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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처럼 고결한 축복의 시, 백석 탄생 100주년 미공개 시·산문 실린 문학전집 새로 나와 분주하답니다. 1912년 7월 1일 평안북도 정주 태생이시니, 올해로 꼭 탄생 100주년이군요. 어느 시인은 올해를 “개교 100주년”(안도현, ‘백석학교’)이라고 표현했더군요. 옳다구나 싶었습니다. 선생님은 한국 서정시의 오래된 학교였으니까요. 『문장』 1939년 6월호에 실린 정현웅(1911~76) 화백의 백석 프로필과 메모. 일반에 처음 공개된 자료다. 정 화백은 이 프로필에서 “미스터 백석은 서반아 (스페인) 사람도 같고 필립핀(필리핀) 사람도 같다”고 묘사하고 있다.. [사진 서정시학] 김소월도 윤동주도 서정주도 아닌, 백석만의 모던한 서정이 후대 시인들에게 미친 영향은 지대했지요. 안도현 시인은 “내 시의 사부는 백석”이라고 대놓고 말을 합니다. 한국 서정시의 적자(嫡子)라는 문태준·장석남 시인 등도 선생님의 영향을 부인하지 않습니다. 사실 87년 민주화 이전만 해도 남쪽에서 선생님의 시는 금서(禁書)였습니다. 선생님이 해방 이후 북한에 정착했기 때문입니다. 해방 이전에 마음의 결을 노래했던 선생님은 해방 이후 북한에서는 체제를 옹호하는 시와 산문을 주로 발표하셨죠. 냉전 시대의 한국에서 그런 선생님의 시가 널리 읽힐 수 없었던 건 당연해 보입니다. 물론 그 시절에도 남쪽의 영민한 ‘문청’들은 몰래 선생님의 시를 필사해가며 백석의 제자가 되기를 자청했지만요. 하지만 88년 선생님의 시가 해금(解禁)된 이후 ‘백석’이란 이름은 국문학자나 시인들에게 넓고 깊게 공유되는 이슈가 됐습니다. 선생님의 시를 발굴하고 재해석하려는 노력이 얼마나 치열했던지 지난 20여 년간 발굴된 선생님의 시가 144편에 이릅니다. 번역시 208편, 번역소설 6편, 단편 3편 등도 발굴돼 알려졌고요. 최근 선생님의 탄생 100주년을 기념해 『백석 문학전집 시·산문』 (서정시학, 전 2권)이 새로 나왔는데, 이 책에도 미공개 작품이 발굴돼 실렸습니다. 시는 ‘등고지’(1957) ‘천년이고 만년이고……’(1960) ‘조국의 바다여’(1962) 3편, 산문은 ‘체코슬로바키아의 산문 문학 소묘’(1957) ‘문학신문 편집국앞’(1959) ‘관평의 양’(1959) ‘가츠라 섬을 그리워하실 형에게’(1961) 4편입니다. 모두 한국전쟁 이후 발표된 것들입니다. 선생님이 북한에 정착하고,
아동문학과 번역문학에 집중하던 시기입니다. 예컨대 ‘이 영웅을 수령으로 받들었던 인민을 부러워하리라’ (천년이고 만년이고…)와 같은 구절이 그렇지요. 1930년, 열여덟에 조선일보로 등단한 선생님은 첫 시집 『사슴』(1936)에서 보이듯 모던하고 서정적인 시 세계를 펼쳤습니다. 하지만 분단 정국은 선생님의 문학을 위협했습니다. 57년 북한에서 아동문학 논쟁이 벌어졌을 때, 선생님은 계급성 대신 창작성을 강조하다 ‘부르주아 잔재’로 몰려 양강도 삼수 관평리로 보내졌습니다. 63년부터는 아예 글을 쓰지 않았고, 95년까지 삼수에서 양치기로 지내다 83세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천재 시인’의 문학은 쓸쓸히 사라졌지만, 백석이라는 시의 나무는 울창한 숲을 이뤘습니다.“대상을 바라보기만 한 게 아니라 대상 너머에 무엇이 있는가 탐색했던”(서울여대 이숭원 교수) 선생님의 시 세계가 백석 탄생 100주년을 맞이한 한국 문단을 새삼 들뜨게 합니다. ‘가난한 내가/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오늘 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나와 나타샤와 당나귀)고 노래했던 선생님, 우리가 백석의 시를 사랑해서 한국 문학에 눈처럼 고결한 시가 쏟아지면 좋겠습니다. 2012.06.22 정강현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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