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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이야기(124)

죽각 이광우(竹閣 李光友)

by 석암 조헌섭. 2023. 6. 3.

죽각 이광우(竹閣 李光友)
 
이광우(李光友, 1529∼1619)의 자는 화보(和甫)이고, 호는 죽각(竹閣)이며,
본관은 합천(陜川)으로 단성(丹城)에 거주하였다. 
그는 1529년(기축) 단성 배양 마을에서 아버지 참봉(參奉) 잠(潛)과 어머니 성주 이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의 문집 (죽각집(竹閣集)이 있다.  

10세 때(1538년) 백부 이원(李源)에게 {소학}을 배웠다. 이원은 남명·퇴계 선생과
    동갑으로 도의로 교유했던 인물이다.
   이광우는 (소학)을 읽으면서 '사람의 도리가 모두 이 책에 있구나'라고 하면서
   부지런히 공부하여 학문의 기본으로 삼기도 하였다.

11세 때(1539년) 종형인 송당 이광곤과 함께 (효경)을 공부하였고, 
14세 때(1542년) (중용)과 (대학)을 공부하였으며
18세 때(1546년) (주역) 과 (예기)를 공부하였다.
20세 때(1548년) 겨울에 외숙인 이조(李晁)와 더불어 단속사에서 (춘추)를 공부
     하였다. 

22세 때(1550년) 종형인 이광곤과 남명 선생을 만나 제자가 되기를 청하였다.
    이원(李源)이 아들 이광곤에게 명하여 함께 남명 선생의 문하에 가서 배우게 
    하였는데, 이때 남명선생이 (중용)에 나오는 성(誠), 경(敬), 도(道), 의(義) 등의
    뜻을 물어 보자 이광우는 그 오묘한 이치를 상세히 설명하였다.

   남명 선생이 이를 보고 기뻐하면서, '당초 내가 너의 자질이 둔하다고 생각하였는데,
   아주 정밀한 경지에 이른 것을 몰랐구나'라고 하면서 칭찬하였다.
   이때 덕계 오건도 와서 성리(性理)와 경의(敬義) 등을 강론하였다.  
 
27세 때(1555년) 봄에 합천으로 가서 이희안(李希顔)을 만났고, 
28세 때(1556년) 8월에 남명 선생에게 공부하러 갔다가 하항(河沆)을 만나 함께
    수학하면서 벗으로 사귀었다. 

30세 때(1558년)  4월에 남명 선생을 따라 두류산에 올랐다.
    이때 김홍, 이공량(李公亮), 이희안(李希顔), 이정(李楨) 등과 더불어
    시 한 수를 남겼다. 

35세 때(1563년, 계해) 3월에 백부 청향당 이원을 따라 도산(陶山)으로 가서
    퇴계 선생을 만나 제자가 되기를 청하였다. 
   이리하여 이광우는 당대 대학자인 남명과 퇴계 선생을 스승으로 삼아 가일층
   학문에  전념하게 되었다.

  퇴계 선생을 만나고 와서 산천제에 갔는데, 이 때 동강 김우옹이 공부를 하고 있었다.
  이광우는 동강 김우옹을 만나 학문의 방법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독서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36세 때(1564년) 겨울에 이천경과 더불어 이원(李源)의 서재인 구사재(九思齋)에서
   {성리대전}을 읽었다.
37세 때(1565년) 뇌룡사(雷龍舍)로 남명 선생에게 공부하러 갔다가 최영경을 만났다. 
    이 때 최영경은 서울에서 남명선생의 명망을 듣고 문하에서 공부하기 위해
    찾아 왔는데, 이광우와 최영경 두 사람은 동갑으로 서로 늦게 만난 것을 한탄할
    정도로 뜻이 잘 맞았다.

최영경은 이광우를 보고, '화보(和甫)는 집은 비록 가난하지만 스스로를 지켜 물욕에 
얽매임이 없으니 참으로 군자라고 할 만하다'고 하면서 이광우의 인품을 칭찬하였다. 
겨울에 정구(鄭構)와 구사재(九思齋)에서 주서(朱書)를 토론하였다. 

38세 때(1566년) 정월에 백부 청향당의 명으로 퇴계선생을 만나 이기(理氣)에
    대해 질문하고 돌아왔다.
    이 때 이정(李楨), 김우옹, 하항(河沆), 노진, 강익, 정유명, 정구(鄭逑), 조종도 등과
    더불어 남명선생을 모시고 단속사에서 산천재로 모였다. 
    이광우가 이 소식을 듣고 백부 청향당 이원을 따라 제현들과 수일간 공부하고
    돌아왔다. 

39세 때(1567년) 3월에 배양 북쪽에 죽림정사(竹林精舍)를 짓고 편액을
    죽각(竹閣)이라  하였다.  죽림정사를 지어 여러 벗들과 학문을 연마하였다.
    이때 하항(河沆)이 덕천에서 죽림정사로 방문하였다. 
    4월에 오건이 방문하였다.  

48세 때(1576년, 병자) 최영경, 하항(河沆), 손천우, 유종지, 하응도, 
    이천경, 이로, 이조 등과 서원을 세우기로 합의하였다. 
 60세 때(1588년, 무자) 이원(李源)을 위한 서원을 신안(新安)에 세우기로 하였다. 
    신안서원 낙성식 때 함안군수로 있던 정구(鄭逑)가 죽림정사를 방문하였다. 

64세 때(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어머니를 모시고 덕산동으로 이주하였으며, 
    곧 초유사 학봉 김성일을 만나 사위 전유룡을 천거하였다. 
    전유룡은 곧 소모관의 직책을 맡았으며, 후에 곽재우를 따라 창녕 화왕산성에
    들어가 왜적을 무찌르는 데 지대한 공을 세웠다.
    이때 이광우가 직접 김성일의 군진에 참여하고 싶었으나 늙은 어머니를
   모시고 있는   처지여서 사위를 대신 보내 왜적을 무찌르게 하였다.  

74세 때(1602년) 진극경, 이정(李瀞), 하징 등과 더불어 병란으로 불타버린
    덕천서원을 중건하였다. 

75세 때(1603년) 9월에 친구인 선비들과 함께 덕천서원에 모여 강론하였는데,
   이광우,      이천경, 진극경, 정승윤(鄭承尹), 성여신, 하징, 하성(河惺), 신가,
   하수일(河受一),  정승훈(鄭承勳), 이유함, 하광국(河光國), 조영한, 조겸, 이명고,
   이각(李殼), 조영기,    문홍운(文弘運), 박인(朴絪) 등의 여러 선비들이 모두 와서
   모였고, 그 밖에 또 33인이 왔다고 한다. 

76세 때(1604년) 정월에 외손자인 하홍도(河弘度)가 문하에서 수학을 하였다. 
78세 때(1606년) 중건한 덕천서원을 참배하러 온 정구(鄭逑)가 죽림정사를
    방문하였고  겨울에 덕천서원에 가서 이정(李瀞), 하징, 진극경 등과 두류산을
    유람하였다.  

79세 때(1607년) 9월에 이정(李瀞)이 배양리(培養里)로 방문하였고, 
82세 때(1610년, 경술) 이정(李瀞)으로부터 문익점(文益漸)의 사당 건축에 대한 답을
    받았다.

84세 때(1612년) 덕천서원에 가서 {남명선생학기}를 개정하는 일에 참여하였다.
 91세 때(1619년) 세상을 떠난 후 1791년에 배산사(培山祠)에 배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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