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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이야기(124)

덕계 오건德溪 吳健(1521-1574)

by 석암 조헌섭. 2023. 2. 22.

덕계 오건(德溪 吳健1521-1574)

오건(吳健, 1521∼1574)의 자(字)는
 자강(子强)이고, 호(號)는 덕계(德溪)이며, 
본관(本貫)은 함양(咸陽)이다. 
그는 1521년) 4월 6일 경상남도
산음현(山陰縣) 석답리(石沓里)에서 
오세기(吳世紀)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의 문집 및 저술은 [덕계집(德溪集)]과
[역년일기(歷年日記)]가 있다

오건(吳健)의 자(字)는 자강(子强)이고, 호(號)는 덕계(德溪)이며, 
본관(本貫)은 함양(咸陽)이다. 
그는 1521년) 4월 6일 경상남도 산음현(山陰縣) 석답리(石沓里)에서 
오세기(吳世紀)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의 문집 및 저술은 [덕계집(德溪集)]과 [역년일기(歷年日記)]가 있다.

9세 때에는 양희(梁喜)와 만나 경서를 강론하였으며, 
 [대학], [논어] 등을 공부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집안이 가난하여 책을 살 돈이 없었으므로 집에 있는 책과
   아버지의 훈도를  생각하면서 
날로 배움을 더해 갔다.
   백절불굴의 의지와 인내심을 스승으로 삼아 {중용}을 천여 번 거듭 읽어
   각 구절과 장의 음과 훈의 뜻을 깨우쳤다. 

   이러한 방식으로 그는 대학과 논어, 맹자, 경(經)·사(史)·자(子) 등을 공부하였다.
   이러한 독서법은 다른 책에도 적용되었으며, [주역(周易)]을 외숙으로부터
   배우기도 하였다.
그가 경서를 읽은 횟수는 [중용]이 부지기수였고
    [대학]은 약 천여 회, 모든 경사는 모두 4∼500회 이상 달하였다.

   11세 때에 부친상을 당하고, 14세 때에 조모의 상을 당하고, 

29세 때에 모친상을 당하여 예에 어긋남이 없었다. 
    어머니가 병들자 날마다 어머니의 인분을 맛보았으며,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3년 동안  
여묘살이 할 적에는 한 번도 집에 오지 않고 죽을 먹으면서 삼년상을
    마친 뒤에도 
다시 심상(心喪)을 행하여 아침저녁으로 전을 드리고 하루에
    세 차례씩 울었다. 
 임금이 그의 효행을 가상하게 여겨 복호를 명하였다. 

31세 때(1551년) 처음으로 뇌룡정(雷龍亭)으로 남명선생을 찾아 뵙고 제자가
    되었는데, 
 선생이 그의 독실함을 사랑하여 마침내 학문에 나아가는 문정을
    열어 보였고,
   [소학]과 [대학] 및 [근사록] 등을 배우기를 권하였다.
    이 때 이광우(李光友)도 와서  성리(性理)와 경의(敬義) 등을 강론하였다. 

33세 때(1553년, 계축)에는 노진, 강익 등과 더불어 지리산을 유람하였다.  
37세 때(1558년, 무오) 노진, 이후백(李後白), 강익(姜翼) 등과 함께 남명선생을
    모시고 
학문을 연마하였다.  

38세 때(1559년)
 진사회시(進士會試)에 2등으로 합격하였고,  대과(문과)에
     급제하였다.
    이때부터 13년에 걸친 관직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는데, 성균관 학유라는
     교수직으로 경상좌도 성주목 훈도로 
 재직하면서 성균관 학유라는
     교수직으로
 유생을 4등급으로 분반하여 가르쳤다. 

41세 때(1561년) 최영경(崔永慶), 이조(李晁), 김우옹, 하항(河沆),
     유종지(柳宗智) 등과 
 서로 오가며 강마하였다. 

43세 때 주자학을 배우고 [심경]과 [근사록]을 질문하였는데, 
    퇴계선생이 [중용]에 있어서는 자신보다 뛰어나다고 하였다. 
    퇴계선생의 사후 51세 때에는 사제문(賜祭文)을 지어 올리기도 하였다.  

 
44세 때(1564년, 갑자)에 여러 유생을 모아 [중용장구]를 가르쳤는데, 
     이 때 대사성이던 허엽(許曄)이 [대학]을 강론하고 말하기를, 
     '우리 무리 가운데에 더불어 비할 이가 없다'고 하였다. 

     그해 7월에는 7월에 남명선생을 모시고, 노진, 김우옹) 등의 여러 동학과
     덕산사(德山寺),  
지곡사(智谷寺),  환아정(換鵝亭), 남계서원 등을 두루 다니며 
     자연을 음미하며  호연지기를 길렀다. 

45세 때(1565년) 현관에서 노진을 만났으며, 조종도가 방문하기도 하였고, 
    노흠이 방문하기도 하였다. 11월에는 노진과 더불어 함양의 남계서원에 모였고 
     조식(曺湜)이 방문하여
 남명선생을 따라 지곡사를 유람하였는데,  
     이 때 도희령(都希齡), 권문임(權文任), 정구(鄭構) 등도 모였으며,  
     단속사(斷俗寺)로 따라가  경의(敬義)를 강론하였다. 

해에 그는 서원에 머물면서 노진, 강익 등과 [연평문답(延平問答)]을 강론하였고, 
12월에 동산사(東山寺)의 효렴재(孝廉齋)에서 주서(朱書)를 강론하기도 하였다. 

46세 때(1566년, 병인) 봄에 남명선생을 모시고 노진, 강익, 김우옹 등과 더불어 
    산청의 지곡사(智谷寺)에 모여 여러 날 동안 자연을 완상하면서 시를 읊었는데, 
    초 십일에 선생께서 지곡사에 이르니 오건(吳健)이 노공을 맞이하여 와서 뵈었다. 

    이튿날 강익(姜翼), 김우옹, 정복현(鄭復顯), 도희령(都希齡), 정유명(鄭惟明),
    임희무(林希茂) 등이 
잇달아 도착하였다.
    멀고 가까이 있는 선비들이 이러한 소문을 듣고 구름처럼 모여 여러 날 동안
    학문을  강론하였다. 
 
47세 때(1567년, 정묘) 정월에 승정원 주서(承政院注書), 기사관(記事官)이 되었고,
     2월에는 
성균관 전적이 되었다.  3월에는 사간원 정언, 6월에 예조 정랑, 
    병조 좌랑이 되었다. 

48세 때(1568년, 무진) 4월과 7월에 사간원 정언을 제수받고, 
    청진학납간소(請進學納諫疏)를 올렸다.  
8월에는 이조 좌랑과 정언을 제수받고,  
    청물순예접견이황계(請勿循例接見李滉啓), 
    논국혼비례소(論國昏非禮疏), [청국혼상검계(請國昏尙儉啓)를 올렸다.  

    11월에는  사간원청제가소(司諫院請齊家疏),  청정심납간소(請正心納諫疏)
    청죄신사정불효계칠(請罪申士禎不孝啓七), 
    청출석상궁계삼(請黜石尙宮啓三)등을 올렸다. 

49세 때(1569년, 기사) 공조 좌랑, 예조 좌랑, 정언, 전적, 사간원 헌납, 성균관 직강, 
    사헌부 지평을 제수받았다.

50세 때(1570, 경오) 8월에 어사로 재상경차관(災傷敬差官)을 겸하여 호남을 두루
    살피고, 
 어사겸재상경차관시계이(御史兼災傷敬差官時啓二),를 올렸다. 
    특히나 이 때 포조 포졸의 폐단을 고친 일은 민생에 깊이 관련된 사안으로서 
    이는 남명선생으로부터  '배운 바를 저버리지 않았다'는 평을 들었다. 

51세 4월에는 홍문관 부교리를 배하고, 청거경궁리차(請居敬窮理箚)를 올렸다. 
   6월에 예조 정랑, 이조 정랑을 제수받았다. 53세 때(1573년, 계유) 11월에 성은에
   보답코자  
홍문관 전한(弘文館典翰)을 제수받고 상경하였으나 중도에
   신병(身病)으로 사양하고 돌아와 
다시 서계(西溪)에서 지냈다.

52세 되던 해에 남명선생이 돌아가시니, 장례 때에 문인의 첫 번째 자리에서
    예를 치루었다.
    그가 교유한 인물은 양희(梁喜), 노진, 강익(姜翼), 정복현(鄭復顯),
    도희령(都希齡),  정유명(鄭惟明),  
임희무(林希茂), 노흠(盧欽), 이로(李魯) 등을
    비롯한 남명선생의 문인  대부분을 포함하며, 
특히 김우옹, 정구(鄭逑)와 
    같은 인물은 그가 성주 훈도로 재직할 때 직접 가르치기도 한 경우이다. 

    그때(1572년, 임진) '이조정랑 오건(吳健)이  벼슬을 그만두고 귀향하였다. 
    오건은 어릴 적부터 학문을 좋아하여 조식을 따라 배우다가 늦게야 과거로
    발신(發身) 하였는데,  
문벌이 낮아 벼슬이 높이 오르지 못하였다. 
    많은 명사들이 그가 어질다는 것을  알고 
사관(史官)으로 천거하였다. 
   
    사관은 으레히 시재(試才)를 거친 자가 하였는데 오건은 취임하지 않았다.
    어떤 사람이  그 까닭을 묻자, 
  오건이 말하기를, "내가 괴롭게 스스로
    천고 시비의 세계로 들어갈 것이 뭐가 있는가."라고  하였다. 
   
    6품으로 오른 뒤에 청요직을 지냈고 전조(銓曹)의 낭관이 되어서는
   공도(公道)를 넓히기에  노력하였다
   사람됨이 순실(淳實)하고 과감하여 어떤 일을 당하면 곧장 앞으로 밀고 나가고
   흔들리는  일이 없었
다.  

노진은 오건과 친분이 있었는데, 나무라기를, "그대가 초야에서 출세하여
현달 하였으니 
그대에게는 과분한 일이다. 
따라서 마땅히 뒤로 빠지고 조심해야 할 것인데,  
무엇 때문에 섣불리 자신의
소견을 고집하여 많은 사람의 노여움을 자초하는가."라고 하였으나,  

오건은 그 자세를 마냥 고치지 않았으며 사람들의 노여움은 더 심해갔다.  
게다가 주상의 뜻이 사류(士類)를 싫어하고 유속(流俗)의 형세는 더욱 강해지므로, 
오건은 일을 시행할 수 없음을 헤아리고 마침내 벼슬을 버리고 돌아갔다.

또, 전 홍문관 전한 오건의 졸기에 '전 홍문관 전한 오건(吳健)이 졸하였다.  
오건은 어릴 때부터 성품이 단성(端誠)하고 견고하였는데, 11세에 부친의 상을
 당했을 때 
이미 효성으로 소문이 났고 장성하여 모친의 상을 만나서는
더욱 예문(禮文)에 독실하였다. 

집안이 가난하여 학문에 뜻이 있어도 선생을 모시고 배우지 못했는데, 
집안에 있는 [중용(中庸)] 1권을 수백 번 읽어 음훈(音訓)이 익숙해 진 뒤에
비로소 깊이 사색하며 
전심으로 정밀을 기하였다. 그리하여 오래되어 의심
나고 모르는 것이 차츰 없어진 다음에야  
[대학(大學)]·[논어]·[맹자]로 옮겨갔 데,
그 때는 공부하기가 매우 쉬웠다. 

이에 선생(先生) 장자(長者)를 찾아가 강론하였는데, 요체가 있었으므로
 이황(李滉) 이하  숙유들이 모두  
그가 정밀하고 깊어 미칠 수 없다고
 칭찬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저명해져  현직에 등용되기에 이르렀다. 

명묘(明廟)가 승하하였을 때는 예복(禮服)으로 방상 삼년(方喪三年)을 하고
 소식(素食)하였으니,  
그 독실한 행실이 이와 같았다. 
벼슬에서 물러난 뒤에 사림이 많이 아깝게 여겼으며 
반드시 다시 기용하려고
잇따라 시종직(侍從職)을 제수하였으나,  
모두 사양하고 나가지 않았다. 

54세 때 
시골에서 지낸 지 3년만에 졸하니  학도들은 덕계선생(德溪先生)이라
    불렀다.  그 뒤에 향인(鄕人)이 사당을 세워 향사하였다.
    이 사당은 후에 경상남도 산청군 산청읍 지리 덕우촌에 있는

    서계서원(西溪書院) 으로 개칭되었는데 오건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되었다. 

1572년 이조정랑으로 있다가 관직을 버리고 경상도 산음 덕계리(德溪里)로
낙향하였다.
여러 차례 조정에서 불렀으나 모두 거절하고 서사(書史)를 섭렵하면서
시작(詩作)과 강론으로 여생을 마쳤다. 

2023년 2월 일 
석암 조헌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