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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야기

청야 전술(淸野 戰術)

by 석암 조헌섭. 2014. 9.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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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암


청야 전술(淸野 戰術) 

청야 전술(淸野 戰術)은 주변의 적이 사용할 만한 모든 군수물자와 식량 
 등을 없애 적군을 지치게 하는 전술이다. 견벽청야[堅壁淸野]라고도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고구려와 수나라의 전쟁(살수대첩), 
 임진왜란[壬辰倭亂], 병자호란[丙子胡亂] 등에서 활용[活用]되었다. 

세계적으로는 나폴레옹의 러시아 원정이나 독소전쟁[獨蘇戰爭]에서 
 소련이 활용 하였으며, 근세기에 들어서는 6.25 때 함흥철수 작전이나 
 공비토벌에 이용하기도 하였다. 

청야전술은 전장에서 보급물자의 현지조달 비중이 매우 높았기 때문에 
 전략적으로 후퇴한다거나 공성 작전 시에 많이 이용[利用]되었는데, 
일시적 후퇴 시에 남아있는 자군의 보급물자(가옥, 우물, 가능한 식량) 
 등을 불태우거나 싹 쓸어 치워버림으로서 상대방의 보급을 봉쇄[封鎖] 
  하는 작전이다. 

한 마디로 적군이 이용할 만한 것은 남기지 않고 집을 불사르고, 
 댐은 파괴하고, 공장, 비행장, 교량은 모두  폭파하고, 강물은 오염원을 
 투입하고, 식수는 고갈시켜 황폐화[荒廢化]시키는 작전[作戰]이다. 

이 전술은 일찍이 고구려의 을지문덕 장군이 고안해낸 작전이다. 
수양제[隋煬帝]가 고구려를 침공하였을 때, 
고구려는 청야 작전[淸野 作戰]과 수성작전을 기본으로 삼았는데 
 청야작전은 침략군[侵略軍]이 공격해오면 전 주민이 튼튼한 
 석조 구조물의 산성으로 대피하면서 중도에 침략군[侵略軍]이 이용할 
 수 있는 곡식 등 모든 것을 불태워 버렸던 것이다. 

수나라 군사는 고구려[高句麗]군의 강력한 항전[抗戰]에 부딪치자 
 별동대 30여 만 명을 편성하여 평양성[平壤城]을 공격하게 하였다. 
그러나 고구려의 을지문덕[乙支文德] 장군의 청야 전술에 이끌려 
 수나라 별동대는 고전을 거듭하다 살수를 건너 퇴각[退却]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고구려군은 미리 막아 두었던 물을 일시에 내려보내 대부분의 
 수나라 군사를 수장시켜 버렸다. 
이 전쟁에서 살아 돌아간 자는 30만 명 중에서 2,700명에 지나지 
 않았다 하니 세계 전사에 길이 빛날 위업[偉業]이 아닌가? 

이런 전술[戰術]은 많은 위험성[危險性]을 내포하고 있다. 
전략 자체가 하나도 남기지 않고 다 없애버리는 것이므로 전후의 피해도 
 무시할 수 없고 잘못하면 청야전술[淸野 戰術] 쓰다가 같이 굶어 죽는 
 수가 있다. 

또한, 전장이 넓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전술이라서 엄청나게 불리한 
 경우가 아니면 사용할 수 없는 전술[戰術]이다. 

대표적인 청야전술을 보면, 

을지문덕의 살수대첩으로 유명한 2차 고구려-수나라 전쟁. 
나폴레옹의 러시아 원정 당시 러시아군의 청야전. 
대한제국 말기 일본군이 호남 지방의 의병을 몰살시킨 남한대토벌작전. 
제2 차 세계대전 당시의 소련군의 초토화 전술. 6.25 때 흥남철수작전이 있다. 

이 청야전술의 백미는 단연 독소전쟁[獨蘇戰爭] 때의 불타는 모스크바였다. 
 제2차 세계 대전 중 독소전쟁인 동부 전선은 가장 광대하고, 
 많은 피를 흘린 전쟁이었다. 

약 3천만 명 이상의 사상자[死傷者]를 내었으며, 
 이는 인류 역사에서 가장 값비싼 전쟁이었다는 것이다. 
독일군이 모스크바로 진군했을 때 남은 것이라곤 한겨울의 매서운 
 추위와 꽁꽁 얼어붙은 얼음땅 뿐이었다.

소련군은 퇴각하면서 독일군이 사용할 만한 물건은 모조리 불태우고 
 쓸어버렸다. 
그야말로 집 한 채 없는 얼어붙은 텅 빈 공동의 도시였다. 

본토에서 길어진 보급로는 중간에서 차단[遮斷]당하고 병사들은 얼어 
 죽어가고 있었으나  히틀러는 계속 영하 40-50도의 혹한 속으로 
전진만을 명령했다. 도무지 견딜 수 없어 퇴각할 때는 이미 늦었다. 

차가운 툰드라 지역은 진흙구덩이가 되어 우마차는 물론 기갑장비들이 
 움직일 수 없어 모두 팽개친 채 동상과 씨름하며 후퇴하였으나 퇴로를 
 차단한  소련군의 게릴라식 전투에 300만 명 이상이 포로가 되었다. 
그리고 그들은 시베리아 지역으로 이송되어 전멸하고 살아 돌아온 자는 
 없었다. 

이는 다른 전쟁보다 더 젋은 지역에서 전투가 벌어졌고, 
 이데올로기적 논리로 전쟁을 규정하면서 인간 생명을 경시하게 되는 
 결말을 빚었다. 베를린의 나치들에게 대소련 전쟁은 공산주의에 대한 
 나치즘 투쟁[鬪爭]이었으며, 
 게르만 인종 대 슬라브 인종 간의 투쟁[鬪爭]이기도 하였다. 

전쟁이 시작되었을 때부터, 히틀러는 '전멸 전쟁'으로 선포했다 
스탈린은 애국전쟁[愛國戰爭]으로 호도하고 무수한 젊은이들을 
 강제징집했다. 

히틀러와 스탈린은 개인적인 탐욕[貪慾]으로 소모전을 감행해 많은 
 생명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독일군은 마을 주민 대량 학살과 공개 처형[處刑] 등 민간인을 
 극단적으로 잔혹[殘酷]하게 다루었다. 

소련은 독일군 포로와 소련 자신이 행한 정치적 숙청에 의해 대략 
 2천만 명이 죽였다. 
이데올로기에 점철된 전무후무[前無後無]한 집단 학살극이었다. 

세계에서 이념으로 인한 분단은 세계 유일의 우리나라 뿐, 하루빨리 통일이 

 되기를 기원하면서… 
제66회 국군의 날을 맞이하여 튼튼한 자주국방력[自主 國防力]을 키워 
평화통일[平和統一]의 초석이 되었으면 하는바람이다. 

2014년 10월 1일 
昔暗 曺 憲 燮정다한, 차오름, 박구윤 = 전우야 잘 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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