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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인물(72)

성완종 전 경남기업 회장

by 석암 조헌섭. 2015. 4. 10.

성완종 전 경남기업 회장

 

초등 중퇴, 14세 때 110원 들고 상경 1조대 그룹 일궈 … 2012년 의원 당선

입력 2015-04-10 01:22:28
수정 2015-04-10 01:23:09
성완종 전 경남기업 회장의 프로필엔 학력 사항이 없다.

 2012년 19대 총선에 당선된 직후 국회수첩에 적힌 그의 학력은 목원대 명예

경영학 박사가 전부다.

 어려운 가정환경 때문에 초등학교 4학년을 중퇴해서다.

 그래서 그에겐 늘 ‘입지전적 인물’이란 수식어가 따라붙었다.

 초등학교 중퇴 학력에도 불구하고 1조5000억원대의 그룹을 일군 능력,

 34억원을 출연해 서산장학재단을 세운 열정, 재수 끝에 국회의원에 당선된 집념.

 이런 그의 인생이 ‘입지전적’이란 단어에 담겼다.

 1951년 충남 서산 해미면에서 태어난 성 전 회장은 14살 때 110원을 들고 무작정

 상경해 신문배달, 약 배달 등으로 돈을 모은 뒤 74년 90만원으로 화물운송업에

 뛰어들었다. 77년 서산토건, 이후 대아건설을 차례로 인수하며 중견

 건설업체를 일군 뒤 2003년엔 경남기업까지 거머쥐며 2008년 매출 1조5000억원의

 대아그룹으로 성장시켰다.

 그러던 그는 정치에 뜻을 뒀다. 2003년 당시 자민련 김종필 총재의 특보단장을

 맡아 정치에 입문했다. 하지만 정치를 시작하면서 고난이 뒤따랐다.

 2004년 비례대표 2번으로 17대 총선에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이후 정치자금법 위반으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 그러다 2012년 19대 총선에서

 선진통일당 소속으로 고향 서산-태안에 출마해 당선됐다.

 하지만 기쁨은 오래가지 못했다. 지난해 5월 선거법위반 혐의가 유죄 확정되며

 의원직을 상실했다. 그러곤 올 들어 검찰의 자원외교 수사 대상으로 떠올랐다.

 성 전 회장 주변 사람들은 그가 2007년 MB 인수위 자문위원으로 활동했지만

2012년 박근혜 대통령의 당선을 위해 선진당과 한나라당의 합당에 앞장섰다고

 입을 모은다. 성 전 회장은 수사가 시작된 뒤 가까운 인사들에게 "선거법 위반으로

 이미 사회적으로 죽은 나를 두 번 죽이는 거냐"고 호소했다고 한다.

이가영·박진석 기자 ideal@joongang.co.kr

◆경남기업=시공능력 순위 26위의 경남기업은 1951년 대구에서

 출범(당시 회사명 경남토건)한 이래 국내외 건설 붐을 업고 성장하다

 84년 전두환 정권하에서 대우그룹에 편입됐다.

 대우 해체 이후 성 전 회장이 경남기업을 인수했지만 2009년 워크아웃 대상이 됐다.

 법원은 지난 7일 기업회생절차(법정관리) 개시를 선언했다.

 

초 중퇴후 110원 들고 상경, 대아그룹 오너 로

매출 1조 넘는 건설그룹 일궈,  2만여명에 장학금 

 추풍낙엽처럼 떨어진 자유선진당의 몰락속에 빛난 인물이있다.

 충남 서산·태안의 성완종(61) 당선자다. 성완종 당선자는 여론조사와 방송3사

 출구조사에서도 1위를 기록했고 득표율 42.6%(3만9615표)로 당선됐다.

성 당선자는 어떻게 자유선진당 후보들이 쓰나미처럼 쓸려나가는 가운데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 성 당선자는 정부투자기관, 지방자치단체, 민간기업을 통해 재원을 마련해

 서민주택 3000가구를 건설하겠다는 공약을 내세웠다. 이 공약이 지역민들에게 먹혔다는

 게 주변의 평가다.

성 당선자는 건설 CEO(최고경영자)로 유명하다. 경남기업을 거느린 대아그룹 오너다.

 대아그룹은 2011년 매출 1조5000억원을 기록했다. 재력(財力)으로 당선됐을까?

 천만의 말씀이다. 서산·태안 사람들은 그의 입지전적 스토리를 안다.

 그는 19대 당선자 중에서 가장 감동적인 인간 승리의 주인공이다.

 맨주먹으로 매출 1조5000억원의 대기업을 일으킨 사람 성완종.

그의 경력에는 학력이 없다. 목원대 명예경영학 박사가 전부다.

성 당선자는 초등학교 5학년 중퇴가 정규 학력의 전부다. 왜 그는 초등학교를 중퇴했을까.

 여기에는 눈물 나는 가족사가 있다.

10대 때 4남매의 가장 역할


그는 1951년 충남 서산에서 4형제 중 맏이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서산에서 유통업을 했다.

 서산에서 쌀, 보리 등 곡물을 수집해 배에 싣고 인천으로 가 팔았다.

 그리고 그 돈으로 생필품을 도매로 사들여 다시 서산에서 팔았다.

육상교통이 발달하지 않았던 1950~1960년대에 충남 해안가 사람들은 배편으로 인천을

 왕래하면서 생업에 종사했다. 인천에 충남이 원적인 사람들이 많이 사는 배경이다.

평탄했던 어린 시절은 초등학교 4학년 때 깨졌다.

 어느 날 아버지가 인천에서 여자를 데리고 집으로 왔다. 아버지가 작은 부인을 들인 것이다.

 졸지에 4형제는 한 지붕 아래서 어머니와 작은 어머니와 함께 사는 처지가 됐다.

 그러던 1964년 12월, 차가운 겨울날 4형제와 어머니는 집에서 쫓겨났다.

이것이 파란만장한 삶의 시작이었다. 어머니와 4형제는 동네 이웃 사랑방에서

 며칠을 기거했다. 10여일 지난 어느 날 밤 어머니는 4형제를 깨워 손에 인절미를 쥐여줬다.

 그러곤 장남 완종에게 이렇게 당부했다. “새 여자가 둘째는 냉대를 안 하니까 거기 맡기고

 셋째와 넷째는 소생이 없는 외삼촌에게 맡겨라.”

어머니는 그날 밤 집을 나가 서울에 식모살이를 하러 갔다.

 이후 완종은 동생들을 데리고 아버지집으로 들어가야 했다. 두 살짜리 막내 동생을 돌보는

 일은 완종의 몫이었다. 모유를 먹지 못한 어린 동생은 밤마다 잠을 못 자고 울었고,

 그때마다 작은 어머니는 완종을 구박했다. 결국 완종은 어린 동생을 업고 걸어서

 서산에서 70리 떨어진 해미의 외삼촌 집으로 갔다.

 외삼촌 내외에게 막내 동생을 맡긴 완종은 다시 아버지 집으로 들어갔다.

 완종은 학교를 갔다오면 작은 어머니 가게를 돕기 위해 꼭 땔감을 해왔다.

그렇게 1년여가 흘렀다. 어린 완종은 생모가 보고 싶어 견딜 수가 없었다.

 완종은 외삼촌 집에서 서울에 기거하는 어머니 주소를 알아내 무작정 상경했다.

 완종의 호주머니에는 외삼촌에게서 받은 110원이 들어 있었다.

 영등포역에서 내린 완종은 이삿짐 센터를 찾아 어머니가 살고 있는 주소를 들이밀었다.

 그 집에서 아침까지 얻어먹고 완종은 어머니를 만날 수 있었다.

 그렇지만 식모살이를 하는 어머니는 아들을 거둘 형편이 아니었다.

이때부터 완종의 서울 생활이 시작됐다. 완종은 어머니가 사는 집에서 가까운 교회에

 잠자리를 얻었다. 새벽에는 신문 배달을 했고, 낮에는 광생약국에서 ‘약 배달 소년’으로

 일하며 돈을 벌었다. 밤에는 교회 부설 야학에서 공부를 했다.

 완종은 신문 배달과 약 배달로 버는 돈을 꼬박꼬박 고향의 외삼촌에게 보냈다.

 외삼촌은 이 돈으로 장리쌀을 놓아 알뜰살뜰 늘려 7년 만에 해미에 집 한 칸과

 전답 3000평을 마련했다.

 잠잘 곳과 농사 지을 땅이 생기자 어머니와 4형제는 눈물의 재상봉을 했다.

공사판·배달… 안 해본 일 없어

완종은 집안의 가장이었다. 생계는 물론 동생들 학비를 책임져야 했다.

 완종은 돈을 벌기 위해 공사판이란 공사판은 다 다녔다. 이때 완종은 화물운송 중개업에

 눈을 떴다. 아는 사람이 화물차 2대를 가지고 성신화물 해미영업소를 차렸다.

 이 사람은 화물을 확보해 온양까지 운송해주고 대당 1000원씩 소개료를 받았다.

 완종은 1974년 해미영업소 직원 신분으로 화물차를 운전했다. 들소처럼 일하며 생활비를

 제외하곤 악착같이 저축했다.

 

 이렇게 지독하게 일한 끝에 완종은 90여만원의 목돈을 만질 수 있게 됐다.

 이 돈을 종잣돈으로 삼아 할부로 화물차 1대를 구입했다. 3년여 공사자재·채소·곡물 등을

 운반하며 착실하게 재산을 늘려나갔다. 그러던 어느 날 밤 화물을 싣고 밤길을 달리다

 사고를 당한다. 이후 목숨을 담보로 한 화물 운송에 대한 미련을 접는다.

1977년 완종은 자신을 친아들처럼 대해주던 사람으로부터 뜻밖의 제안을 받는다.

 건설업을 해보지 않겠느냐는 것이었다. 건설업에 대해 아는 게 전혀 없었지만 젊기에

 두려움이 없었다. 서산토건 대주주가 농협조합장에 당선되면서 200만원의 소유 지분을

 완종에게 넘겼다. 이게 건설업과의 첫 인연이었다.

그는 성실함과 부지런함으로 서산토건을 탄탄한 기업으로 키워나갔다.

 서산토건은 이어 대아건설을 인수했다. 그리고 2003년 대아건설은 경남기업을 인수하면서

 그룹의 면모를 갖췄다. 이로써 대아그룹은 매출 1조2000억원대 그룹으로 급부상했다.

 경남기업은 대아그룹의 주력 기업이 됐다. 이때부터 그는 베트남 등 해외시장을

 공격적으로 개척했다. 2008년 대아그룹은 1조5000억원의 매출을 달성했다.

그는 기업가로 성공한 뒤 베푸는 삶을 살아왔다. 1991년 그는 34억원을 출연해

 서산장학재단을 설립했다. 자신의 불우했던 어린 시절을 알기에 학비가 없어서 공부를

 못 하는 학생들을 돕고 싶었다. 현재까지 2만1500명에게 장학금을 지급해왔다.

성완종 당선자는 2001년 충청포럼을 설립했다. 충청포럼을 통해 각계에 진출해 있는

 충청지역 인사들의 네트워크를 만들어왔다. 충청 출신 인사들은 그로부터 직·간접으로

 신세를 지지 않은 사람이 없다는 말이 나올 정도다. 그는 ‘사회로부터 얻은 부와 명예는

 사회로 환원해야 한다’는 철학을 이미 마흔 살 때부터 실천해왔다.

윤창중 ‘윤창중칼럼세상’ 대표는 성완종의 입지전적 성공을 주목해온 사람 중 한 명이다.

 윤 대표는 그를 이렇게 평가한다. “인간이 성공을 하게 되면 혹독했던 시절을 망각하고

 다른 사람들의 어려움이나 불행한 상황에 소홀하기 쉽다. 하지만 성 회장은 남의 어려운

 상황을 자기 일처럼 인식한다. 그는 놀라운 인간성을 갖고 있는 사람이다.”

성우종 도원E&C 대표가 성 당선자의 바로 아래 동생이다.성우종대표는 경남기업에서

 30년을일한 뒤 독립했다. 성당선자는 국회의원 후보등록시 재산을 134억원으로 신고했다.

부인 동영숙씨와의 사이에 두아들이 있다.

 그는 2007년 자서전 ‘새벽빛’을 통해 자신이 걸어온 삶을 털어놓았다.

 그 책에 이런 대목이 나온다.

‘예나 지금이나 가난은 나의 스승이요, 근면은 나의 재산이다. 가난하면 저절로 간절함이

 생기고 저절로 부지런해지는 법. 나도 우리 가족이 부유하지 않아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돈 없는 서러움을 조금은 알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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