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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건국 이야기” 잘 아는 얘기지만, 고구려 건국(建國) 이야기 간단하게 정리해 볼까 한다. 고구려 발상지인 압록강 중류 지역은 요동 지역이나 동해안으로 통하며, 남으로 대동강 유역의 평야 지대, 북으로 송화강 유역의 평원(平原)지대로 통할 수 있는 교통로(交通-路) 상의 중요지점이다. 고구려 최초의 발상지인 졸본 지역(오늘날의 중국 요녕성 환인)은 꽤 넓은 분지(盆地)를 이루고 있다. 이 지역의 기후는 중국 동북 지역에서 가장 온난(溫暖)하며 강수량(降水量)도 풍부(豊富)하여 사람이 살기에 적합한 곳이다. 고구려를 건국한 시조 동명성왕(東明聖王)의 출생 설화(說話)에는 탄생의 신비감과 주몽의 능력에 대해 잘 나와 있다. 동명성왕 주몽에 관한 설화는 "삼국사기", "삼국유사", "위서", 광개토대왕릉비문 등에 기록에 남아 있는 시조 동명성왕은 성은 고 씨이며 이름은 주몽(朱蒙)이라 부여의 금와왕(金蛙王)이 태백산 남쪽 한 여자를 만나 물은즉, "저는 하백의 딸로 이름은 유화라 하는지라" 금와(金蛙)가 이를 이상하게 여겨 그녀를 방 속에 가두어 두었더니 햇빛이 방 속을 비춰 그로부터 태기(胎氣)가 있어 알 하나를 낳았다, 한 사내가 껍질을 깨고 나왔는데, 골격(骨格)과 외양이 영특(英特)하고 기이해 일곱 살에 기골이 준수하니 스스로 활과 화살을 만들어 쏘는데 백발백중이라 부여의 속어에 활을 잘 쏘는 것을 주몽(朱蒙)이라 하여 이름을 얻었으나 왕의 여러 아들과 신하들이 주몽을 죽이려 하니, 주몽의 어머니가 이 사실을 미리 알고 주몽에게 말하기를 지금 나라 안 사람들이 너를 죽이려고 하니 너의 재주와 지략(智略)으로 어디를 간들 살지 못하겠느냐. 그러니 빨리 여기를 떠나라. 그리하여 주몽은 오이 등 세 사람을 벗으로 삼아 도망(逃亡)가는데, 마침 강가에 이르자 추격병이 따라오고 있어 그는 물을 향해 말하기를 "나는 천제의 아들이며 하백의 외손자다. 뒤쫓는 자들이 추격(追擊)해 따라오니 어찌하면 좋겠는가?"라고 외치자, 물고기와 자라가 솟아올라 다리를 만들어 주어 그들을 건너게 한 다음 흩어져 이로써 뒤쫓아 오던 기마병(騎馬兵)은 건너지 못하고 주몽(朱蒙)은 무사히 졸본주(卒本州)에 다다라 이곳에 도읍을 정해 미처 궁실을 지을 겨를이 없어 비류수 위에 집을 지어 거처하면서 국호(國號)를 고구려(高句麗)라하여 고(高) 씨를 성으로 삼았고 이때 나이가 12세였는데, 한나라 효원제 건소 2년에 즉위한 왕이라. 기원후 1세기 전반경인 태조왕 때 고구려는 한 차례 비약적으로 발전하였다. 태조왕은 4년(56)에 동옥저를 정벌(征伐)하여 고구려에 복속(服屬) 시켰다. 고구려는 옥저의 대인(大人)을 사자(使者)로 삼아 읍락(邑落) 사회를 통솔하도록 하는 한편 고구려의 대가로 하여금 조세를 관리하도록 하였다. 고구려 태조왕 20년(72)과 22년(74) 압록강 유역에 있던 조나(藻那)와 주나(朱那)를 정벌하였고, 태조왕 53년(105)에 요동(遼東)을 공격하여 6개 현을 약취한 이래 현도군과 요동군을 계속 공략(攻掠)하여 태조왕 69년(121)에는 선비(鮮卑) 8천 명을 거느리고 요하 유역(流域)의 군사 요충지인 요대(遼隊)를 공략하였다. 태조왕 다음으로 즉위한 차대왕(次大王) 1년(146)에는 요동과 한반도 서북을 잇는 교통로의 요충지인 압록강 하구의 서안평(西安平)을 공격하여 대방령(帶方令)을 살해하고 낙랑태수의 처자(妻子)를 사로잡았다. ♥석암曺憲燮♥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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