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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이야기(124)

탁계 전치원(濯溪 全致遠, 1527∼1596)

by 석암 조헌섭. 2023. 3. 18.

                                                                     탁계 전치원

탁계 전치원(濯溪 全致遠, 1527∼1596)

전치원(全致遠)의 자는 사의(士毅)이고, 호는 탁계(濯溪)이며,
본관은 완산(完山)으로 초계(草溪)에 거주하였다. 
1527년 초계군 도방리(지금의 합천군 쌍책면 하신리)에서 전인(全絪)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문집은 {탁계집(濯溪集)}이 있다

15세 때(1541년) 당시 재령(載寧) 군수로 있던 할아버지(永綏)를 따라가서 공부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할아버지는 손자의 자질이 호방한 것을 알고 무예를
    가르치고자 했다.

16세 때(1542년) 재령에 머물면서 여름에 {소학}을 들고 이희안(李希顔)을
    찾았는데, 이희안은 {소학} 책 배울 나이가 넘었다고 제자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로부터 전치원은 5일 동안 움직이지 않고 한 자리에 앉아 가르침을 청했다.
   그 자질을 시험해 본 이희안은 '장차 대성할 인재'라 생각하고 비로소 제자로 삼았다.

29세 때(1555년) 삼가 토동정사로 남명선생을 찾아가 가르침을 청했고,
30세 때(1556년) 퇴촌동(退村洞)에서 비로소 문하에서 수업받았다.

33세 때(1559년) 5월에 스승인 이희안이 세상을 떠나자 키워준 은혜와 가르쳐 준
    은혜가 다를 수 없다고 생각하여 제자로서 도리를 다하고자 제삿날이면 반드시
    참례하면서 마음으로 3년 복을 입었다. 

35세 때(1561년) 황강 이희안 선생의 [묘갈명]을 남명선생이 찬(讚)하고
    탁계(濯溪)글씨를 썼다. 정자를 짓고 호를 탁계(濯溪)라고 하였는데
   이 호는 굴원이 지은 어부사의 구절 중에서
   '창랑의 물이 맑거든 갓끈을 씻고, 창랑의 물이 흐리거든 발을 씻어야 한다'는   
   구절에서 '씻을 탁(濯)자'를 따온 것이다. 

세상의 온갖 더러움을 씻어 멀리하고자 하는 마음에서 지은 것이다.
가을 8월에 월와 진극원(陳克元)이 찾아 왔다. 이 때 백곡 진극경이 따라와 전치원과
함께 하였으며, 공경하고 중히 여기면서 이르기를 '진씨(陳氏)의 가문에 장차 점점 
나아감이 있을 것'이라고 하였다. 


37세 때(1563년)
 덕산의 산천재(山天齋)로 찾아 남명선생의 문하에 가서 공부하였다.                  이로써 김우옹, 정구(鄭逑), 박성(朴惺), 노흠, 김면, 배신, 이기춘(李起春) 등의
    제현들과 도의로써 교유하였다.

38세 때(1564년) 이희안을 위하여 청계서원(淸溪書院: 道 地方文化財 136號)을     
     창건하였는데, 이 서원은 지금 합천군 율곡면 내천리에 있다.
40세 때(1566년) 봄에 김유(金紐)가 찾아왔다,

43세 때(1569년) 김유가 찾아와서 시를 주었다.
44세 때(1570년) 3월에 이효원이 구정(鷗亭)으로 찾아왔고

     쌍책면 덕봉리 정와 조수천(靜窩 曺受天 와서 공부하였다. 

47세 때(1573년) 안극가(安克家)가 찾아와서 경의를 공부하였다.
48세 때(1574) 이대기가 찾아와서 {중용}을 읽자, 탁계는 성명(誠明)의 이치를
    강론하였다. 

52세 때(1578년) 봄에 강정(江亭)을 완성하여 학문을 연마하고, 자연을 벗으로 삼아
    읊조리며 유유자적한 생활을 보냈는데, 이 정자는 후일 손자 전영이 이름을
    와유헌(臥遊軒)으로 고쳤으며, 지금 쌍책면 매호리에 있다.

55세 때(1581년) 추곡 강몽린 상경(祥卿)이 계효당명(繼孝堂銘)을 찬(讚)하였다. 
59세 때(1585년) 가을에 하혼이 관직을 그만두고 돌아간다는 소식에 시를  주었다.

60세 때(1586년) 봄에 고양(高陽)의 벽송정(碧松亭)에 있었다. 
    가을에 노흠 등과 황계폭포에서 놀았다. 이때 이흘(李屹)이 따라와 시를 남겼다. 
61세 때(1587년) 진주(晋州) 도동(道洞)으로 최영경을 방문하였고,

62세 때(1588년) 안극가(安克家)를 방문하였다.
63세 때(1589년, 기축) 봄에 금병팔첩(錦屛八疊)을 써서 장자(長子) 우(雨)에게 주었다.
    8월에 주부자(朱夫子)의 [무이구곡시(武夷九曲詩)]를 초서로 쓰고, 
   집에 보관하였다. 

64세 때(1590년) 도내의 제현들과 더불어 최영경의 신원 상소를 청하였다.
     이 때 최영경이 정여립의 모반사건에 연루되어 이로, 박제인, 이정(李瀞),
     오장(吳長),   문위(文緯), 하혼 등이 모여 상소추문(上疏推文)하였고,
     이때 문경호(文景虎)가 소두(疏首)가 되었다. 

66세 때(1592년) 여름 4월에 왜구가 밀어닥치자 열군(列郡)이 와해되었다.
    이때 이대기와 더불어 창의하여 토적(討賊)할 것을 약속하고,
    망우당 곽재우와 합세하였다. 

이 때 전치원은 아들 우(雨)와 조카 제(霽)를 불러 이르기를, '우리 집안은 대대로
나라의 녹을 먹은 집안이다. 적과 싸워 죽어야 마땅하니 각자 고을 내의 사람들을
불러 모으라'고 하였다. 군내에 의병모집 통문을 돌렸으며, 모집된 의병은 외군과
내군으로 편성되어 내군은 이대기가, 외군은 전치원이 통솔하였다. 

이때 전치원은 진영을 구축하고 몸소 훈련을 시키면서 많은 의병들을 부양할
군량미가 부족하자 사비로 조달하였고, 관곡은 취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렇게 조직된 초계의 의병은 황강변에서 6월 3일 합동 군사훈련을 실시하여
6월 11일 낙동간 사막진에서 왜선과 왜적을 대피하였고, 

6월 17일에는 낙동강을 도하하는 적을 물리쳤으며, 이후 수 차례의 소규모
유격전과 대규모 전투에서 모두 큰 승리를 거두었다. 이 승전으로 말미암아
왜군의 낙동강 도하를 차단하여 초계 지방과 우도지역을 보존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호남지방으로 진출하려던 왜군의 진출을 막을 수 있었다. 

67세 때(1593년, 계사) 가을에 박진사, 이언영이 찾아왔다.  조정에서 화의(和議)를
    주장한다는 소식을 듣고 분탄(憤歎)하는 시를 지었다.
    이때 사근찰방(沙斤察訪)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고
    고령 안림 김면의 진지에 서원 창건활동으로 모였다.  

69세 때(1595년) 변평천옥희실기(卞坪川玉希實記)를 찬(撰)하였고,
    임계란리록(壬癸亂離錄)}을 찬(撰)하였다. 


                            소재지 : 경남 합천군 율곡면 내천리 313번지

70세 때(1596년) 12월 13일에 세상을 떠난 후 지역 유림들이 연곡사를 세워
     봉안하였으며, 1702년 청계서원에 배향되었다. 
 
석암 조헌섭

                                           탁계 전치원 신도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