년 동안 양자를 들이지 않고 혈손으로 대를 이어 왔다고 한다, 이 삼불차가 조지훈 지조론의 뿌리였다. 어릴 때부터 삼불차 집안의 훈도를 받으면서 자라온 결과다. 지조란 것은 순일(純一)한 정신을 지키기 위한 불타는 신념(信念)이요, 냉철한 확집(確執)이요, 고귀한 투쟁(鬪爭)이다.바로 선비 정신이요, 교양(敎養)이다. 지조와 정조는 다 같이 절개에 속하지만, 지조는 정신적인 것이요,정조는 육체적인것이다. 그러나 지조의 변절(變節)은 육체 생활의 이욕에 매수된 것이요, 정조의 부정은 정신의 쾌락에 대한 방종에서 비롯된다. 공약도 지키지 않는 지조가 없는 지도자는 믿을 수가 없고, 믿을 수 없는지도자는 따를 수가 없기 때문이다. 지조 없는 지도자의 무절제와 배신 앞에 우리는 얼마나 많이 실망하였는가! 그러나 현실에서 정조와 지조를 지킨다는 것이 참으로 어려운 일이지만, 자기 신념에 어긋날 때면 목숨 걸어 항서 하여 불의와 타협(妥協)하지 않고 권력(權力) 앞에서 죽을 각오를 해야 한다. 지조의 매운 향기를 지닌 선비들은 심한 고집과 기벽까지도 지녔다. 장사꾼에게 지조를 바라거나창녀에게 지조를 바란다는 것은 옛날에도 없었던 일이지만, 선비와 교양인과 지도자에게 지조가 없다면 그가 인격적으로장사꾼과 창녀와 가릴 바가 무엇이 있겠는가. 단제丹齋) 신채호(申采浩) 선생은 망명 생활 중 추운 겨울에 세수를 하는데 꼿꼿이 앉아서 두 손으로 물을 움켜다 얼굴을 씻기 때문에 찬물이 모두 소매 속으로 흘러 들어갔다고 한다. 어떤 제자가 그 까닭을 물으매, 내 동서남북 어느 곳에도 머리 숙일 곳이 없기 때문이라고 했다는일화(逸話)가 있다. 무서운 지조를 지킨 분의 한 분인 한용운(韓龍雲) 선생의 지조 때문에 낳은 많은 기벽의 일화도 마찬가지다. “한 때의 적막을 받을지언정 만고에 처량한 이름이 되지 말라”는 채근담(菜根譚)의 한 구절은 변하지 말라는 것이다. 일제(日帝) 때 경찰에 관계하다 독립운동으로 바꾼 이가 있거니와 그런 분을 변절이라고 욕하진 않았다. 그러나 독립 운동을 하다가 친일파(親日派)로 전향한 이는 변절자로 욕하였다. 권력에 붙어 벼슬하다가 야당이 된 이도 있다. 지조에 있어 완전히 깨끗하다고는 못하겠지만, 이들에게도 변절자의 비난은 돌아가지 않는다. 야당전선(野黨戰線)에서 이탈하여 권력에 몸을 파는 변절자다. 우리는 이런 사람의 이름을 역력히 기억할 수 있다. 자기 신념으로 일관한 사람은 변절자가 아니다.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남한산성(南漢山城)의 치욕에 김상헌(金尙憲)이 찢은 항서(降書)를 도로 주워 모은 주화파(主和派) 최명길은 당시 민족정기(民族正氣)의 맹렬한공격을 받았으나, 심양(瀋陽)의 감옥에 김상헌과 같이 갇히어 오해를풀었다는 일화는 널리 알려진 얘기다. '소인기(少忍飢)하라.' 배고픔을 참아야 한다. 이 말에는 뼈아픈 고사(故事)가 있다. 광해군(光海君)의 난정(亂政) 때 깨끗한 선비들은 나가서 벼슬하지 않았다. 연산군의 황음에 어떤 고과의 부인이 궁중에 불리어 갈 때 온 몸을 명주로 동여매고 들어가면서 만일 욕을 보면 살아서 돌아오지 않겠다고 해 놓고 밀실에 들어가서는 그 황홀한 장치와 향기에 취하여 제 손으로 명주를 풀고 눕더라는 야담이 있다. 창녀라도 늘그막에 남편을 쫓으면 한평생 분냄새가 거리낌 없을 것이요, 정부인이라도 머리털 센 다음에 정조를 잃고 보면 반생의 깨끗한 고정이 아랑곳 없으리라. 사람을 보려면 다만 그 후반을 보라 하였으니 , 차돌에 바람이 들면 백 리를 날아간다고 했으니, 사람이란 늙으면 더러워 지기 마련 이다. 자신의 지조를 깨뜨리는 일이 없도록 생각 할 져… 지조라 하면 남명 조식(南冥 曺植) 선생도 대단한 분이랍니다. 남명 조식은 상소문 단성소와 민암부에서 대왕대비(문정왕후)를 세상 물정 모르는 과부 또는 아녀자라 하고 22세의 임금(명종)를 물 위의 배에 비유하며 어린애(고아)에 불과하다고 했으며 벼슬아치는 백성을 껍데기를 벗기는 탐관오리만 한다고 하였으니, 왕조시대인데도 온 나라를 진동시킬 만큼 국정을 극렬하게 비판한 것은 조선조 500년 역사상 전무후무(前無後無)한 것이며, 남명이 이렇게 직방강직한 상소문을 올렸어도 포도청에 한 번 안 끌려간 것을 보면 정말 대단한 분이라 생각됩니다. 남명의 성격이 엄격하고 강직한 성품은 아버지 조언형(曺彦亨)에게 물려받았는지? 언형이 정삼품 벼슬인 승문원 판교(判校)로 있을 때 목계 강혼(木溪 姜渾함경감사)이라는 소꿉친구가 있었는데, 강혼은 연산군 때 대문장가로서 연산군의 청에 따라 후궁의 죽음을 추모하는 글을 쓰게 되자, 언형은 직송상관인 강혼이 감사(監査)가 되어 찾아온 감사를 맞을 생각도 않고 집으로 가 술독에 술을 서너 잔 마신 후 찾아온 강혼도 몆 잔 마신뒤 절교를 선언 하는데, "자네는 개, 돼지보다 더 못한 짓을 했네. 그런 자네가 먹다 남은 이 술을 내가 어떻게 마시겠나 조그마한 글재주로 부끄럽게 사느니 차라리 죽는 게 어떻겠나?" 이 말을 들은 강혼은 고개를 떨구고 말없이 눈물만 흘리다 떠났다고 하는 것이 (연려기술)이란 역사책에 전해오는 내용인데, 예나 지금이나 자기가 한말에 책임지지않는 이랬다 저랬다 하는 지조 없는 정치인이 많은 듯… 2014년 3월9일 조헌섭 .Girls' Generation 소녀시대_'Mr.Mr.'_Music Vid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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