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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야기

경주(慶州) 양동(良洞)마을

by 석암 조헌섭. 2013. 7.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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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양동(良洞)마을 - 유네스코세계문화유산 등록

경주(慶州) 양동(良洞)마을

1984년 12월 20일 마을 전체가 국가지정문화재(중요민속자료 제189호)로 지정된 마을.
2010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된 경주 양동마을.
500여년의 역사가 눈에 와 닿는 전통의 유서 깊은 반촌(班村-양반들이 모여사는 동네)
마을이다.

경주시 동북방 20㎞쯤 떨어져 있으며, 마을의 주산인 설창산에 둘러싸여 있는

경주 손(孫)씨와 여강 이(李)씨가 사는 종가(宗家)마을 이다. 

향단(香壇) - 보물 제412호

7월 21일 오후 1시가 넘어 주차장에 도착하니 푹푹 찌는 더위가 힘들게 한다.
주차장 바로 위에 있는 이 집은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1491~1553)이
경상도
관찰사로 부임 할 때, 병환 중인 모친을 돌볼 수 있도록 중종이
지어준 것이다.

이언적이 한양으로 올라가면서 동생 이언괄(李彦适)에게 물려준 후
여주 이씨 향단파의
종가가 되었다. 이언괄의 손자인 향단공(香壇公)
이의수(李宜樹)의 호에서 집의 이름을
따왔다고 한다.

원래는 99칸이었다고 전하나 6·25전쟁으로 일부는 불타 없어지고현재는
56칸이 보존되어 있다고 한다. 문이 잠겨 있어 상세히 못 본것이 아쉬울 뿐 



정충비각(旌忠碑閣) -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261호

이 비각은 손종로(孫宗老·1598~1636)와 그의 노비였던 억부(億夫)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정조(正祖)7년(1783)에 임금의 명으로 세워진 건물이다. 

이향정(二香亭) - 중요민속자료 제79호
 

온양군수를 지낸 이향정(二香亭) 이범중(李範中)이 숙종 21년 1695년경에
지은 것으로 그의
호에서 집의 이름을 따왔다.

강학당(講學堂) - 중요민속자료 제83호

여주(驪州) 이씨 집안의 문중 서당으로
지족당(知足堂) 이연상(李淵祥· 1788~1846)이
고종 7년 1870년경에 세웠다. 

경주 손씨 집안의 서당인 안락정과 쌍벽을 이룬다. 공부하는 곳이니 만큼
대문과 담장이 없이
소박하고 간결하게 지었고,
앞마당에서 마을전경을 감상 할 수 있다. 


심수정(心水亭) - 중요민속자료 제81호

이 정자는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1491~1553)의 동생인
농재(聾齋)
이언괄(李彦适·1494~1553)을 추모 하기 위해 지은 것으로
이언괄은 벼슬을 마다하고
대신 노모를 모셨다.
문이 잠겨있어서 담 너머로 찍을 수 밖에 없었다. 


심수정(心水亭)에서 두곡고택을 가는 길의 풍경으로 백리향 식당,

두곡고택(杜谷古宅) - 중요민속자료 제77호

영조 9년(1733년)에 이식중(李湜中·1711~1777)이 분가 할 때 지은 것이다.
후에 이언괄의 14세손인 두곡 (杜谷)이조원(李祖源)의 후손들이 살면서 
'두곡고택'
이라고 불렀다. 


근암고택(謹庵古宅) - 중요민속자료 제76호

조선 정조 4년(1780)경에 태로(台老) 이정수(李鼎壽·1758~1784)공이 지어
살던 집으로
그의 현손(玄孫, 4대손) 홍릉참봉(弘陵參奉) 이희구(李熙久)공의 호를 따라 근암고택(謹庵古宅) 혹은 참봉택이라 부른다.

상춘헌(賞春軒) - 중요민속자료 제75호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1491~1553)의 5세손인
동고(東皐) 이덕록(李德祿1677~1743)이
영조6년(1730년)건립하였고,
그 후 후손인 상춘헌(賞春軒) 이석찬(李錫纂)공의 호를
따라 상춘헌이라
하였다.

사호당고택(沙湖堂古宅) - 중요민속자료 제74호

사호당(沙湖堂) 이능승(李能升)이 헌종6년(1840년)에 지어살던 집. 
안채와 사랑채가
맞닿아 있는 부분에 곳간방이 있는데, 
이곳에는 문으로 빠져 나올수 없는 커다란
항아리가 들어 있다고 한다. 

독을 먼저 넣고 집을 지은 것인데 곡식이 돈이었던 시기의 안주인의
위세를 짐작해
볼 수 있다


서백당(書百堂) - 중요민속자료 제23호 

경주 손씨의 대종택으로 양민공(襄敏公) 손소(孫昭·1433~1484)가
만호 류복하의
외동딸과 결혼하여 이 마을에 들어온 후 처음으로 자리를
잡은 곳이다. 

지관이 이 집터에서 세 명의 현인이 탄생할 것이라고 예언 했는데,
손소의 아들인 우재
손중돈과 외손자인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1491~1553)이 여기에서 태어났다. 

서백당(書百堂)은 하루에 참을 인(認)자를 백번 쓰며 인내를
기른다는 뜻이며 근래에
와서 굳어진 당호(堂號)이다.
마당의 향나무는 600여년이 넘은 것이고, 사랑채 뒤쪽의 높은 곳에 있는
건물은
사당이다. 



서백당(書百堂)의 향나무(香木) - 경상북도 기념물 제 8호

수령 600년으로 높이 9m, 둘레 2.92m이고, 가지의 길이는 6m내외이다.

분재를 보는 것처럼 가지가 꾸불꾸불 꼬여 있는 수세(樹勢)가 왕성하다.


첨당(無忝堂) - 보물 제411호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1491~1553)의 종가 별채로 그의 맏손자인
무첨당(無忝堂)
이의윤(李宜潤:1564∼1597)의 호에서 집의 이름을 따왔다. 

오른쪽 벽에는 대원군이 집권 전에 이곳을 방문해 썼다는 죽필(竹筆)인
좌해금서(左海琴書)라는 편액이 걸려 있는데 ‘영남(左海)의 풍류(琴)와
학문(書)’이라는 뜻이다. 

무첨당(無忝堂)
대성헌(對聖軒) - 경상북도 민속자료 제34호 

영조 8년(1732년)에 건립되었고, 순조 때 문과에 급제하여 홍문관 교리를
지낸
물와(勿窩) 이재직(李在直) 공이 살던 집이다. 
대성헌(玳聖軒)이라는 당호(堂號)는 앞산
성주봉(聖主峰)을 마주 보고
있는데서 붙여진 이름이다.

대성헌(對聖軒)

양동(良洞)마을회관(정보센타) 

마을입구 연못에는 연꽃과 수련이 아름답게 피어있다.
경주양동마을을 보고 참으로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지형에 따라 오밀조밀 들어선 집들은
한마디로 그림이었다.

와가(瓦家-기와집)는 양반집이고, 초가(草家)는 그들의 노비들의
집이었다고 한다. 
물론 그동안 많은 집들이 고쳐지기도 하고,
새로이 만들어 지기도 했겠지만 500여년
역사의 흐름이 배어있는
마을이었다.
아무쪼록 이 마을이 앞으로 오백년, 천년을 이어가길 빌어본다.


오는길에 영천 임고서원 포은 정몽주 유물관 앞에서 한컷 


2013년 7월 24일 조헌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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