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죽계구곡(竹溪九曲)
백두산(白頭山) 남쪽의 줄기가 동해안을 따라 내려오다 강원도에 이르러
응결되어 금강산(金剛山)을 이루고, 다시 남쪽으로 삼척에 이르러 하늘 높이
솟아올라 태백산(太白山)을 이룬다. 그리고 다시 동쪽으로 뻗어가다 남쪽으로
기운을 감싸안고 솟으니 바로 소백산(小白山)이다. 그 아래 한 가닥 산맥이
돌아서 그윽하고 깊숙한 골짜기를 이루어 맑은 물이 앞을 휘감아 흐르니
이것이 죽계(竹溪)이다.
고려 후기의 명현이고 문인(文人)인 근재 안축(,1287~1348)은 일찍이 죽계의
아름다움을 죽계별곡(竹溪別曲)으로 읊었다.죽계구곡이 형성된 후 많은
문인들이 죽계구곡을 찾아서 완상하며 경관을 예찬하였다.
이야순은 자신의문집에서
또 소백산에 들었는데, 죽계구곡竹溪九曲에 굽이를 따라서 돌에 새긴 것은
퇴계 선생이 손수 적은 것이 아니고 후인이 잘못 전한 것이니 글을 지어
바로잡았다.
비류암飛流巖은 선생의 시문이 일찍 미친 곳이나 드러나지 않고 전하지 않는
것이니 당시의 「유록(遊錄)」을 질정하여 그 장소를 알아냈다.
선조의 자취가 이른 곳은 비록한 물 한 돌의 미미함이라도 반드시 깊이 살피고
널리 드러내는 것이 모두 이러한 종류이다..
죽계구곡은 순흥부 동쪽 2리에 있다. 1곡은 백운동 취한대, 2곡은 금성반석,
3곡은 백자담, 4곡은 이화동, 5곡은 목욕담, 6곡은 청련동애, 7곡은 용추비폭,
8곡은 금당반석, 9국은 중봉합류이다. 주세붕의 죽계지에 상세히 실려있다.
처음 반석(盤石)에 제1곡을 새기고 시내를 따라서 내려가며 끝 이점(梨店)에
제9곡을 새기니 그 사이가 겨우 5리 정도이다. 시내가 길고 굽이가 많아 가장
기이한 경치를 취한 것이 마땅히 그치지 않았으니 아홉 굽이를 새긴 것이
아마도 너무 짧다.
무이구곡은 처음 동구(洞口)에서 거슬러 올라가 원두(源頭)에 이르니 동구가
제1곡이 되고 원두가 제9곡이 된다. 이것은 이른 바 죽계구곡과 상반된다.
지금의 소견으로 마땅히 백운동(白雲洞) 취한대(翠寒臺)에서 처음 1곡을 삼고,
금성반석(金城盤石)을 2곡으로 삼고, 백자담(栢子潭)을 3곡으로 삼고,
이화동(梨花洞)을 4곡으로 삼고, 목욕담(沐浴潭)을 5곡으로 삼고,
청련동애(靑蓮東崖)를 6곡으로 삼고, 용추(龍湫)를 7곡으로 삼고,
금당반석(金堂盤石)을 8곡으로 삼고, 중봉합류(中峯合流)를 9곡으로 삼아
비로소 여기에 기록하여 후인을 기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