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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선 네거티브의 역사

by 석암 조헌섭. 2012. 7.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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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선 네거티브의 역사 

“영남 물품 불매” 지역갈등 첫 사례 … 이회창 후보, 병역문제로 두차례 고배

 손국희 기자

네거티브(Negative) 선거. 상대방을 비난하거나 약점을 집요하게 부각시켜 지지율을

 떨어뜨리는 선거전 방식입니다. 우리나라의 역대 선거에서 이 네거티브전(戰)은 여야

가릴 것 없이 선거전 초반 기선 제압을 위해, 또는 열세를 극복하기 위한 비책(秘策)으로

 활용돼 왔습니다.

 5개월 뒤 있을 18대 대통령 선거(12월 19일)를 앞두고 과거 대선 때의 네거티브

사례를 정리해 봤습니다.

손국희 기자 <9key@joongang.co.kr>

신익희 후보의 선거차량. ‘못 살겠다 갈아 보자’는

 구호는 대선 네거티브의 원조였다.

“못 살겠다 갈아보자”(3대 대선)

귀에 익은 구호다. 1956년 3대 정·부통령 선거 때 등장했다. 요즘 선거전 구호에 비하면

  약하지만 네거티브 구호의 ‘원조’ 격이랄 수 있다. 당시 민주당 신익희 후보의 선전부장

 조재천은 ‘못 살겠다 갈아보자’는 구호를 만들어 전국 곳곳에 내걸었다. ‘이승만 심판론’

이었던 셈이다.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타격을 받은 이승만 정권은 서둘러 “갈아봤자 더 못산다”는 구호와 ‘반공’ 담론으로 반격에 나섰지만 효과를 보진 못했다.

  선거일 열흘 전 신익희 후보가 급서하면서 판세는 바뀌었다. 이승만 대 조봉암의

 대결로 좁혀졌고 결국 504만 표를 얻은 이 후보가 216만 표를 얻은 조 후보를 누르고

 승리한다.

고인이 된 신익희 추모표(무효표)도 185만 표 가까이 나왔다.

“정부 안에 여순사건 관련자가 있다”(5대 대선)

5대 대선의 ‘색깔공세’ 표적은 박정희 후보였다.

 그의 남로당 경력, 여순사건 후 좌익 가담 혐의가 도마에 올랐다.

본격적인 네거티브전은 1963년 5대 선거에서 시작됐다. 타깃은 박정희 당시 공화당

 후보였다.

  전북 유세에 나선 윤보선 신민당 후보가 폭탄 발언을 했다. “정부 안에 여수·순천사건

관련자가 있다. 박정희 후보의 민주주의에 대한 신봉을 의심한다.”

박 후보의 남로당 경력, 여순사건 후 좌익 가담 혐의로 군사 재판에서 중형을 선고받은

 이력을 거론한 것이다. ‘빨갱이’ ‘(공산) 혁명’이란 말도 선거 기간 심심찮게 등장했다.

 박 후보는 “나는 지금 테러를 당하고 있다. 내가 ‘빨갱이’라면 이 나라가 2년 동안 빨갱이 치하에 있었단 말이냐”고 반박했다. 공화당은 신민당의 공세를 ‘매카시즘 수법’이라 맞섰다.

 결과는 15만 표 차. 박 후보의 신승이었다. 윤 후보의 ‘색깔 공세’가 판세를 바꾸지

못한 것이다.

“호남에서 영남 물품 불매한단다”(7대 대선)

군중 앞에서 연설하는 김대중 후보. 그도 ‘지역감정’을

 필두로 한 네거티브 공세에서 자유로울 순 없었다.

공화당 박정희 후보와 신민당 김대중 후보가 맞붙은 1971년의 제 7대 대선에선 ‘

 지역감정’이 네거티브전 전면에 등장했다.
김 후보는 ‘호남 소외론’으로 당시 발전이 상대적으로 더뎠던 호남 지역 유권자의 표심을

 파고 들었다.

선거일 직전 영남 지역에선 “호남에서 영남인이 만든 물품을 불매하기로 했다”는 등의

내용이 담긴 전단지가 돌아다녔다.

‘신라 대통령’이라는 말도 나돌았다. 호남 지역에서 압도적인 지지를 얻고 있는

 김 후보를 겨냥한 네거티브 캠페인이었다고들 한다. 영호남 지역 갈등을 부추긴

 최초의 선거라는 분석도 있다.

 유세장에서 김 후보의 경호원과 경찰 간 폭력 사태도 발생했는데, 이를 두고 “김 후보

 주변에 깡패 집단이 서성이고 있다”는 말들도 퍼져나갔다.

 선거 결과 634만여 표를 얻은 박 후보가 539만 표를 얻은 김 후보를 물리치고 당선됐다.

“노태우는 비(非)보통사람”(13대 대선)

13대 대선은 양 김(金)의 분열, 노태우 후보와 양 김의

 비방 속에 네거티브로 얼룩졌다.

13대 대선은 민정당 노태우 후보가 87년 6·29선언을 발표한 뒤 치러졌다. 오랜만의

 직선제여서인지 상대 후보에 대한 원색적인 비난이 두드러졌다.

 단일화에 실패한 민주당 김영삼, 평민당 김대중 양김(金) 후보는 ‘보통사람’이라는

캐치프레이즈를 내건 노태우 후보를 ‘4성(星) 장군에 보안사령관을 지낸 비 보통 사람’

‘선거 자금을 많이 쓰는 특별한 사람’이라고 비난했다.

 

 노 후보 측도 김영삼 후보에 대해선 ‘비서 정치나 할 사람’ ‘용어도 제대로 구분할 줄

모르는 귀족 정치인’, 김대중 후보에 대해선 ‘과거가 위험한, 혼란만 가져올

 인물’이라고 공격했다. 이런 내용을 담은 만화 책자도 뿌려졌다. 여성 편력까지 거론될

 정도로 네거티브전은 과열됐다.

 양김 후보 간 비방도 심했다. 김대중 후보 측은 김영삼 후보가 단일화 과정에서

‘군(軍)이 김대중을 비토한다’고 한 말을 거론하며 ‘군의 눈치나 볼 사람’이라고 했고,

김영삼 후보 측은 “시간과 장소에 따라 말이 다른 인물”이라며 김대중 후보를 공격했다.

 양김의 분열 속에 선거는 노 후보의 승리로 막을 내렸다.

“현대에서 공중전화 카드를 뿌린다”(14대 대선)

(왼쪽부터) 정주영·김대중·김영삼 후보. ‘비방을 피하고

 정책 대결을 하겠다’던 후보들의 다짐은 오래가지 못했다.

민자당 김영삼, 민주당 김대중, 국민당 정주영 후보는 선거 초반 “상호 비방을 피하고

 정책 대결을 펼치겠다”고 선언했지만 약속은 오래 가지 못했다. 폭로와 비방이 난무했다.

 김영삼 후보는 김대중 후보엔 색깔론을, 정주영 후보엔 금권 선거 의혹을 연일 제기했다.

 992년 12월 민자당은 “정주영 후보와 국민당이 유권자 600만 명에게 거액을 살포할

 계획이라는 정보를 입수했다”고 주장한다. 또 “현대계열사가 지역 주민들에게 공중전화카드를 뿌리고 다닌다”며 정 후보를 공격했다. 김대중 후보에 대해선 “북한의 노선을

 답습하고 반미투쟁을 강화할 위험이 있다”고 했다.

 정주영 후보는 부산·김해 유세에서 “김영삼 후보는 국민당 선거 운동원들을 다 잡아

넣고 자신은 관권의 보호를 받으며 뛰고 있다. 유례없는 관건선거”라고 주장했다.

 ‘이중인격자’ ‘새대가리’라는 말도 했다.

 김대중 후보는 김영삼 후보가 군사정권과 ‘뗄 수 없는 관계’라는 점을 부각했다.

 김 후보 측은 유세 내내 “김영삼이 ‘구국의 결단’이란 명분을 내걸고 군사정권과 야합했다.

민주주의를 후퇴시킨 김 후보가 이제 와서 6공과 거리를 두는 건 어불성설”이라고

 비난했다.

 승자는 김영삼 후보. 하지만 후보 간 난타전으로 세 후보 모두 각각의 부정적 이미지를

국민들에게 강하게 각인시키는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다는 평가다.

“병역비리, 벌써 터뜨리면 어떻게 하나”(15대 대선)

15대 대선에선 이회창 후보 두 아들의 병역비리 의혹이

 처음 제기됐다. 김대중 후보도 ‘건강이상설’로 곤욕을 치렀다.

97년 15대 대선에선 선거일 5개월을 앞두고 신한국당 이회창 후보의 두 아들 정연·수연씨의 병역 의혹이 제기됐다.

 

국민회의 김영환 의원이 이 의혹을 제기하자 당시 정동영 대변인은 “그걸 지금 벌써

  터뜨리면 어떻게 하느냐”며 안타까워했다는 뒷얘기도 있다.

  ‘비장의 카드’였단 얘기다. 이 후보의 두 아들이 1차 신검에서 1급을 받고도 최종

신검에서 5급 판정을 받은 게 의혹의 단초가 됐다. 논란의 핵심은 두 아들의 몸무게였다.

 

장남 정연씨는 키 179cm에 몸무게 45kg(면제기준 49kg)으로, 차남 수연씨는

키 165cm에 몸무게 41kg(면제기준 42kg)으로 군 면제를 받았다.

 이 후보는 미국에서 유학 중이던 차남 수연씨를 귀국시켜 ‘신체 검사’를 공개적으로

 해보이고, 장남 정연씨를 소록도 자원봉사에 보내는 등 진화에 나섰지만 돌아선 민심을

 뒤집지는 못했다.

 병역파동 후 이 후보의 지지율은 20%대로 급락했고, 김 후보는 1위를 지켜나갔다.

 고령인 김 후보의 건강 문제를 겨냥한 공격도 나왔다. TV 토론회에서 김 후보가

보청기를 끼고 있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다. 상대적으로 젊은 국민신당 이인제 후보는

 ‘일반 기업에서도 신체검사는 필수다, 대통령은 누구보다 건강해야 한다’고 자주 언급했다.

 네거티브 홍수 속에서 김대중 후보가 1032만 표를 받아 야당에 의한 첫 정권교체가

 이뤄졌다. 이회창 후보는 993만 표로 2위에 머물렸다.

“병역비리 담긴 테이프 공개하겠다”(16대 대선)

16대 대선 정국을 휩쓴 김대업씨의 녹취 테이프. 병역비리 의혹 속에 이회창 후보는 대권의 꿈을 접어야 했다.
16대 대선에서도 병역 문제는 또 제기됐다. 이른바 ‘2차 병풍(兵風)’. 2002년 7월 31일

 의무부사관 출신인 김대업씨가 기자회견을 자청했다.

  한나라당 후보로 대권 재수에 나선 이회창씨의 장남 정연씨 병역 비리에 이 후보의 부인 한인옥씨도 연루돼 있다고 주장했다.

병역 비리 내용이 담긴 녹취록도 있다고 했다. 당시 한나라당 남경필 대변인은 “정치공작

 전문가들이 김대업이란 사기전문가를 회유해 허위사실을 날조한 것”이라고 반박했다.

 김씨의 ‘전과 5범’ 전력도 공개했다.

 8월 12일 김씨는 전 국군수도통합병원 부사관 김도술씨와 자신의 대화라며 녹취테이프를 검찰에 제출하고 내용을 일부 공개했다. 김도술씨가 한인옥씨로부터 병무청 옆 다방에서 2000만원 가량의 현금을 받고 정연씨의 병역면제를 알선해줬다는 내용이라고 했다.

김씨는 30일 추가 녹취테이프를 검찰에 제출했다.

 검찰이 국립과학수사연구소 등에 감정을 의뢰한 결과 녹취테이프는 ‘판독 불능’이었다.

검찰은 음질이 양호하지 못해 목소리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밝혀낼 수 없고, 따라서 그

테이프가 증거능력을 가질 수 없다는 판단을 내렸다.

김씨는 2004년 2월 27일 수사관 자격 사칭과 명예훼손 혐의로 징역 1년10월의 형을 받았지만 선거는 이미 끝난 뒤였다. 선거 기간 김씨 외에도 산부인과 의사 김창규씨가 『179cm, 45㎏ 인간 미이라』라는 책을 출간해 이 후보를 비방했다.

 김씨는 선거법 위반 혐의로 기소돼 징역 8월, 집행유예 2년의 처분을 받았다.

 이 후보는 새천년 민주당 노무현 후보에 57만 표 차이로 패배했다.

“이명박 후보는 BBK 실소유주”(17대 대선)

서울중앙지검으로 소환되는 김경준. BBK 의혹은 17대

 대선의 최대 화두였지만 ‘이명박 대세론’을 뒤집진 못했다.

17대 대선에선 ‘BBK 사건’이 핵심이었다. 99년 재미교포 김경준씨가 BBK라는 회사를

 설립해 주가 조작으로 주주들에게 피해를 입혔는데 여기에 이명박 한나라당 후보가

연루돼 있다는 의혹이었다.

 

 한나라당 내 경선 과정에서 불거진 BBK의혹 공방은 이후 ‘이명박 대세론’이 굳어지고

있던 상황에서도 계속됐다. 대통합 민주신당 정동영 후보 측은 김씨의 누나 에리카 김과

 부인 이보라씨와 함께 “이 후보가 BBK의 실제 소유주이며 김경준씨가 피해자”라고

 공격했다. 이 후보는 “자신도 김경준에게 사기를 당했다”고 반박했다.

 검찰은 12월 5일 수사 결과 발표를 통해 모든 의혹에 대해 무혐의 결론을 내렸다.

 대선 사흘 전 민주신당 측은 이 후보가 2000년 대학 강연에서 “내가 BBK를 설립했다”고 발언한 동영상을 공개했지만 파급력은 크지 않았다.

 이 후보는 48.7%의 지지를 얻어 26.1%에 그친 정 후보를 꺾고 당선됐다. 한나라당

경선부터 대선까지 1년여 동안 집요하게 이어진 BBK 공방으로 정책 검증이나 공약대결은 실종된 선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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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입력 2012.07.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