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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이야기

한강 정구(寒岡 鄭逑)선생

by 석암 조헌섭. 2023. 4.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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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 정구
(寒岡 鄭逑)선생

한강 정구(
寒岡 鄭逑, 1543∼1620)의 자는 도가(道可)이고, 호는 한강(寒岡)이며,
본관은 청주(淸州)로 성주(星州)에 거주하였다. 
그는 1543년에 성주군(星州郡) 대가면(大家面) 칠봉동(七峯洞)에서 판서공 사중(思中)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문집은 {한강집(寒岡集)}이 있다.  

7세 때(1549년, ) [논어]와 [대학]을 통달하여 신동이라는 칭찬을 받았으며, 
  손님 앞에서 자기의 포부와 기상은 요순과 같다는 기상천외의 대답을 하였고, 
9세 때(1551년) 부친상을 당하자 성인처럼 집상(執喪)하여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10세 때(1552년, 임자) 학문에 뜻을 두고 발분독서(發憤讀書)하여 [대학(大學)],
    [논어(論語)]를  읽고 그 대의(大義)에 통하였다.
12세 때(1553년) 공자의 화상을 그려서 벽 위에 걸어두고 첨배(瞻拜)할 정도로 일찍부터
    지기(志氣)가 뛰어났다. 

13세 때(1555년) 가학으로 공부에 열중하던 그는 성주향교의 교수로 부임한
    남명선생의 제자  오건에게서 (주역)을 배우게 되는데, 

   건괘(乾卦) 이괘(二卦)를 배우고 나머지는 유추(類推)하여 달통(達通)하니 스승 오건이
   정구의 뛰어난 자질을 보고 여러 제자들에게 이르기를, 
   '너희들의 스승이 될 사람은 마땅히 정생(鄭生)'이라고 하였다.

15세 때(1557년, 정사) 박찬(朴澯), 김우옹, 송사이, 김면(金沔), 이린, 이홍량(李弘量),
   이승(李承), 이기춘(李起春) 등과 더불어 강학논도(講學論道)하였고, 
17세 때(1559년) 당시 남명 선생의 문인인 곽율, 김우옹, 배신(裵紳) 등과 더불어 도의로     
    교유하였다. 

21세 때(1563년, 계해) 퇴계 선생을 찾아가 배움을 청하였고, 한강은 퇴계 선생과
    하룻밤을 지내면서 성리학에 대해 질정하고 돌아왔다.
이때 향시에 급제하여 진사가
    되었으나 그 후 과거에 응하지 않고 학문에만 열중하였다. 

23세 때(1565년, 을축) 가을 박찬(朴澯), 김우옹과 더불어 서로 명리(名理)에 대해 여러 날
    강론하였다. 
24세 때(1566년) 봄에 천왕봉(天王峯) 아래 덕산으로 가서 남명(南冥) 선생을 배알하니,
    남명 선생이 '네가 출처거취(出處去就)를 적의하게 하므로 내 마음을 허(許)하노라.
    사대부 군자의 대절은 오직 출처(出處)에 있을 따름이다.   
    이때 이정(李楨), 김우옹, 노진, 강익(姜翼), 정유명(鄭惟明), 하항(河沆), 조종도(趙宗道),
    이광우(李光友) 등과 더불어 남명선생을 모시고 단속사에서 산천재로 모였다.

남명집(南冥集)에는 선생께서 산해정에 계셨는데 한강 정구가 와서 달포를 모시면서
의심나는 것을 질문하였는데, 선생께서 가르치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고금 인물의 어짊과 어리석음, 세상도덕, 시대의 변화, 옳고 그름, 바름과 삐뚤어짐,
벼슬에 나가는 일과 물러나는 일, 말을 할 때와 묵묵히 있을 때 등 광범위하게 문답을
주고받았다. 고 한다.   

27세 때(1569년) 문익성(文益成), 김우옹 등과 학문을 강마하였으며,
31세 때(1573년) 선조 6년에 조정에서 재능과 학식이 있는 선비를 추천하라는 명이 있자, 
    고향 사람인 김우옹이 수찬관(修撰官)으로 있으면서 선조에게 주청하였다. 
32세 때(1574년) [한훤당선생연보] 및 [師友錄]을 편찬하였고 가을 7월에 덕산으로 가서
    박제현을 찾아가 선생의 덕을 보고 기순(器醇)이 깊음을 한탄하면서
    이르기를 '박모(朴某)는 충후(忠厚)한 유자(儒者)'라고 하였다. 

36세 때(1578년) 선조 11년에 사포서종부주부(司圃署宗簿主簿), 의흥(義興), 삼가(三嘉)의
    현감에 벼슬을 내렸으나 모두 나가지 않았다. 
37세 때(1579년) 지례현감(知禮縣監)에 제수되었으나 나가지 않았다.

1579년) 가을에 이백유 등 몇 사람과 함께 (근사록) 1책과 남악창수(南嶽唱酬)를 가지고
가야산 유행에 나섰다. 
9월에 박찬(朴澯), 이인개(李仁愷), 김면(金沔), 이기춘(李起春), 곽준 등과 더불어
가야산(伽倻山)의 해인사(海印寺)를 유람하고 돌아와 모재(茅齋)에 도착하였다. 

38세 때(1580년, 경진) 창녕현감에 제수되어 첫 벼슬길에 나아갔다. 
    임지로 떠나기 전 임금이 정구(鄭逑)를 보고 '목민관이 되어 무엇을 먼저 해야 되는가'
    라고 물었다. 정구는 '옛사람들이 백성 보살피기를 갓난 아이 보살피듯 하라고 하였으니
   신은 어리석으나 이 말을 실천하겠습니다'라고 대답하고 임지로 떠났다.

그 후로도 지례(知禮)·동복현감(同福縣監), 사헌부 지평(持平), 공조·호조정랑, 고부(古阜)·
함안 통천(咸安通川)·영월군수(寧越郡守), 강릉(江陵)·홍천 안동부사(洪川安東府使),
승정원 부승지(副承旨)와 우승지(右承旨), 형조참의, 충주(忠州)·해주(海州)·
광주목사(光州牧使), 강원(江原)·충청(忠淸)·경상도사(慶尙都事), 형조(刑曹)·
공조참판(工曹參判) 등을 차례로 역임한 후 광해군 즉위 초인
1609년 사헌부 대사헌(大司憲)에 발탁되었다.

41세 때(1583년, 계미) 창평에 회연초당(檜淵草堂)을 지어 제자들과 더불어
    월삭강회계(月朔講會契)라는 모임을 만들어 규약을 정하고 학문에 정진하였다.
    그 해 강원도사, 충청도사 등에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고,

    창평에 회연초당(檜淵草堂)을 지어 제자들과 더불어
    월삭강회계(月朔講會契)라는 모임을 만들어 규약을 정하고 학문에 정진하였다.

44세 때(1586년, 병술) 함안군수로 부임하여 옛날 좋은 풍속을 되살리고 낡은 행정의
    폐단을 고치며 각종 저울들을 통일하여 백성들의 세금을 감해주고 백성들의 억울한 
    사정이 없도록 시정했다. 
    겨울에 함안군수로 있으면서 오운과 사직단(社稷壇)을 중수하는 일을 의논하였다. 

이어 영창대군 사사, 인목대비 폐비 등에 대하여 불가하다는 상소를 누차 하였으나 
광해군은 듣지 않았다. 이런 일로 다시는 조정에 발을 들이지 않고 고향에서 제자들을
양성하며 자연을 벗삼아 유유자적하게 생을 보내게 된다.

그는 대사헌이 되었을 때 정인홍 등으로 인해 임해군의 옥사가 일어나자 삼사가
모두 일어나 처벌할 것을 청하였으나, 
사헌부 책임자인 그 자신만이 이에 관련된 모두를 용서하라는
상소를 여러 차례 올린 후 관직에서 물러나 성주로 귀향하였다. 

그후 고을 어진 선비들과 군지인 {함주지}를 편찬하였고,
만년에 노곡정사(蘆谷精舍)·사양정사(泗陽精舍) 등을 건립하여 유유자적하면서 시문을
즐기던 그는 경학을 비롯하여 산수(算數)·병학(兵學)·의약(醫藥)·예학(禮學)· 
지리(地理) 등에 능통하여 40여 권의 저서를 남겼으니

(주자서절요강목(朱子書節要綱目)·(심경발휘(心經發揮) · (경현속집(景賢續集) ·
(고금인물지(古今人物志) · (의안집방(醫眼集方)·(관동지(關東志)]·[관의(冠儀)] 등이
대표적인 저서이다. 그 중 심경발휘(心經發揮) · (오복연혁도(五服沿革圖) ·
(심의제도(深衣制度) 등의 책이 세상에 행하고 있다.

특히 예학(禮學)에 조예가 깊어 {오선생예설(五先生禮說)}을 찬 하였는데,
늙어 병이 위독한 지경에 이르러서도 오히려 상고와 교열을 그치지 않았다.
소시(少時)에 오덕계(吳德溪)의 소개서를 가지고 퇴계선생을 예안(禮安)으로
찾아뵈었는데 퇴계 선생이 덕계에게 답한 편지에 '이 사람은 후대에 견줄 사람이
없을 것이다. 

다만 부화(浮華)하고 경솔한 하자가 있을까 우려될 뿐이다.' 하였는데,
늙어서 항상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노선생(老先生)이 병증(病證)에 대해 따끔하게
경계하신 한 말씀을 종신토록 갈고 닦았으나 제대로 고쳐지지 않았으니,
이로써 사람의 타고난 병통은 변화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을 알겠다." 고 하였다. 

45세 때(1587년)  이대기(李大期)가 도동정사(道洞精舍)에 최영경(崔永慶)을 뵙고,
     안군수로 있던 정구(鄭逑), 하수일(河受一)과 더불어  (주례)를 공부하였고,
     이정(李瀞)이 정구(鄭逑)에게 글을 보냈다.

 46세 때(1588년) 청향당 이원을 위한 서원이 신안(新安)에 세워졌으며, 신안서원
    낙성식 때 당시 함안군수로 있으면서 죽림정사로 이광우를 방문하였다.

48세 때(1590년) 이승(李承) 및 여러 사우와 더불어 회연(檜淵)에 모여 (근사록)을 공부하였다

50세 때(1592년, 임진) 풍천군수로 있을 때,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이 때 정구는 의병을 일으켜 적을 토벌하고 각 고을에 격문을 띄워 의병들로 하여금
    적을 공격하게 하여 왜적이 침입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65세 때(1606년) 가을에 덕천으로 성여신을 방문하였고, 중건한 덕천서원을 참배하러
    갔다가 이광우의 죽림정사를 방문하였다. 
66세 때(1608년) 광해군이 즉위하여 대사헌(大司憲)을 제수하였다. 
    그러나 임해군을 죽여서는 안 된다는 상소를 하고 뜻대로 되지 않자 곧 사직하고 말았다.

 71세 때(1613) 계축옥사가 일어나자 영창대군을 구제하려고 다시 상소를 하기도 했으며,
    관직에 나서기에 앞서 일찍이 성주 창평산(蒼坪山) 기슭에 세웠던 한강정사(寒岡精舍)
    곁에 회연서당(檜淵書堂)을 새로 지어 백매원(百梅園)이라 명명하고
    이곳에서 허목, 장현광 등 많은 문인들을 가르치면서 여생을 보냈다. 

78세 때(1620년, 경신) 사양정사(泗陽精舍) 지경재(持敬齋)에서 세상을 떠났다.
이 때에 이르러 사상(泗上)의 지경재(持敬齋)에서 일생을 마치니, 장례에 참석한 사람이
4백여 명이나 되었다. 그가 세상을 떠나기 전 해에 가야산(伽倻山)의 북쪽 산부리가
무너졌으며, 세상을 뜨던 날에는 목가(木稼)의 이변이 있었는데,
사람들이 그가 별세할 징조라고 하였다.

실록의 졸기에 의하면, "전 대사헌 정구(鄭逑)가 졸 하였다.
그는 성주(星州) 사람으로 한훤선생(寒暄先生)의 외손이다. 
어려서는 덕계(德溪) 오건(吳健)을 스승으로 모셨고,
겸하여 퇴계(退溪)와 남명(南冥)의 문하에 드나들었다.

일찍이 말하기를 '퇴계는 덕우(德宇)가 혼후(渾厚)하며 행실이 독실하고,
남명은 재기(才氣)가 호걸스럽고 고매(高邁)하여 우뚝 서서 홀로 행하는 어른이다.'
하였는데, 그가 마음에 정한 견해가 그러하였다. 

그는 어려서부터 학문을 게을리 하지 않았는데, 선묘조(宣廟朝)가 여러 번 불러들이고서야
등대(登對)하고서 맨 먼저 '근독(謹獨)은 제왕이 다스림을 내는 근본이 된다.'고 진달하니, 
선조가 칭송하기를 '그대 이름은 헛되이 얻어진 것이 아니로구나.' 하였다.

그는 주(州)·군(郡)을 두루 맡았고, 조정에 들어와서는 지평·승지가 되었으며,
강원도 관찰사를 지냈다.
광해군 때에는 불러 들여 대사헌에 제수했는데 임해군(臨海君)의 옥사 때에 상차를
올려 맨 먼저 골육의 은혜를 온전히 할 것을 청하니,
광해군이 아름다움을 훔치고 이름을 산다고 하였다.

이 일로 말미암아 상의 뜻을 거슬러 고향으로 돌아갔다. 계축옥(癸丑獄)이 일어나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유치(幽置)하자, 공이 봉사(封事)를 올렸는데,
춘추(春秋)를 인용하기를, '왕자 영부가 죽자 공자가 쓰기를 '천왕(天王)이 그 아우 영부를
죽이다.'라고 하였는데, 그

의 죽음이 애당초 경왕(景王)이 한 것은 아니지만 다만 금지하지 못해서 였습니다. 
이에 대해 좌씨(左氏)는 '죄가 왕에게 있다.' 하였고, 곡량자(穀梁子)는 심하다고 하였으며,
두예(杜預)는 '골육을 잔상(殘傷)하였다.'라고 하였습니다.

지금 영창대군이 어리고 몽매하여 아는 것이 없으니, 비단 영부가 알지 못했던 것
정도일 뿐만이 아닙니다. 
그런데 조정의 의논이 그치질 않아 반드시 처치하고자 하고 있으니, 
또한 경왕이 금하지 못한 것보다 심합니다.' 하였다. 

봉사의 말이 수천 자나 되었는데, 말의 뜻이 명백하고 절실하여 사람들이 다 그를 위하여
위태롭고 두렵게 여겼다. 그때 공의 아들 장(樟)이 서울에 있었는데, 
시의(時議)가 날로 험해지는 것을 보고 헤아릴 수 없는 화를 당할까 두려워하여 마침내
그 상소를 숨기고 올리지 않았다.

그러자 공이 또 상소하였는데 말이 더욱 절실하였으며, 전에 쓴 상소도 아울러 올렸다.
공은 본디 정인홍(鄭仁弘)과 동문수학한 처지로 서로 사이가 좋았었는데, 
이 때에 이르러 흉염(兇焰)을 두려워하고 미워하여 그를 피해 거처를 옮겼다.

학자들은 그를 한강선생(寒岡先生)이라고 하였다. 백매원(百梅園)을 돌보면서 행실을
편안하고 곧게 하여 후학들을 지도하는 것으로 일을 삼았다." 고 한다.
광해군일기에는 계해반정(癸亥反正) 뒤에 관리를 보내 치제(致祭)하고 이조판서에
추증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문인(門人) 이윤우(李潤雨)가 등대(登對)하여 시호를 청하자,
마침내 문목공(文穆公)이라는 시호를 내렸던 것이다. 

회연서원 유형문화재 제51호

서원 앞 표지석
그가 세상을 떠난 후 성주의 회연서원과 천곡서원(川谷書院)을 비롯하여 
대구의 연경서원(硏經書院), 창원의 회원서원(檜原書院),
성천(成川)의 학령서원(鶴翎書院), 창녕의 관산서원(冠山書院),
충주의 운곡서원(雲谷書院), 옥천의 삼양서원(三陽書院),
현풍의 도동서원(道東書院), 함안의 도림서원(道林書院),
칠곡(漆谷)의 사양서원(泗陽書院), 통천(通川)의 경덕사우(景德祠宇) 등에 제향되었다. 

2023년 4월 일 
석암 조헌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