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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인물(72)

조영래 변호사 43년의 삶, 영원한 수사반장 최중락

by 석암 조헌섭. 2015. 11. 7.

조영래 변호사 25주기 43년의 삶

 

[Saturday] "조영래, YS·DJ 단일화 못 해 노태우 당선되자 가장 낙담"

입력 2015-11-07 01:23:09
수정 2015-11-07 01:39:04
12월 12일은 고(故) 조영래 변호사가 세상을 떠난 지 25년이 되는 날이다. 김선수 법무법인 시민 대표 등 후배 변호사 16명이 지난 7월 16일부터 3개월간 ‘인간 조영래’를 기억하는 22명을 만났다. 본지는 후배 변호사들이 담아온 기억들을 재구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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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 대한민국의 초대 총리감”=1965년 2월 14일자 조간신문에 실린 서울대 합격자 발표에 조영래 변호사(이하 경칭 생략)의 이름이 있다. ‘최고득점자 : 조영래 (법대·경기고) : 421점’. 그러나 조영래가 인터뷰에서 밝힌 소감은 덤덤했다. “뭐 대단한 일입니까. 그저 운 좋은 덕이지.”
 이홍훈은 “가정 형편이 어려워 3학년 1학기 때까지 가정교사를 하고 한·일 협정 반대 시위도 주도했는데 고3 2학기 몇 달 공부해 서울대 전체수석을 했다”며 “보통사람 머리하고는 좀 달랐다”고 했다. 민법의 대가인 서울대 법대 곽윤직 교수는 “조영래가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로 머리 좋은 사람”이라며 애정을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조영래는 교수들의 기대와 달리 입학 직후부터 한·일 협정 반대 시위에 나선 이후 69년 3선 개헌 반대 운동에 이르기까지 대학생활을 민주화 운동으로 채웠다. 좋은 머리는 학생운동의 전략과 이론을 만드는 데 썼다. 그의 방에는 일본어로 된 사회과학 서적이 가득했다.
 “2학년 때인가, 영래가 조셉 슘페터의 『자본주의, 사회주의, 민주주의』를 들고 다니더니 일주일도 안 돼 다 읽었더군요.”(손학규)
 법대생들이 65년 6월 14일부터 벌인 200시간 단식투쟁을 거치며 조영래는 전국 학생운동의 중심으로 자리 잡았다. 정영일 변호사는 “정세에 대한 판단력이 탁월했다”며 “친구들끼리 통일이 되면 초대 총리감이라고 이야기하곤 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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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태일이 기다렸던 대학생 친구=“아이고, 우리 아들이 ‘나한테는 왜 대학생 친구도 하나 없나’ 그랬는데, 죽고 나서야 나타났구나.”
 1970년 11월13일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고 외치며 산화한 전태일 열사의 어머니 이소선 여사가 빈소 인근에서 만난 장기표에게 쏟아낸 오열이었다. 69년 9월 3선 개헌이 된 뒤 조영래가 사법시험 도전을 결심해 경기도 고양시의 용구암에 들어갔을 때였다. 이때 함께 기거한 사람이 ‘직업 운동가’ 장기표였다.
 “고시 준비 중에 학생운동 백서를 쓰는 등 주로 나를 통해 운동에 관여하던 조영래가 전태일 분신 소식에 용구암에서 내려왔다.”(장기표)
감시를 피해 이소선 여사와 만나며 장례절차에 깊이 관여했던 조영래는 12월 말 용구암으로 돌아간 지 두 달 만에 치른 13회 사법시험에 합격했다. 그러나 사법연수원 입소 후 두 달 만에 터진 ‘서울대생 내란음모 사건’으로 1년6월의 실형을 살고 나온 뒤 민청학련 사건으로 다시 수배돼 변호사의 길은 기약 없이 미뤄졌다.
◆전태일 평전의 탄생…“다시 써야 한다”=민종덕은 90년 가을 조영래의 서소문 사무실에 찾아갔다. “지금쯤 저자가 누구인지 발표해도 괜찮지 않으냐”고 묻는 민종덕에게 조영래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전태일 평전』을 다시 써야 한다. 잘못 쓰였다. 어차피 지식인 관점에서 쓴 책이고, 의도치 않았지만 죽음을 미화한 것으로 보일 수도 있다.”
“전태일 이후에 나온 많은 열사에게 굉장히 미안해하는 표정이 읽히더군요.”(민종덕 전 청계피복노조 위원장) ‘저자 조영래’로 인쇄된 『전태일 평전』은 1991년 1월 세상에 나왔다. 이미 조영래가 세상을 떠난 뒤였다.
조영래는 74년 4월 이후 6년간의 수배생활 중 절반은 전태일을 위한 삶이었다. 조영래는 비밀리에 이소선 여사 등을 수시로 만나 구술을 채록하고 자료를 모았다. 『어느 청년노동자의 삶과 죽음』이라는 제목의 책이 탈고된 것은 76년. 최초 원고는 민종덕에게 넘겨져 다섯 부의 등사본으로 만들어졌다. 그중 한 부가 손학규의 손을 거쳐 일본으로 건너가 78년 책으로 나왔다. 83년 6월의 국내 출판은 민종덕이 통로였다. 집필과정을 지켜봤던 장기표는 “조영래가 3년 동안 전태일을 온전히 녹여서 다시 내뿜어 놓은 책”이라고 했다.
◆공익소송의 새 장을 열다=“이건 인재다.” 84년 9월 3일 변호사 사무실 문을 열며 조영래가 던진 말이었다. 폭우로 서울 망원동 유수지의 제방이 터졌다는 보도에 그는 현장으로 달려갔다. “조 변호사가 ‘저거 소송하면 재밌을 텐데’라고 얘기해 알아보니 수재민 중에 제 친구가 있었습니다. 그 친구 앞집·뒷집 등 5가구를 묶어 소송을 시작했습니다.”(박석운 당시 사무장·현 한국진보연대 대표)
조영래는 소송의 길목마다 미리 수를 뒀다.
 “망원동 수재사건에서 소장을 내면서 바로 증거보전신청서를 제출했습니다. 서울시가 수문을 파기해 증거를 없애는 걸 막기 위해서였죠. 그때만 해도 잘 쓰이지 않던 증거보전신청이 소송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죠.”(김선수) “토목공학을 공부해 서울시 쪽 증인으로 나온 고려대 엔지니어링 전공 교수를 몰아붙이는데 증인이 한 마디도 제대로 못하던 모습이 생생해요.”(박원순)
조영래는 평범한 사건에서 사회적 함의를 찾아내 소송으로 메시지를 던졌다. 그리고 승소했다. 김선수는 “인권 변론이라면 주로 시국 형사사건이 대부분이던 시절 조 변호사는 환경·소비자 등 다양한 문제에 대한 소송을 개발했다”고 말했다.
◆“진실은 감방 속에 가두어 둘 수가 없다”=“권양이 처음 우리에게 다가왔을 때는 슬픔과 절망으로 왔으나 이제 우리는 가슴 가득한 기쁨과 희망으로 권양의 승리에 대해 증언하고자 합니다.”
 86년 11월 21일 인천지법 법정에서 권인숙씨에 대한 변론요지서를 읽던 조영래는 눈물을 흘렸다. 그해 6월 위장취업 혐의로 구속됐던 권씨가 부천경찰서에서 성고문을 받은 사건은 조영래의 개입으로 정국을 뒤흔드는 시국사건으로 확대됐다.
 “1심 선고 때 많이 우는 모습을 보고 ‘굉장히 애절한 마음으로 내 사건을 맡고 있구나’라고 느꼈어요.”(권인숙 명지대 교수)
권인숙과 함께한 조영래의 법정투쟁은 가해자 문귀동 등을 고발하던 86년 7월부터 국가를 상대로 한 손해배상청구소송에서 승리하던 1990년까지 계속된 대장정이었다. 홍성우는 그 시작을 이렇게 기억했다.
 “86년 7월 정법회(정의실천법조인회) 모임에서 이상수 변호사가 ‘어마어마한 사건이 터졌다’고 흥분해서 얘기했어요. 조영래와 함께 인천소년교도소에 가서 1시간반쯤 면회하고 ‘이제 그만 끝내고 가지’ 싶었는데, 조영래는 그때부터가 시작이에요. 하나하나 세밀하게 전부 파고들어 기록을 했죠.”
변호사 9명이 가해자 문귀동을 고발하는 당사자로 나서며 쓴 고발장은 조영래의 선전포고였다.
 ◆87년 후보 단일화 실패와 새로운 길=현실정치와는 거리를 뒀던 조영래는 87년 대선을 앞두고 김영삼·김대중 후보의 단일화를 위해 힘썼다. 그 이유는 87년 10월에 쓴 기자회견문에 남아 있다.
“양 김씨가 동시 출마해 군부독재에 승리가 돌아갈 경우 민주화에 대한 체념의 분위기가 사회에 가득 차고….”
조영래는 ‘단일화국민협의회’를 이끌며 양 김과 접촉했지만 실패했고, 선거 결과는 ‘노태우 후보 당선’이었다. 지인들은 “조영래가 가장 낙담했던 게 이때”라고 입을 모았다. 조영래는 묵묵히 본업으로 돌아갔다. “‘민중당’에 동참해 달라” 는 장기표의 제안도 거절했다.
 “남들은 다 조영래가 나서야 된다고 보는데 본인은 안 그랬어요. 너무 겸손하고 신중해서….”(장기표)
◆불쑥 찾아온 죽음=새 길을 모색하던 조영래는 90년 1~5월 미국 컬럼비아대학 초청으로 ‘인권 변론 훈련 프로그램’에 참가했다. 개혁·개방이 한창이던 러시아도 이때 가봤다. 귀국 후 주위에 “사회주의는 끝났다”는 말을 던지기도 했던 조영래에게 죽음이 불쑥 다가왔다.
 “90년 무더위가 시작될 무렵 어느 날 나갔다가 ‘냉방병인 것 같다’고 하시더니 어느 날은 ‘한 달이나 다녔는데 안 낫는다. 큰 병원에 가보라네’ 하시더라고요.”(정향아 당시 직원)
12월 12일 조영래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가족이 아닌 사람들에게도 견디기 어려운 충격이었다. “도저히 벗어날 수 없을 것 같은 우울증이 왔어요. ‘교통사고로 갑자기 죽을 수 있으면 좋겠다’할 정도로….”(신평)
 “요즘도 가끔 모란공원에 가 한동안 앉아 있다 오곤 합니다. 보고 싶어서….”(이홍훈)
임장혁 기자·변호사 im.janghyuk@joongang.co.kr
[S BOX] 흉상 제작·기념전 등 25주기 추모행사 다양
1990년 12월 12일 새벽 조영래 변호사가 폐암 투병 중 43세의 나이로 요절했다. 올해 25주기를 맞아 서울지방변호사회(회장 김한규)는 ‘시대를 밝힌 자랑스러운 변호사 조영래’를 기리기 위해 다양한 추모행사를 준비하고 있다. 25주기 기념사업위원장은 조 변호사의 남대문합동법률사무소에서 함께 일했던 김선수 변호사가 맡고 있다.
 손학규 전 민주당 대표와 장기표 뉴스바로 대표, 전태일 열사의 동생인 전순옥 새정치민주연합 의원과 권인숙 명지대 교수 등 22명의 인터뷰를 통해 일대기를 재조명하는 작업도 기념사업의 일환이다. 또 인권 변론에 헌신한 변호사와 단체를 선정해 ‘조영래상’을 시상한다. 심사위원장인 홍성우 변호사가 지난 8월부터 추천된 12명의 후보자를 심사하고 있다.
 서초동 변호사회관 입구에 설치할 조영래 변호사의 흉상 제작도 완료했다. 조각가 원승덕 동아대 예술대학 명예교수가 청동 흉상 제작을 맡았다. 공식 추모행사가 열리는 12월 11일 ‘조영래상’ 시상에 맞춰 제막식을 할 예정이다. 조 변호사의 생전 모습이 담긴 사진과 육필 원고 등을 모아 11월 30일부터 12월 11일까지 변호사회관 1층 회의실에서 기념 전시회를 연다.
 김한규 회장은 “판사들은 오래전부터 초대 대법원장인 가인 김병로 선생이나 사도법관 김홍섭 선생을 사표로 삼아 기려왔다”며 “변호사들에게도 정신적 푯대로 삼기에 충분한 조영래라는 인물이 있는데도 지속적인 추모사업이 이뤄지지 못해 안타까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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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원한 수사반장 최중락 전 에스원 고문

[Saturday] 형사 34년, 범인 1300명 잡은 포도왕 … 죽기 전에 화성 연쇄살인범 꼭 잡겠다

입력 2015-11-07 01:26:13
수정 2015-11-07 01:4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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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딩이 높을수록 그림자는 길어진다.” 드라마 ‘수사반장’에서 박 반장(최불암)의 대사다. 최중락 전 에스원 고문은 고도성장기의 그늘에서 자란 범죄와 평생 맞섰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지난여름 개봉했던 영화 ‘극비수사’에서 부산의 공길용 형사(김윤석)는 유괴범을 잡기 위해 서울 경찰과 합동수사를 진행한다. 그에게 동료가 말한다. “거기(서울) 팀장이 ‘수사반장’ 실제 모델이라카던데.” 영화에선 서정학 반장(정호빈)으로 나오지만 실제 이름은 다르다. 일요일 저녁 TV에서 류복성의 오프닝 테마와 함께 ‘수사반장’ 타이틀이 뜨면 출연자 명단과 함께 ‘지원 서울시경 형사과 최중락’이 나온다. ‘영원한 수사반장’이란 칭호가 최중락(86) 전 에스원 고문에게 붙는 이유다. 지난달 창설 70주년을 맞은 경찰의 살아 있는 역사이자 한국 범죄사의 증인인 그를 만났다.
 -‘극비수사’에서 인질의 안전보다 범인을 잡는 데만 신경 쓰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영화를 안 봐서…. 그때 부산 경찰의 수사를 도와줬지. 그들은 서울 지리를 모르잖나. 부산 사건이니 공(功)이 부산팀에 돌아가는 건 당연하지. 나야 사건을 해결하면 돼.”
 최씨는 1950년 6·25전쟁 때 경찰에 지원했다. 인민군으로 끌려간 동생을 찾기 위해서였다. 전투경찰이 된 그는 국군을 따라 북진했으나 중공군 개입으로 흥남부두를 통해 철수했다.
 - 왜 형사가 됐나.
 “철도경비 기동부대사령부에 배속됐던 53년 9월 영등포역에서 청년 서넛이 할머니의 보따리를 낚아채는 모습을 봤어. 그들을 때려 눕혀 보따리를 되찾아줬지. 그러면서 ‘범죄는 이길 수 있다. 앞으론 정의를 위해 싸우겠다’고 마음먹었다.”
 56년 서울 중부경찰서로 옮기면서 그의 34년 형사생활이 시작됐다. 이후 총경으로 승진하면서도 사건 현장을 떠나지 않았다. 평생 잡아들인 범죄자가 1300명을 넘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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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수사반장’ 촬영 현장. 왼쪽부터 최불암, 남광현 전 경위, 이금복, 김상순, 조경환, 김호정, 최중락 전 고문.

 - 드라마 ‘수사반장’은 어떻게 만들어졌나.
 “70년대 서독에 파견된 광부·간호사들이 돌아오면서 형편이 나아지니 떼강도가 설친 거야. 그래서 ‘법을 어기면 안 된다’는 메시지를 주는 드라마를 만들게 됐지. 나중에 들어보니 박정희 전 대통령의 지시였어. 그런데 작가들이 경찰과 수사에 대해 뭘 알겠나. 그래서 방송국이 경찰에 ‘범인 잘 잡는 형사 하나 추천해 달라’고 요청했지. 그래서 포도왕(절도범 검거 실적이 좋은 경찰에게 주어지는 상)인 내가 방송국에 파견된 거야.”
 그는 리얼리티를 살린다며 스태프를 경찰대에 보내고, 실제 살인사건 현장에 배우들을 데리고 갔다. 작가와 PD를 유치장에서 재우기도 했다. 최씨는 “‘수사반장’ 인기 덕도 봤다”고 했다. “사람들이 수사반장 출연진을 진짜 형사로 안 거야. 한번은 조경환과 김상순을 남대문시장에 풀어놨지. 그랬더니 슬금슬금 피하는 사람들이 보였어. 그런 이들을 잡아다 뒤져 봤더니 남의 지갑이 발견됐어. 소매치기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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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역 시절 그는 악착같이 범죄자들을 잡았다. 하루에 네다섯 명을 체포한 날도 있었다. 비결은 남보다 더 부지런히 움직이는 것이었다. “68년 강도사건 범인이 훔친 수표로 참깨 여섯 가마니를 샀다는 정보를 입수했어. 그래서 동료와 함께 돋보기를 들고 깨알을 찾아다녔지. 결국 한 알을 골목길에서 발견해 범인을 잡았어.” 살인사건이 잘 풀리지 않을 땐 소주를 마신 뒤 시체를 안고 잔 적도 있었다. ‘꿈에서라도 피해자가 단서를 주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였다.
 또 다른 비결은 지혜였다. 특히 도둑으로 도둑을 잡는 데 그만 한 형사가 없었다. 전국의 어지간한 전과자들은 그를 형님으로 모셨다. 최씨가 그들을 인간적으로 대하고 보살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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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 모델 ‘수사반장’ 최 전 고문(왼쪽)과 드라마 ‘수사반장’ 최불암.

 - 계기가 있었나.
 “한번은 겨울에 오랜 잠복근무 후 술 한잔을 한 뒤 취해 길거리에서 잠들었지. 새벽에 깨어보니 가마니 속에 있는 거야. 옆에 잠든 사람이 덮어준 거였지. 내가 예전에 감옥에 보낸 이였어. 그가 일어나 ‘형님, 내가 또 죄를 저질렀소. 가게에서 가마니를 훔쳤소’라고 말했어. 그때 깨달았지. ‘죄는 순간의 욕심 때문에 저지르지만 사람은 나쁘지 않을 수 있다’고.”
 그가 ‘도둑 동생’들의 도움을 제대로 받은 사건이 있다. 66년 린든 존슨 미국 대통령이 방한하기 전 당시 정부 고위 관계자 집에 도둑이 들어 보석과 함께 권총 한 자루와 실탄 30발을 훔쳐갔다. 미국이 외교라인을 통해 안전 문제가 생길 수 있다며 대통령 방한을 재검토하겠다고 알려왔다. 실제 ‘극비수사’가 진행됐다. 최씨는 절도 전과자들을 모아 협조를 부탁했다. 그랬더니 그들이 단서를 찾아줬다.
 모든 전과자가 그를 모신 건 아니었다. 사형대에 보낸 범죄자가 그에게 “지옥에서 두고 보자, 복수하겠다”는 말을 남겼다. 그의 집에 협박장을 보낸 이도 있었다. 교도소 감방 벽엔 ‘만고역적 최중락’이란 낙서도 있었다.
 90년 경찰에서 나와 에스원 고문을 맡았다. 갑자기 2010년 뇌경색이 왔다.
 - 건강이 왜 안 좋아졌나.
 “퇴임 후 하루 만 보를 걸을 정도로 건강했다. 2010년 코미디언 배삼룡이 세상을 떴어. 상가에 가 보니 밀린 병원비가 많았지. 마음이 아파 코미디언 송해 등과 소주 한 말을 마셨더니 갑자기 쓰러졌어.”
 그러면서 말을 이었다. “94년 림프종(임파선 암) 판정을 받았어. 자살할 마음에 인왕산을 올랐지. 그랬더니 그동안 잡았던 범죄자들 얼굴이 떠올랐어. 내가 죽으면 그들이 ‘잘 죽었다’고 생각하겠지. 이겨내야겠다는 결심을 했어. 그래서 10년 후 재발돼도, 2006년 계단에서 굴러떨어져 척추를 다쳐도 일어났어.”
 지금도 거동이 불편하지만 총기는 잃지 않았다. 예전 사건의 구체적 내용을 아직도 줄줄이 꿴다.
 - 형사가 된 걸 후회하나.
 “64년 삼분(三粉, 밀가루·설탕·시멘트) 폭리사건을 수사하는데 한 기업주가 돈을 포대에 담아 와선 봐달라고 했다. 당시 집을 여러 채 살 만한 거금이었지. 그런데도 원칙대로 그를 구속했어. 형사가 가오(체면)로 살면 됐지.”
 - 범죄가 시대에 따라 달라진다.
 “범죄는 사회를 따라간다. 50~60년대는 절도가 많았다. 먹고살려는 생계형 범죄였다. 절도범을 체포하고 나면 대부분 눈물을 흘리며 반성했다. 그런데 경제가 발전했던 70~80년대부터 폭력을 동반하는 범죄가 늘어났다.”
 - 대도 조세형과 인연이 있다.
 “대도는 무슨 대도. 좀도둑이야. 과대포장됐어. 조세형이 16세 때 라디오와 은수저를 훔쳐 나한테 붙들렸어. 그게 인연이 돼 내가 에스원 범죄예방연구소에 취직을 시켜줬지. 그런데도 갱생을 못했어.” 조씨는 고급빌라에서 귀금속을 훔친 혐의(상습절도)로 지난달 구속기소됐다.
 - 지금도 후회하는 사건은.
 “65년 신문사 기자와 야당 국회의원이 잇따라 테러를 당했어. 경찰은 엉뚱한 사람을 범인으로 잡았지. 증거는 없지만 ‘나까무라’(중앙정보부) 짓으로 보여. 87년 용팔이 사건도 윗선 지시로 수사를 제대로 못 했어.”
 최씨는 “범인 잡는 게 천직”이라며 “죽기 전에 반드시 잡고 싶은 범죄자가 있다”고 했다. ‘화성 연쇄살인 사건의 범인’이란다. 그가 당시 뒤늦게 사건에 투입됐지만 결국 해결하지 못했다.
 - 왜 잡고 싶나.
 “지금도 범인은 평범한 이웃으로 숨어 지낼 거야. 억울하게 죽은 피해자를 생각하면 반드시 잡아야지. 내가 수갑을 채울 순 없지만 노마지지(老馬之智·늙은 말의 지혜)를 줄 순 있지 않을까 수사기록을 요즘도 뒤져봐.” 최씨의 수사는 아직도 진행형이다.
글=이철재 기자 seajay@joongang.co.kr 사진=권혁재 사진전문기자
[S BOX] 소매치기·제비족 점점 줄어드는 까닭
‘서울지검은 27일 서울시내 조직소매치기 28개 파 151명에 대한 계보와 명단을 파악, 경찰과 함께 일제 검거에 나섰다’.
 1984년 10월 27일자 중앙일보 기사는 이렇게 시작했다. 당시 검찰과 경찰은 ‘각종 국제행사와 스포츠 교류를 틈타 관람객과 외국 관광객들을 노리는 소매치기의 범행이 부쩍 늘어났다’고 판단해 대대적인 단속에 나섰다. “사람이 많은 역이나 시장에 갈 때마다 늘 소매치기 한두 명을 체포했다”는 최중락 전 에스원 고문 얘기처럼 한때 소매치기는 흔한 범죄였다. 뉴스에선 하루가 멀다 하고 소매치기 범죄가 보도됐다. 경찰은 ‘방범비상령’을 내려 소매치기를 잡아들였고, ‘지갑이나 가방을 잘 간수하자’는 캠페인을 종종 벌였다.
 그랬던 소매치기가 점점 사라지고 있다. 1970년대 연간 6000여 건, 90년대 4000여 건이던 소매치기 발생 건수가 2000년대 2000여 건으로 줄었다. 지난해는 1454건이었다. 신용카드 사용이 늘고 CCTV가 많이 설치됐기 때문이란 게 경찰의 분석이다. 소매치기가 줄면서 83년에 창설된 서울시경찰청 소매치기전담반은 99년 해체됐다.
 최근 체포된 소매치기들은 대부분 60대 이상이다. 2000년대엔 국내에서 자리를 잃은 소매치기들이 일본으로 건너가 ‘원정범죄’를 저질렀다. 당시 일본이 한국보다 신용카드를 덜 썼기 때문이다.
 제비족도 줄었다. 70~80년대 남편을 중동에 건설 노동자로 보낸 부인이 카바레에서 만난 제비족에게 돈을 뺏기는 사건이 자주 일어나 사회 문제가 됐다. 정부가 “이역만리에서 고생하는 근로자들이 안심하고 일할 수 있게 만들겠다”며 카바레에 사복 형사를 잠복시킨 적도 있었다. 경찰 관계자는 “카바레가 많이 없어졌고, 세태가 예전보다 이혼을 덜 꺼리면서 제비족의 활동 무대가 줄어든 것”이라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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