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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인물(72)

"대소헌 조종도(大笑軒 趙宗道)"

by 석암 조헌섭. 2013. 11. 7.

"대소헌 조종도(大笑軒 趙宗道)"
 
 조종도(趙宗道, 1537∼1597)의 자는 백유(伯由)이고, 호는 대소헌(大笑軒)이며, 

본관은 함안(咸安)으로 시호(諡號)는 충의(忠毅)이다. 

그는 1537년(중종 32년 정유) 2월 5일 축시(丑時)에 함안군 군북면 원북동에서

아버지 참봉(參奉) 공언(公堰)과 어머니 진양(晋陽) 강씨(姜氏; 熙臣의 딸)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의 문집은 {대소헌집(大笑軒集)}이 있다.

 

9세 때(1545년) 은군자인 정두에게서 글을 배웠다.

그가 글을 처음 배울 때 스승이 애써 가르치지 않아도 문장을 환하게 깨닫고

힘써 공부하므로 정(鄭)선생이 크게 기뻐하였다.

 

16세 때(1552년) 봄에 남성(南省)에 갔다가 고숙(姑叔)인 상사(上舍; 進士)

    신홍국(申弘國)의 집에 머물러 글을 배웠다. 

    신흥국이 다른 아이 같이 대하지 않고 또한 선생도 예의로써 모셨다. 

   판부사를 지낸 신잡(申 ) 등도 이 때 같이 배웠으나 그 때 선생의 인품과

재주에는  따르지 못했다고 한다. 


18세 때(1554년) 어려서부터 총명이 과인(過人)하니 책을 한 번 대하면 단번에

    외우는 특출한 재주가 있었다. 경서(經書), 사기(史記), 자집(子集), 예문(禮文) 등

    해석하지 못한 것이 없었다.  또한 글짓는 재주가 뛰어나서 붓을 잡으면 도

    도히 흐르는 강하(江河)와 같아  사람들이 놀랐다고 한다. 

 

22세 때(1558년) 생원회시에 합격하였다.  참찬(參贊)이 일찍이 말하기를

   '동국(東國)의 인물은 다 우리집 소유'라 했으니 그 뜻은 사위들이 뛰어나

    모두 관로(管路)에 쟁쟁(錚錚)한 이름을 날렸기 때문이었다. 


    그는 사람됨이 뜻이 크고 기이한 기운이 있었으며, 술을 좋아하고 농담과 웃음을

    즐겨 자신의 호를 대소헌(大笑軒)이라 하였다.소소한 절도에 얽매이지 않으니

    사람들이 혹 광인이라고 하나 백유는 태연하였다. 

 

23세 때(1559년) 봄에 남명선생을 배알하였다. 그의 빙장(聘丈) 이공(李公)은

    남명선생의 생질이 되며 이러한 인연으로 문하에 출입이 잦았고  

    청문(請問)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29세 때(1565년) 남명선생을 따라 지곡사(智谷寺)를 유람하였는데

   오건, 도희령, 권문임, 정구(鄭構) 등의 제현들이 모였고 단속사(斷俗寺)로 따라가

   경의(敬義)를 강론하였다.  그해 9월에 오건, 조종도 등이 운학정(雲鶴亭)으로 찾아왔다.


30세 때(1566년) 2월에 남명선생을 모시고 단속사에서 회합하였다.

    그 때 이정(李楨)은 순천부사로 있으면서 같이 만나 의리를 강론하였고

    3월에는 남명선생과 노진(盧 )을 모시고 안의 갈계리로 임훈(林薰)형제를

    방문하고서 안의(安義) 삼협(三峽)을 구경하였다.

 

    이 때 하항(河沆), 하응도, 이정(李瀞) 등이 함께 하였다. 

    이 해에 이정(李楨), 김우옹, 강익, 정유명, 정구(鄭逑), 조종도, 이광우 등과 더불어

    남명선생을 모시고 단속사(斷俗寺)에서 산천재(山天齋)로 모였다. 

 

38세 때(1574년) 여강서원(廬江書院)을 배알하였는데 김성일(金誠一), 유성룡(柳成龍),

     권호문, 남치리(南致利) 등과 도의(道義)를 강론하고 이학(理學)을 토론하였다.

41세 때(1577년, 정축) 안기(安奇)에서 권호문을 방문하였다.   

 

40세 때(1576년, 병자) 선위사(宣慰使)에 수행(隨行)하여 일본 사신 승(僧)

    현소(玄蘇)를 송별하였다.

    선위사와 현소는 서로 시(詩)로써 화답하는데 일본 사신의 태도가 심히 교만하였으나

    선생의 시를 받아서는 벽 위에 걸어놓고 재배하며 읽었다고 한다. 


47세 때(1583년) 경기도 양지현감(陽智縣監)에 제수되었다.

    그 때 조정에서는 사헌부 지평을 제수하기로 되어 있었으나 지지하는 사람의 말에 따라

    현감으로 나가게 되었다. 

 

48세 때(1584년) 어사의 보고에 따라 의복일습(衣服一襲)의 포상을 받았다.

    어사의 보고에는 '거관(居官)에 청렴결백하고 백성을 어질게 다스렸다'고 하였다.
49세 때(1585년) 가을에 양지현감을 사직하고 돌아왔고 4월 29일에 "양지현감 조종도는

    정사가 평이하였고 백성을 부림에 있어 수월하게 하였으므로 모든 폐추되었던 일들이

    점차로 잘 시행되고 있었다."({宣祖實錄} 18년)고 한다. 

51세 때(1587년) 봄에 사정에 따라 관직을 사임하고 낙동강에 배타고 돌아왔고,

 

52세 때(1588년) 금구현(金溝縣)에 있을 때 동헌(東軒)에 높이 앉아 아무 하는 일 없이

    보여도 청풍(淸風)이 늠름(凜凜)한 것 같았고, 법령의 까다로움과 부후(賦後)의

   가혹한 점은 선생이 사정을 고려하여 고치고 너그럽게 하여 민력(民力)을 배양하였다. 

   그리고 송사(訟事)에 있어서도 그 사건의 내용을 십분 정찰(偵察)한 연후에 재결(裁決)하였다.

 

54세 때(1590년) 4월에 선생이 체포당하여 옥에 갇혔다.

    그 때 정여립 사건이 끝나지 않아 선생도 연루자로 오인받게 되었다. 

    4월에 어명으로 선생을 옥에 가두니 사람마다 떨고 있었다.  

 

그러나 선생은 태연자약하였다. 최영경도 같은 혐의를 받고 옥에 갇혀 있었는데,

옥중에 있으면서 옥졸을 자기집 종 부리듯 호통을 하고 선생은 웃고 농담을 즐기면서

옥중생활에 평상시와 다름없이 당당하였다. 7월에 혐의가 없이 집으로 돌아왔다.

그 때 최영경은 몸이 말라 옥중에서 숨졌는데, 선생이 최영경의 말만 하여도 문득 슬퍼하였다. 

 

55세 때(1591년, 신묘) 사림들이 최영경을 남명선생의 서원에 배향하려 하였으나

    난리 중이어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56세 때(1592년) 4월에 왜군이 대거 칩입하게 되자 선생이 서울로부터 영남에 돌아와

    의병을 일으켰다. 그는 밤에 몰래 유성룡(柳成龍)을 찾았다.

 

    유성룡은 영상으로 있으면서 대란을 막아내기에 노심초사하고 있을 때라

    서로 마지막인양하고 갈렸다. 귀로에 직장(直長: 從六品職) 이로를 만나서

    같이 영남에 돌아가 의병을 조직하여 왜병을 쳐 부수기로 언약하고 함양에 도착하였다. 


57세 때(1593년) 단성현감으로 재직 중에 임진왜란의 격심한 피해로 백성은

   농사를 짓지 못하여 기근이 극심하였는데, 선생은 매일 백성들을 먹여 살리기만

   골몰하고 있었다. 실록의 기사에 의하면,

60세 때(1596년) 봄에 청풍부사(淸風府使)에 임명되었으나 병으로 부임치 못하다가

    가을에 함양군수에 임명되었다. 

 

61세 때(1597년) 함양군수로 있었다. 봄에 왜적이 다시 움직일 기세가 있었다.

선생이 체찰사 이원익에게 상서하기를, 일조(一朝)에 왜적이 밀어 닥치면 백성은

갈 곳이 없습니다.  군수는 비록 노둔하나 살기를 원하고 주검을 아깝게 여겨지지 않습니다. 

 

바라건대 본군(本郡)의 병민(兵民)을 모두 군수 권한하에 속하게 하면 요새지를 택하여

한 번 대전하고 죽고자 합니다'라고 하였다. 체찰사가 이 글을 받아 감읍하여 다 선생의

소원대로 조처하고 요새지를 지리산 근거에 택하려 하니 조가(朝家)에서는 새로

황석산성을 명축(命築)하기로 결정하고 이 체찰사로 하여금 하명케 하였다.

 

8월 1일에 적이 안음(安陰)의 황석산성(黃石山城)을 함락시켰다.

현감 곽준(郭逡)과 전 함양 군수(咸陽郡守) 조종도(趙宗道)가 전사하였다.

조종도는 전에 함양 군수(咸陽郡守)를 지내고 집에 있었는데,

일찍이 '나는 녹을 먹은 사람이니, 도망하는 무리와 초야에서 함께 죽을 수는 없다. 

 

죽을 때는 분명하게 죽어야 한다.' 하고는 처자를 거느리고 성으로 들어가, 

'공동산 밖의 생활도 즐거웠지만 장순·허원처럼 성을 지키다 죽는 것도

영광일세'({선조수정실록(宣祖修正實錄)} 30년).라는 시를 지었는데,

마침내 곽준과 함께 전사하였다. 

 

62세 때(1598년) 4월에 임금께서는 예조좌랑 윤안국(尹安國)을 시켜 사제하였다. 

    가을 8월에 아들 영한(英漢)이 1년만에 일본으로부터 석방 송환되어서

    영혼(英混)과 같이 영구를 모시고 진주 소남(召南) 오리동(梧里洞) 건좌(乾坐)에 묘소를 모셨다.

 

그가 세상을 떠난 후 이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정려를 받았고,

그 자손을 특별히 발탁하도록 하였다.

이는 {삼강행실도}, {해동명신록} 등에 사실이 실려 있으며, 함안의 덕암서원(德巖書院),

안의의 황암서원(黃巖書院), 진주의 경림서원(慶林書院) 등에 배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