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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인물(72)

전직 대통령의 회고록

by 석암 조헌섭. 2015. 11. 30.

 전직 대통령의 회고록

 

[Saturday] "민주화에 튼튼한 받침대 되기를"

 YS, 아홉 쪽 서문에 ‘민주’ 41차례

입력 2015-11-28 01:05:16
수정 2015-11-28 01:09:02

사람이 떠나도 기억은 남는다. 말이 사라져도 글은 남는 것과 같다. 회고록은 기억을 남기는 글이다. 자신의 글로 자신의 기억을 형상화한다. 대통령의 회고록은 다른

 기억보다 특별하다. 목표를 설정하고 정치적 결단을 하는 과정, 담겨 있는 정보 등 그 자체가 사료다. 우리나라 역대 대통령 10명 중 회고록을 남긴 이는 윤보선·노태우·김영삼·김대중·노무현·이명박 전 대통령 등 6명이다.

 

이승만·최규하·박정희 전 대통령은 회고록을 남기지 않았고, 전두환 전 대통령은 현재 집필 중이라고 한다.

회고록의 한계도 있다. 자신의 공(功)은 미화하고, 과(過)는 윤색할 우려가

 상존한다. 강원택(정치외교학과) 서울대 교수는 “대통령 회고록은 한 시대를

 책임졌던 대통령이 자신의 생각, 중요한 결정을 둘러싼 비화와 심경 등을 밝히는

 만큼 인간으로서의 대통령을 이해하는 데 귀중한 자료가 된다”며 “하지만 주관적 시각이 담긴 만큼 한계 또한 뚜렷해 종합적인 학술 연구에 따른 평가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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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임 1년11개월 만에 쓴 YS=이제 고인이 된 김영삼(YS) 전 대통령의 회고록은

 그의 삶과 말을 닮았다.
“우째 이런 일이….”
경상도 사투리가 섞인 긴 탄식이 터지고, 그 감정은 여과 없이 전달된다.

 “씰데없는 소리.” 이 말은 또 어떤가. ‘절대 동의할 수 없다’는 의중이 듣는 이의

 귀에 그대로 꽂힌다. 모두 YS가 자주 썼던 말이다. 그의 말은 곧 시대의 유행어가 됐다.
YS의 화법은 직설적이었다. 그의 회고록에서도 그런 면면은 확인된다.

 표현은 솔직하고 투쟁적이다. 세 권으로 구성된 『김영삼 회고록』의 부제부터

 ‘민주주의를 위한 나의 투쟁’이다. 2000년 1월 나온 이 회고록은 태생부터 논쟁거리였다. 퇴임한 지 채 2년도 되지 않은 시점이었는데, 당시 YS는 퇴임을 앞두고 터진 국가 부도 사태(IMF 환란위기)로 비난과 혹평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는 출간을 서두른 이유에 대해 이렇게 썼다.

‘나는 현대정치사를 이제 내 손으로 쓴다는 심정으로 이 글을 썼다.

 이 기록이 한국 현대정치사를 위한 생생한 현장을 증언하고, 아직은 불안한 이 나라 민주화에 튼튼한 받침대가 되기를 바라 마지 않는다.’
YS는 군 통치를 끝내고 ‘문민정부’ 시대를 열었다는 자부심이 대단했다. 9쪽 분량의 서문에서 ‘민주주의’와 ‘민주화’ 등 ‘민주’를 41차례 언급했다. 이 자부심으로 그를

 향한 비난을 정면 돌파하려 했다.


그는 자신을 타고난 투쟁가로 그렸다. YS가 1943년 통영중학교에 다닐 때 일본인

 학교장의 이삿짐을 옮긴 일이 있었다. 그는 이때 당시 귀했던 설탕포대에 일부러

 구멍을 뚫었다. “입만 열면 한국인을 욕하는 통에 분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는 게 이유였다. 이런 기질은 성인이 돼서도 바뀌지 않았다. 서슬 퍼런 박정희 정부 때

 그는 뉴욕타임스 등 외신에 ‘독재자’라는 비판을 서슴지 않았다.

 

 이 일로 국회에서 제명된 첫 국회의원이 됐는데, 이때 한 발언은 지금까지

 회자된다.
“나는 잠시 살기 위해 영원히 죽는 길을 택하지 않고, 잠시 죽는 것 같지만 영원히

 살 길을 선택할 것입니다.”
한편으론 인간적인 면도 부각했다. 1975년 박정희 대통령과의 단독 면담을

 소개한 게 그 예다. 그는 책에 ‘민주주의를 하라고 따지려다 박정희가 눈물을 흘려 추궁하려던 마음이 다소 누그러졌다. ‘회담 내용을 둘만의 비밀로 하자’는 제안도

선뜻 받아들이게 됐다’고 적었다.
절판됐던 YS의 회고록은 그의 서거 이후 재출간하는 방안이 논의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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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후 출간한 DJ=YS의 회고록이 YS를 닮았듯 필생의 라이벌이었던 김대중

 전 대통령(DJ)의 회고록도 DJ를 닮았다. DJ의 회고록 『김대중 자서전』은 그가

 서거한 뒤인 2010년 8월에 출간됐다. “생전에 발간해 ‘자화자찬’하지 않으려 했고 (자서전 내용에) 신뢰감을 주기 위해서였다”는 게 집필진의 설명이다.

 DJ의 회고록은 이렇게 시작한다.
‘황혼이 찾아왔고 사위는 고요하다. 내가 살아온 이야기를 남기려 한다.’
질곡 많은 현대사를 관통한 그였지만 회고록에선 ‘투쟁’이나 ‘저항정신’보다

 ‘자신으로 인해 다치거나 죽은 사람들’을 걱정했다. ‘그들의 눈물을 닦아 주지

 못했다’며 용서를 구했다.

 

유년 시절의 회고 역시 서자로 태어난 출생의 비밀을 고백하는 데서 시작한다.

1981년 사형수에서 무기징역으로 감형 받고 청주교도소에서 수감생활을 할 때는

 ‘눈물을 흘렸다. 슬퍼서가 아니라 죽음을 면한 것이 기뻐서였다’며 죽음 앞에

 초연할 수 없었던 내면을 솔직히 표현하기도 했다.


이런 그였지만 자신의 삶은 강한 어조로 긍정했다. ‘열 번 다시 태어나서 똑같이

 살라 해도 기꺼이 되풀이해서 살 것이다…(중략)…옳다고 여기면 정면으로

 부딪쳤다’는 대목에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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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다 쓴 노무현, 밀어붙인 이명박=노무현 전 대통령은 회고록을 완성하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다. 그래서 제목이 『성공과 좌절-노무현 대통령 못 다 쓴 회고록이다. 그가 생전에 남긴 메모와 대화를 모아 지인과 참모들이 마무리했다. 그의 회고록도 “반미(反美)면 어때”라는 식의 표현으로 논란을 일으킨 화법과 닮았다.

 

 ‘언젠가 자전거 타고 국회 등원하는 선배 의원을 비판한 적이 있었다. 환상을 심지 말라는 것이었다’ ‘지금 나를 지배하고 있는 것은 성공과 영광의 기억이 아니라

실패와 좌절의 기억들이다’는 내용 등이다. 그리고 ‘절대, 정치는 하지 마라’는

 말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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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박 전 대통령의 회고록 『대통령의 시간』은 올 2월에 출간돼 안팎의 논란을

 촉발했다. 한·중 정상회담, 한·미 정상회담 당시 상대국 정상의 비공개 발언을

 쓰는가 하면 연평도 포격 이후 남북이 비밀접촉을 했다는 내용도 있다. 집필 중에 주변에선 “그렇게까지 세세하게 담을 필요가 있느냐”고 만류했지만 ‘불도저’라는

 그의 별명답게 밀어붙였다고 한다. 그는 회고록에 ‘후임 정부의 정책에 도움이

 되라는 취지였고, 기억이 용탈돼 희미해지기 전 대통령과 참모들이 생각하고

 일한 기록을 가급적 생생하게 남기고 싶었다’고 썼다.
윤호진 기자 yoongoon@joongang.co.kr
[S BOX] 미국선 회고록 인기 … 클린턴 ‘선인세’만 152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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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이 집필하는 자전적 저술은 ‘회고록’이나 ‘자서전’이라는 이름이 붙는다.

 중요한 사건 위주로 기술했다면 회고록, 일대기를 다뤘다면 자서전이다.

 이런 글에는 보통 자신의 업적이나 정치인생, 재임 중 비화 등이 자신만의 색채로 담긴다. 그래서 회고록은 역사적 사실을 품고 있지만 주관적 시각이 뒤섞여 사람

 냄새가 짙게 난다.
 대통령 회고록의 역사가 긴 미국이라고 해서 이런 분위기가 크게 다르진 않다.

 미국에선 대통령이나 유력 대선 후보의 책이 늘 화제가 된다. 그래서 출판사는 퇴임 대통령에게 집필에 앞서 수십억 달러 이상의 ‘선인세’를 주기도 한다.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이 2004년 발간한 자서전 『나의 인생(My life)』이 대표적이다. 클린턴은 선인세로 1500만 달러(약 152억원)를 받았다. 그의 자서전에서는 재임

 시절 그를 탄핵 심판대에 세운 백악관 인턴 모니카 르윈스키와의

 섹스 스캔들(1998년)을 둘러싼 자극적 드라마가 기대됐다. 실제 클린턴의 자서전은 발행하기 전에 200만 부가 넘는 예약 판매를 기록했다. 클린턴은 이 자서전에서

 스스로 ‘부적절한 관계(inappropriate relationship)’라고 인정한 스캔들, 그리고

 이로 인해 벌어진 가정사를 솔직하게 풀어냈다.


오바마 대통령은 대통령이 되기 전 집필한 자서전 덕을 톡톡히 봤다. 그의 자서전 『담대한 희망(The audacity of hope)』은 지금도 미국뿐 아니라 전 세계에서

 베스트셀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