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 윤봉길
모레 4월 29일은 매헌(梅軒) 윤봉길(1908~32) 의사의 중국 상하이(上海) 훙커우(虹口)공원 의거 85주년을 맞는 날이다. 일제강점기 짓눌렸던 한국인의 마음을 시원하게 뚫은 쾌거임을 모르는 이는 거의 없다. 스물다섯 청년 윤봉길은 85년 전 그날 일왕 탄생일을 기념하던 일본군 수뇌부에 수통형 폭탄을 던졌다. 1909년 10월 안중근(1879~1910) 의사의 하얼빈 의거에 이어 대한독립에 대한 열망을 표출했다.
중국 국민당을 이끌었던 장제스(蔣介石·1887~1975)가 그랬다. 의거 직후 “중국의 100만 대군도 하지 못한 일을 조선의 한 청년이 해냈다니 감격스럽다”고 했다. 윤 의사에 대한 고마움에서 중국에 있던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전폭 지원하기도 했다. 이런 흐름은 1943년 12월 한국의 독립이 국제적으로 처음 보장받은 카이로 선언까지 이어졌다. 덕산면에서 해마다 열리는 ‘윤봉길 평화축제’에 8년째 참가하고 있다. 29~30일 이틀간 진행되는 올해 축제에도 하얼빈 안중근기념관, 하얼빈 731부대 죄증진열관 관계자 등 네 명이 찾아온다. 세균 마루타 부대 등 일제의 만행을 설명하고, 동북아 평화음악제 등 부대행사에도 참여할 예정이다. 안중근 의사가 순국한 뤼순(旅順)감옥 관계자 등 10여 명이 찾았다. 그 전에도 상황은 비슷했다. 한국의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 체계 배치 결정에 따른 중국 측의 반발, 혹은 몸사림이란 말이 들려온다. 남긴 말이다. ‘장부가 집을 떠났다면 뜻을 이루기 전에는 살아 돌아오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청년 윤봉길의 결기가 지금 되레 새롭다. ‘장부가 세상에 처함이여, 그 뜻이 크도다’는 안중근 의사의 ‘장부가’도 떠오른다.
개인은 물론 국제관계도 그런 큰 뜻이 중요하다. 위기의 동북아 정세를 풀어 갈 열쇠가 된다. 일제의 기만책에 따라 한국과 중국의 농민이 유혈 충돌했던 1931년 만보산(萬寶山) 사건을 해결한 계기도 윤 의사의 의거 덕분이었다. 눈앞의 소리(小利)에 양국의 대리(大利)를 쪼그라뜨린 중국의 태도가 아쉽기만 하다. |
'역사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쌍책면 마을이름 유래” (0) | 2017.08.25 |
---|---|
임청각(臨淸閣ㆍ보물 182호) 석주(石洲) 이상룡(李相龍1858년~1932) (0) | 2017.08.16 |
히틀러 이후 70년 … 독일인은 매력적인 국민 (0) | 2017.02.17 |
어사 박문수[御史 朴文秀] (0) | 2016.10.18 |
훈맹정음[訓盲正音] (0) | 2016.07.0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