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목민심서[牧民心書] 목민심서는 우리나라 사람이면 누구나 한 번쯤 들어본 고서 이름이다. 그 저자가 다산 정약용[茶山丁若鏞] 선생이란 것도 알고 있다. 그리고 목민관[牧民官]으로서 행하여야 할 지침서[指針書]인 것이다. 목민심서[牧民心書]는 다산 정약용 선생이 조선조 23대왕 순조[純祖] 때 천주교 박해[迫害]로 전라도 강진에서 귀양살이하는 동안 저술[著述]한 책으로 지방관들의 폐해[弊害]를 제거하고 지방행정[地方行政]을 쇄신[刷新]하고자 했다. 내용은 목민관의 부임에서 물러날 때까지의 지방행정 전반에 관해 세세히 기술[技術]한 지방행정 술의 금과옥조[金科玉條]이다. 목민심서는 다산 정약용 선생이 정조[正祖]가 승하하자 순조 때 남인, 북인, 노론, 소론이라는 사색당파[四色黨派] 싸움의 희생양[犧牲羊]이 되어 전라남도 강진으로 귀양살이를 떠나며 유배 생활[流配 生活] 을 무려 18년간 지속되었다. 그는 긴 유배 생활 동안 한 번도 남을 원망하는 일이 없이 나라를 구하는 길은 백성을 깨우치는 일이라며 저술 활동에 몰입[沒入]하였다. 국가와 나' 나라가 있기에 나도 존재한다는 굳은 신념을 가지고 '목민심서'를 비롯해 '수원화성'에 ‘거중기’ 등 155권이라는 역작[力作]들을 저술한 것이다. 그런데 이 목민심서의 내용을 국가통치[國家統治] 이념[理念]으로 받들어 나라를 경영[經營]한 이는 베트남의 국부 호찌민이다. 호찌민은 다산[茶山]의 목민심서[牧民心書]를 탐독하고, 전란 중 피신할 때도 항상 몸에 지녔으며 죽고 난 후 하노이에 있는 호찌민 박물관에 전시되었다는 설도 있다. 그는 세계에서 가장 존경[尊敬]하는 인물로 다산을 꼽았고 다산의 기일엔 반드시 제사상[祭祀床]을 올렸으며 다산 정약용을 평생의 사표[師表]로 삼았으며, 목민심서의 내용{內用]으로 자신의 3꿍을 만들었다. 3꿍이란 함께 산다(꿍아), 함께 먹는다(꿍안), 함께 일한다(꿍땀)를 실천[實踐]하였다. 호찌민은 목민심서의 청빈[淸貧]한 삶과 민본주의를 본받아 국민과 더불어 살고 함께 먹으며 같이 일한다는 3꿍의 애민정신[愛民精神]을 실현[實現]하여 국민들의 추앙[推仰]을 받아 국부로 자리 하였다. 시집가는 딸의 행복을 비는 아버지의 애틋함이 얽혀있는 매조도(梅鳥圖보물1683호) 다산 정약용 선생님의 4언 詩 를 올려본다. 편편비조(翩翩飛鳥) 파르르 새가 날아 / 식아정매(息我庭梅) 뜰 앞 매화에 앉네 유열기방(有列其芳) 매화 향기 진하여 / 혜연기래(惠然其來) 홀연히 찾아 왔네 원지원서(爰止爰棲) 여기에 둥지 틀어 / 악이가실(樂爾家室) 너의 집을 삼으렴 화지기영(華之旣榮) 만발한 꽃인지라 / 유분기실(有賁其實) 먹을 것도 많단다. 독서[讀書]의 계절 갈바람 살랑한 창가에 앉아 목민심서를 한 번쯤--- 2021년 9월 일 석암 조 헌 섭 |
||||||
'나의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청득심 (0) | 2021.09.30 |
---|---|
알악양선(遏惡揚善) (0) | 2021.09.22 |
잠시 머물다 가는 인생 (0) | 2021.09.06 |
도문대작[屠門大嚼] (0) | 2021.08.25 |
목탁 (0) | 2021.08.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