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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인물(72)

노무현 집중 탐구

by 석암 조헌섭. 2013. 5.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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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집중 탐구

노무현은 경남 김해군 진영읍 본산리 봉하 마을에서 1946년 음력 8월6일

과수원을 하는 아버지 노판석(盧判石)씨와 어머니 이순례(李順禮) 씨의 3남2녀중

막내로 태어나 진영 대창 초등학교 와 진영 중하교 부산상고를 졸업 사법고시17회합격

하여 대전지법 판사로 재직 7개월 만에 판사직을 그만두고 변호사 생활을 한다.

봉하 마을은 낡은 스레트 지붕들이 띄엄띄엄 있는 전형적인 빈농부락이다.

 

비가 조금만 와도 물이 차 농사를 망치는 바람에

'까마귀가 와도 먹을 것이 없어 울고 돌아가는 마을이 였다고 한다.

마을 뒤편에 옛날 봉화를 올렸다는 봉화산이 있다 .

말 형상의 바위산 이며 가야시대 왕자가 살았다는 골짜기 자왕골도 있다.

 

광산(光山)노씨인 판석씨 집안이 이곳에 뿌리 내린 것은 8대째라는 게

노무현 형 건평씨의 설명이다.

어머니가 무현이를 43세에 낳아 난산 이었다" 며 당시 읍내 남산병원장이

집에와서 이를 도왔다.

 

노무현은 6살 때 아버지 한태 배운 천자문울 다외워 주변에 노 천재 소리를

들었고, 봉화산 일대에 소풍나온 읍내 학생들이 집으로 찿아와 어린 노무현을

구경하고 갈 정도였다는 겄이다.

 

1953년 대창초등학교에 입학 평균97점으로 2등을 한다.

대창초등학교는 김영삼 전 대통령의 부인 손명순 여사가 졸업한 곳이기도하다.

2학년 2반에서 1등을 한다.그는 6년 내내 우등상을 탔다.

그러나 집안 형편은 무현이의 학교생활을 제대로 뒷받침 하지못했다.

소년 노무현은 1학년 32일, 2학년 38일,을 결석을 했다.

집안일 돕기로 결석을 자주 했다는 것이다 .

 

초등학교 시절 무현은 첫사랑을 경험한다. 같은 마을에 사는 한학년 밑의 윤용녀 란

여 학생이그 대상 이였다. 지금도 노무현의 친구들이 동내에서 제일 예뻤다고

얘기하는 용녀와 함께 기차를 타고 인근 한림면 까지 가서 다시 동내로 걸어며

데이트를 하기도 했다.

누나 노영옥은 무현이 5학년 때 일기장을 몰래 들춰 봤는데 다음과 같이적혀 있어

남매들이 돌려보며 박장대소했다고 한다.

 

 오늘은 참 좋은 날이었다. 용녀가 나한테 웃음을 주었다.

그것이 애정인지 우정인지 알 수는 없지만 , 돌아서는 뒷모습을 한참 동안 쳐다봤다.

그러나 용녀와 해어진것이 내 초라한 행색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중학교 내내 열등감에

시달렸다고 회고 했다.

 

노무현은 6학년 때 담임 이던 신종생 교사의 권유로 전교 회장 선거에 나가

전교생 502표 가운데 302표를 얻어당선 된다 .

노무현은 이 경험이 남 앞에 나서는 일에 자신을 갖게 한 계기가 됐다고 한다.

무현은 작은 누나 노영옥은 어머니가 늘

;무현이는 봉화산 정기를 받고 태어났다; 낳을때 굉장한 꿈을 꿨다 하지만 부정타니까.

예기는 하지 않겠다 너희는 그게 이뤄지는 것을 볼거다, 고 말씀하셨다 고했다

어머니는 새벽마다 정화수를 떠놓고 자식들의 성공을 기원 했다고한다.

 

 

가난 탓일까 초등 5학년 때위염으로 보이는 배앓이에 시달려 밤에 아버지가 업고

읍내까지 뛰어간적이 몇번이나 있었다.

기성회비를 제때 못내 벌을 서고 창피도 당해야 했다 .

무현의 6학년 일기장엔 ,``초가집이 변해 기와집도 될수있고 ,흙 담장이 변해 벽돌담이

될수있다.이뤄 내고야 말겠다.``

 

내가크면 전 인류의 등불이 될것이다.그게 안되면 10명의 등불이라도 될것이다.

무현은 59년 중학교 입학 때도 우여 곡절을 격는다.

입학금이 없어서였다 . 그러다 입학때는 책값만 내고 입학금은 봄농사를 지어

7월까지 갚는다 는 조건으로 입학허가를 받을수 있다는 얘기를 듣고 어머니와 진영 중학교

를 찿아가 교감 선생님을 만나 여름 복숭아 농사를 지어 입학금을 내겠다고 호소했다.

 

그러나 교감은 안된다고 잘랐다 교감은 무현이 어머니 에게 당신 큰아들은 대학나와도

저렇게 백수건달 아니냐.공부시킬 필요도 없다고했다

설움에 북받힌 어머니가 교감 앞에서 펑펑 울자 무현이는 입학 원서를 푹푹 찢어 버렸다.

그리고는 어머니 집에 갑시다,

나 이학교 안다녀도 좋소 하며 뛰쳐나왔다.

그런 무현에게 교감은 결국 교감은 자기의 발언을 사과 했고 노무현은 중학생이 되었다.

 

;저봐라 , 저런놈 공부 시켜봐야 깡패밖에 안된다고 말했다.

자초지정을 들은 큰형다음날학교로 찿아가 교감의 멱살을 잡고 ;공부해 봐야 깡패밖에

안된다는 비 교육적 발언을 문제 삼겠다고 항의 했다.

그런 무현에게 결국 교감은 자기의 발언을 사과 했고 노무현은 중학생이 되었다.

당시 무현이네집 재산은 과수원 600평 양계장 부동산 합계 1백만환, 동산 10만환,이었지만,

 

양계장도 큰형 고시공부 뒷바라지에 들어 갔다고 한다.

무현은 중학교 2학년을 마치고 공납금 마련할 길이 없어 1년간 휴학을 한다 .

당시 부산의 대표적 상공인 이던 김지태 부산일보 사장이 운영 하던 부일 장악회 시험에합격

중학교를 계속 다닐수 있었고 부산상고 진학 후에는 김사장이 만든 백양 장악회의 장학금을

받는다.

노무현은 나의 오늘은 그분이 디딤돌을 놓아준 셈' 이라며 고마워 하고 있다고 한다.

훗날 변호사가 된 노무현은 86년 김사장 사후 유가족 들이 상속세 117억원이 부당하게 부과

됐다며 국세청을 상대로 제기한 행정소송을 맡아 승소 판결을 이끌어내 보은 한 샘이다.

장학생 으로 부산상고에 입학한 무현의 꿈은 졸업후 은행원이 되는 것이었다.

부산으로 유학을 간 노무현은 방을 얻어 자취를 하거나 하숙할 형편이 못됐다.

그는 부산 범일동에 있는 소화기 판매회사 에서 야간경비를 봐주고 라면으로 숙식을

해결 했다.

 

때론 부산에 시집가 살던 누나 집이나 친구집을 전전했다.

이도 저도 안될때는 학교로가 교실 마루 바닦에 잤다.

겨울철 차가운 학교 교실 바닥에서 몸을 떨며 이를 악물고 잠을 잤더니 이가 아파 아침밥을

제대로 먹지 못했던 일도 있었다고 한다.

무현은 부산상고 2학년때 부터 농땡이를 치기시작했다. 머리를 안깍으려 시험기간에 도망

치기도 했고, 친구들과 어울려 술과 담배를 배웠다.

성적은 계속 떨어져 1학년 502명중 48등. 2학년 481명중 213등으로 곤두박질 쳤다.

3학년이 되면서 고향에 계신 부모님을 생각해 취직 공부에 열을 올린다.

대학갈 형편이 아니었기에 때문에 진학반 대신 취업반을 택한다.

생활 기록부엔 주산 3급.부기 2급. 타자 3급 자격증을 취득한 것으로 돼있다.

졸업할 무렵 농협 입사시험에 떨어졌다.

 

가족들은 무현이가 졸업하면 번듯한 은행에 들어 갈거라고 동내 자랑을 하고 다녔는데

크게 낙심 한다 .

결국 노무현은 심해공업이란 어망회사에 취직을 한다.

하지만 무현은 첫 직장을 한달 반 만에 그만둔다. 한달 반치 6 천원 월급 으로 무얼할까,

옷을살까 구두를 살까 망설이다가 결국 기타 하나 사고 고시 공부용 헌책 몇권 나머지는

술 마시고 영화보는 데 모두 써버렸다.

 

그리곤 내고향 진영으로 내려가 고향마을 산기슭에 황토로 벽을 발라 직접 집을 짓는다.

그리고는 고시공부에 매달린다.

한학을 한 부친 판석씨가 이 흙집에 마옥당(磨玉堂옥을가는집) 이란 이름을 붙혔다.

이해 그는 고졸 출신에게 사법고시에 응시할 자격을 주는 사법 및 행정요원 예비시험에

에 합격 한다.

두형도 각각 67년 68년 5급공무원 시험에 합격해 세무공무원이 됐다.

이때부터 살림살이가 좀 나아졌다.

무현이는 68년군에 입대해 1군 사령부에서 전반을 원통에있는 을지부대에서 후반을 보내곤

71년 34개월의 군 복무를 마치고 고시공부 하기 전부터 마을 처녀에게 마음을 빼앗기기

시작해 상대방의 단호한 거부에도 불구하고 열을 올리게 됐고, 8개월에 걸쳐 집요하게

추근거려 1차시험 직전에야 겨우 권양숙의 마음을 함락 시키고 .....(중략)

9월에야 정신을 바짝 차리고 장유암 이라는 절에 들어가 수석합격 이란 표어를 내걸고

공부에 전념 했다.

 

73년 1월 노무현과 권양숙은 결혼하고 결혼 4개월만에 건호를 낳는다.

하지만 73년5월14일 집안의 정신적 지주이던 큰형 영현(英鉉)씨가 교통사고로 숨진다.

사시15회 16회 낙방하고 마침내 75년 3월27일 오전10시 친구 이재우가 신문을 보고

17회 사법고시에 합격 했다는 소식을 전한다.

아침부터 한바탕 싸우고 토라져 있던 권양숙은 노무현의 무릅에 얼굴을 파묻고

엉엉 울어 댔다.

권양숙은 지금도 이생에서 가장 기뻤던 순간을 ;남편이 고시에 합격 했을 때라고 했다.

 

77년 대전지법에서 판사 생활을 시작한 노무현은 7개월 만에 판사직을 버리고

78년 부산의 재야 변호사의 사령관 격인 김광일(金光一)변호사를 찿아가 다짜고짜 변호사

개업비용이 모자라니 1백만원인가를 빌려 달라고했다.

변호사 개업을 해 사무장을 지낸 최도술은 노 변호사는 주로 1심에서진 사건을 2심에서

맡는 경우가 많았다. 치밀했다 남들이 변론사를 10장 쓸때 1백장을 썼다.

 

 

법조항을 인정 할 때도 조문 전 체를 ,

판례를 인용할 때도 전문을 게재해 판사들이 그의 변론서를 찿아볼 정도 였다.

등기 업무에 대해 최도술은 개업을 했지만 상고 출신이라 사건이 많지 않아 부동산 등기

업무를 하게 됐는데 등기 업무는 사실상 사법서사의 몫이다 , 그런데 노변호사가 싹쓸이해

불만이 많았다.

 

79년 부마항쟁 때 동료 변호사들이 영장도 없이 잡혀가 고문당하고 있다는 소식도

귓등으로 흘려 넘겼던 노무현은 학생들이 고문당한 상처를 보고 큰 충격을 받은것 같다.

“온몸에 시퍼런 멍자국이 남아있었고 , 변호사인 나조차 믿지 못해 공포에 질린 눈으로 슬금

슬금 눈치를 보는 모습을 보자 피가 거꾸로 솟는듯 했다 ” 고 적고 있다.

이 충격으로 노무현은 법정에서 책상을 치고 고함을 지르는 등 격렬한 변론을 한다.

고문당한 아들의 어머니를 법정 증인으로 세워 방청석을 울음바다로 만들기도 했다고

기억한다.

 

변호인들의 변론에 판사가 얼굴을 찡그리자 노무현 변호사는 ,

저희 조상 중에 벼슬길에 올랐던 분도 많습니다만 그런 할아버님보다 옳은말하다

귀양살이로 일생을 보낸 할아버님에 대해 더 많이 이야기하고 존경합니다.

사건의 성격상 심리하기 벅차겠지만 후손들이 손가락질 보다는 칭송과 존경으로 우러러볼

판결을 내려 주십시오, 라고 말한다.

이때 부장판사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 올랐다.

 

상고 동기들이 은행에 있다보니 등기 업무가 많을 것이라고 말한다.

82년노무현의 변호사 사무실에는 대학 시절의 시위 경력 때문에 판 검사 발령을 받지못한

문재인 변호사가 합류하여노무현의 현실 참여는 본격화 한다.

당시 노무현은 변호사 사무실을 아예 문재인 에게 맡기고 자신은 매달 1백만원 만 가져

갔다고 한다 .

권양숙이 학생들에게 제발 우리남편 좀 그만 괴롭혀라 고 불만을 토로한것도 이무렵이다.

아들 노건호는 어머니로선 아버지의 사회운동 자체를 못마땅 하기보다 생계까지 내

팽기치고 운동을 하는게 불만 이였던 것 같다면서 두분의 말다툼이 좀 잦았다고 기억한다.

87년 대우조선 이석규씨의 사망 사건이나자 거제도에 들어가 시위도중 치루탄을 가슴에

맞고 사망한 이씨의 보상문제를 논의하다 유족과 경찰 회사측의 합의가 이루어 졌음에도

“장례식에 앞서 임금 협상이 타결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자 제3자개입,장례식 방해,혐의로 수배되어 부산에서 잡혔다.

그는 구속 21일 만에 적부심에서 풀려나지만 11월에 변호사 업무 정지 처분을 받는다.

이같은 투쟁을 통해 노무현의 이름은 더욱널리 알려진다.

이어 정계입문 제의를 받아,

 

88년 13대 총선을 앞둔 3월 통일민주당 김영삼(金泳三) 총재가 전화를 해 군정 종식을

위해 대선에 나갔으나졌다 . 국히의원 선거 마저 지면 독재 정치가 올 것이라며 정치 참여를

권했다.

부산 재야의 대부격인 송기인 신부가 [참 멋진 놈 하나를 만났다]라는 책에실은기억.

김광일은 부산 중구 노무현은 동구에 당선 총선때 마다 그가 출마한것을 보면 비효율 정치를

한것이다.

13,14,15,16,총선과 보궐선거 부산시장 선거등 여섯번 출마해두번 당선됐다 .

13대 국회에서 5공비리 청문회 에서 이름을 날렸다 .

초선인 노무현은 장세동(張世東) 전 아기부장과 안현태(安賢泰)전 경호실장 현대그룹

정주영(鄭周永)회장 등을 치밀한 추궁으로 궁지로 모는데 성공해 자신의 표현대로 하루만에

유명인사가 된다.

;내가 청문회에서 돋보인 것은 새로운 사실을 밝혀내서가 아니라 증인들의 기를 꺽는데

성공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89년3월 노무현은 의원직 사퇴서를 낸다, 5공특위 증언 출석을 방해하고 노동법 개정안에

대해 거부권 행사로 국회를 모욕했다.

정부가 법을 지키지 않는데 국회가 무슨 소용이고 국회의원이 무었을 할수 있겠는가” 라는

것이 사퇴 이유다. 하지만 김영삼의 간곡한 권유로 사퇴를 철회한다.

 

전두환증언때 명패 팽개쳐

노무현은 그해12월31일 청문회에 출석한 전두환 전 대통령이광주민주화 운동에 대해

“당시 위급한 상황에 처한 현지 지휘관 들이 자위권 행사의 불가피성을 강조했으나...”라고

증언하자 벌떡 일어나 자신의 명패를 던졌다.

이로인해 청문회는 무산됐다. 전 전대통령 추궁을 벼르던 당시 야당 소속 청문위원 들은

노무현의 느닷없는 행동으로 국민의 이목을 집중 시켰던 청문회가 허망하게

끝났다고 지적했다.

노무현은 그의 책에서 전두환씨에게 명패를 던진게 아니라 땅바닥에 내동댕이 친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청문회 스타가 된 뒤 부산일보와 인터뷰에서

“저의 정치노선은 진보입니다 도둑 (5공세력지칭)을 일단 몰아 내야 하기 때문에 연합이

필요 하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해결되면 노동자,농민,도시 영세민 등을 기반으로 한

민중정치의 독자노선을 찿을 각오가 변치 않았습니다”

90년 1월 노무현은 매우 중요한 정치적 선택을 한다.

민정당 총재인 노태우(盧泰愚)대통령과 공화당 김종필(金鐘必)총재와 3당 합당을 통해

 민자당을 창당 하지만 노무현은 합류를 거부했다.

 

그는 김영삼을 변절자 ,역사의식이 없는 사람 이라고 비난한다.

꼬마 민주당에 남은 그는 김대중(金大中)총재가 이끄는 평민당과 야권 통합에 참여 했고 통합

민주당에 대변인이 된다 유인태 전 의원의 얘기다.

 

 노의원이 91년 와 합당 할때만 해도 JP 에대한호감은 없었다. 왜 DJ와합당 해야 하느냐 는

식이였다. 총재 경선을 하면 당연히 JP가 될텐데 노의원은 대의원이 호남에 집중 돼있다며

고치지 않으면 때리치우겠다고 어름장을 놓아 결국 당헌 당규를 고치기 위해 대전에서 전당

대회를 연다.

사사건건 문제를 삼자 동교동 당직자들은 속이탈 일이다.

 

96년 총선 직전 dj가 국민회의를 창당 하면서 민주당에 남게된 노무현은 시당창당은 지자제에서

나타난 민심의 왜곡이자 오판이며 보스 중심의 줄서기와 이합집산 이라는 근대적인 정치형태를

답습하는 것일뿐이라며 DJ를 비판하고 3김 청산을 슬로건으로 내새워 대통령이 돼겠다는

 희망을 가진것은 이때부터였다.

노무현은 신한국당을 탈당한 이인제가 출마하면 나도 할수있다 고 말하며

 

97년 DJ의 대선출마를 위해 출범한 새정치 국민회의에 합류 부총재를 맡으면서

97년12월 김대중이 대통령에 당선되자 98년초 DJ를 연구하기 위해 교보문고에 가서 DJ 전집을

모조리 구입한다음 정독했다고 한다.

 

98년 별세한 어머니의 삼우제를 지내기 위해 진영에 내려갔던 그는 고향 친구들이

“와 호남당에 들어갔노”라며 걱정하자 내가 대통령 후보가 되면 영남당 돼는거 아이가,

다 뺏아 오면 된다 아이가 라고 응수했다고 한다.

오늘의 노무현을 있게끔한 노사모(노무현을 사랑하는 모임)도 이때 결성 된다.

부산서 낙선한 뒤 대전의 한 pc방에서 초기회원 600명 동호회 회비1만원씩 내어 5백만원

부정기 회비 1백만원 으로 운영 하였다고 한다.

잿더미 속에서 싹이 튼것이다.

 

정치인 노무현의 무모한 도전은 국민에게도 뚜렸하게 각인 되면서

그의 이미지에 결정적 보탬이 된다.

노무현은 약점 정치인 집단을 조직화 하고 세력으로 역어 이끌어 나가는 조직적 리더십을

한번도 실험해 보지 않았다고 토로한 적이있다.

 

2000년 16대 부산 강서을지구 출마해 낙선해 그해 8월 노동부장관으로 기용 하려 했으나

한쪽으로 치우칠 우려로 행정 자치부 장관도 검토 했으나 국가의 의전을 총갈하는 자리에 고졸

출신 이라는 점이 걸려 결국 해양 수산부 장관이 되었다.

장관 취임 후 소신 있고 일도 잘한다는 평가를 하였고 연말 인사에서 국장 들을 불러모아 과장

인사 권을 줄테니 같이 일 하고 싶은 과장들을 고르라 고 하였다.

이 과정에서 단한명의 국장에게도 지명받지 못한 과장 두사람은 지방으로 발령했다.

그는 장관 시절 3년마다 국장1명 1년마다 과장1명을 내보내야 경쟁이 이루어져 공무원들의

수준이 높아진다 는 말을 자주했다.

 

장관시절 출근길 마주치는 수위나 민원인에게 깊숙히 허리를 굽혔다.또한 장관 수행 비서를

앞자리가 아닌 옆 자리에 앉혔다. 그 이유를 뒤 통수에대고 말하는 것과 옆에 앉게 해 얼굴을

보고 말하는 것의 차이는 말 안해도 알것이라고 한다.

 

이런 과정에서 민주당 대표로 임명된 김중권을 기회 주의자로규정해 파문을 일으켰고 민주당 실세인 권노갑을 김동영 최형우와 함께 머리가 나쁘다고 생각했다는 발언도했다.

세명다 동국대 출신이라 동 동문회에 반발을 사기도 했는데 노무현의아들 건호씨도 동국대를

다니다가 연세대로 옮겨재학중이다 언론 세무조사가 한창일때 언론과의 전쟁 선포도 불사

해야 한다는 발언을 해 물의를 빚는다 .

우여곡절 끝에노무현은 4월27일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선출되었다.

이글은 여,야, 정치적으로 보시지 말고 한 시대의 인물로

봐주시면 고맙겠습니다. 

                     2002년 5월2일 중앙일보 정치부 기획 취재팀 자료중에서 사진 스켄함.

노대통령 서거 4주년을 맞이하여 신문사진이 오래되어 흐리지만 올려봅니다. 2013년 5월23일

 

 

 노무현 =상록수 추모영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