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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인물(72)

김종필 증언록 '소이부답'

by 석암 조헌섭. 2015. 3. 18.


김종필 증언록 '소이부답'
나폴레옹 혁명·사랑 배우려 했지" … 5·16으로 세상 뒤집어 '박정희의 진실'에

가장  다가섰고 그 진실 합작했다.[중앙일보] 입력 2015.03.02 

현대사 연출가 JP … 5·16에서 자비명(自碑銘)까지
정치 9단? 권모술수에 능한 거지 … 풍운아는 '불꽃'이야
후세 위해 '역사의 비곡' 육성증언           

김종필 전 국무총리는 지난해 10월부터 `김종필 증언록`을 위한 인터뷰를 했다. 
그의 기억력은 녹슬지 않았다. 반세기 먼 세월이 어제 같다. 뇌졸중 후유증으로
 오른손이 불편하다. 왼손으로 커피잔을 들었다. [조문규 기자]


  
지난달 25일 부인 박영옥 여사의 유골함을 바라보는 김종필 전 총리. 오른쪽은 아들 김진.
JP(김종필)는 휠체어에 앉아 있다. 유골함이 무덤에 들어간다. 외아들(김진)이 멈추게 한다.
JP는 한쪽 손으로 유골함을 어루만진다. 눈물이 뺨을 적신다. 포근한 겨울.
그의 안경 너머는 언덕 위다. 백로가 날갯짓을 한다. 지난달 25일 부인 박영옥 여사의 하관식이다.
.
유택(幽宅, 묘소)은 지난해 JP가 마련했다. “내가 먼저 가려고 준비했는데···.” 그 언덕에

 다섯 형제들도 잠들어 있다. 고향인 충남 부여군 외산면 반교리. 그 선산에 꾸민
 가족묘원이다.

지난해 8월 그는 유택을 찾았다. 옆에 있던 나에게 말했다. “좌청룡·우백호 그런 명당엔
 해당이 안 돼. 그냥 편안히 드러누울 데 만들어 놓은 거지.”






- 5·16의 설계·실천자이셨는데요.
“혁명의 많은 면에 내 생각이 들어 있지. 하지만 한계가 있어. 박정희 대통령이 부족한

 것을 메워서 이끌어 가고, 그리고 상부상조해서 끌고 간 거야.”
- 그때 어떤 심경이었나요.

 “목숨을 걸었지.” 그의 시는 결의를 압축한다. “장미의 오월/순백의 꽃빛깔 거짓 없듯/

애국의 충정을 뭉쳐/하늘에 걸던/피의 서약….”(5·16 9주년에 씀)

그는 거사의 의미를 회고한다. “4·19(60년)의 역사성을 철학화해서 근대화 전기를
마련해야 하는데 민주당 정권은 그렇지 못했어. 정쟁과 누습(陋習), 극도의 혼란에서
벗어나지 못했지. 우리의 궐기는 부패 무능한 기성 정치인들에게 나라와 민족의
운명을 더 이상 맡길 수
 없다는 거였어.”
 
종필 그는 묘비명을 썼다. 그 121자는 인생관을 압축한다.
“晩年(만년)에 이르러 ‘年 九十而知 八十九非’(연 구십이지 팔십구비)라고 嘆(탄)하며
數多(수다)한 물음에는 笑而不答(소이부답) 하던 者(자).”-
JP는 비문을 풀어 나에게 읽어 준다. “나이 구십 되어 돌아보니 여든아홉 해를 헛되게
살았다고 한탄하는데, 그래도 무엇을 하지 않았느냐는 많은 물음에 대해 미소를 지을 뿐
대답하지 않는 자.”- 엷은 미소가 그의 입가에 서린다. 2015년 1월 7일(1926년생)
그는 아흔 번째 생일을 맞았다.

 김종필의 등장은 혜성 같았다. 54년 전 세상을 뒤집었다. 5·16에 대한 그의 자평은
 명쾌하다. “구질서를 붕괴시키고 신질서를 만들었다.” 그는 현대사의 연출가였다.
 국회의원 9선, 정당 총재 네 번, 두 차례 국무총리. 대통령은 못했지만 전무후무한
 경력이다.

그런 삶이 89년의 헛됨을 따진다. ‘정치 허업(虛業)’을 말한다. 그것은 절제인가 회한인가.
달관인가 미련인가. 반전(反轉)의 언어다. 지독한 역설이다. 하지만 절묘함의 여운은 길다.
그 허업은 단지 정치 무상이 아니다. 그 말 속엔 “국민을 위한 정치인의 희생”(JP 표현)이
 깔렸다.

1961년 5월 16일 새벽. 육군 소장 박정희가 이끈 군대는 나라를 장악했다. ‘
혁명 취지문’이 발표됐다. “은인자중하던 군부는 드디어 금조미명(今朝未明)을
기해서 일제히 행동을···.” 궐기문의 첫 구절이다. “반공을 국시(國是)의 제1”로 시작하는
6개 항 공약이 이어진다. 격문의 집필자는 JP다.

- 5·16의 설계·실천자이셨는데요.
“혁명의 많은 면에 내 생각이 들어 있지. 하지만 한계가 있어. 박정희 대통령이 부족한

 것을 메워서 이끌어 가고, 그리고 상부상조해서 끌고 간 거야.”
- 그때 어떤 심경이었나요.

 “목숨을 걸었지.” 그의 시는 결의를 압축한다. “장미의 오월/순백의 꽃빛깔 거짓 없듯/

애국의 충정을 뭉쳐/하늘에 걸던/피의 서약….”(5·16 9주년에 씀)

그는 거사의 의미를 회고한다. “4·19(60년)의 역사성을 철학화해서 근대화 전기를
마련해야 하는데 민주당 정권은 그렇지 못했어. 정쟁과 누습(陋習), 극도의 혼란에서
벗어나지 못했지. 우리의 궐기는 부패 무능한 기성 정치인들에게 나라와 민족의
운명을 더 이상 맡길 수없다는 거였어.”

 박정희·김종필의 군 동원 규모는 작았다. 전광석화는 행운을 낚는다.
무혈(無血)로 나라를 평정했다. “국민이건 군이건 대부분이 나라의 결정적
전환을 기다리고 있었던 덕분이지.” 5·16은 반민주·쿠데타로 교과서에 규정돼 있다. 

- 5·16 역사 논쟁은 그치지 않는데요.

“쿠데타면 어떻고 혁명이면 어떠냐 말이야. 5·16은 우리 정치·경제·사회 모든 분야에서
 본질적 변화를 이끌고 실적을 남겼어. 그게 바로 혁명이야.”

  - 그 장면은 하극상 아닙니까.
 “중령이 총리를 못 만날 이유가 뭐 있어. 나폴레옹은 대위에서 영관을 거치지 않고
장군이 되고 황제(35세)가 되지 않았는가.”

 나폴레옹의 ‘혁명과 사랑’-. 그것은 JP의 조숙한 감수성을 자극했다. “중학 시절에 세계

 위인전을 거의 다 읽었어. 돋보이는 인물이 나폴레옹이야. 그래서 아주 좋아했지,
 사랑도 흉내를 내려다가 잘 안 됐지만.” 하지만 JP식 아내 사랑은 잔잔한 감동이다.

 5·16은 세상의 언어를 바꿨다. “나는 겨레의 가슴에 새로운 도전과 분발의 불꽃을

 점화시키려고 했어.” 근대화, 민족중흥, 자조, 자주국방은 시대의 지배언어가 된다.
 주한미군은 5·16을 저지하려 했다. 


1963년 12월 4일 청와대에서 박정희 대통령이 김종필 공화당의장에게 임명장을 주고 있다. [중앙포토]

김종필의 삶은 풍운(風雲)이다. 영욕(榮辱)의 교차는 가파르다. “내가 태어날 때 천둥과

 벼락이 요란하게 쳤대.” 그의 호는 운정(雲庭, 구름 속 뜰)이다. 그는 서울대 사대에 다녔다.
“부농의 아들이어서 어려움을 몰랐어. 아버지가 작고하신 뒤 가세가 기울어 학업을 할 수
 없었어. 새 출발의 신고(辛苦)를 겪겠다고 결심했지.” 1948년 7월 그는 사병으로 자원입대한다. 
 
“야만적인 일제식 기합은 내가 바란 단련이 아니었어.” 일주일 만에 탈영.
 다시 하사관으로 군에 갔다. 거기서 육사(8기)에 입교, 49년 5월 졸업(소위)한다.
 우등생 JP는 육본 정보국으로 뽑혀 갔다. 박정희는 정보국의 작전정보실장이었다.

 “박 대통령은 소령 시절(49년, 32세) 좌익 빨갱이로 몰려 사형 구형까지 받았어.

그 후 감형과 동시에 군복을 벗고, 문관으로 정보국에 근무하셨지.” 박정희의 과묵과 치밀함-.
JP에게 매력으로 다가왔다. “사람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누구를 만나느냐 하는 거야.”

 박정희와 JP 팀은 6·25 남침을 정확히 예측한다. 군 수뇌부는 그것을 묵살한다.

 JP는 박정희의 조카딸(박영옥)과 결혼한다(51년 2월). 박정희의 형 박상희의 딸이다.
 처삼촌과 조카사위는 현대사의 장정(長征)에 동행한다. 그는 애틋한 부부애를 기억해왔다.
이렇게 물은 적이 있다. 사모님을 빼고 누가 가장 생각납니까.

 “박정희 대통령이야. 나는 18년간 박 대통령을 요지부동하게 뒷받침해 드렸어.” JP는

 ‘박정희의 진실’에 가장 다가섰던 인물이다. 많은 순간 그 진실을 합작하기도 했다.
 5·16 나흘 뒤 그는 중앙정보부(현 국가정보원)를 창설한다. 정보부장 JP는 국가 개조의
 기획·실천자였다. “혁명과업을 완수, 뒷받침하기 위한 거였어.” JP는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장도영(중장)을 체포한다.


“나 그만두고 싶다.”- 박정희의 유약한 면모는 낯설다. 유신 시절의 권력 집착에
비하면 뜻밖이다. JP의 회고는 긴박해진다..
2015년은 한·일 국교 정상화 50주년이다. JP는 그것을 “혁명의 연장선”이라고 정리한다.
“아무도 나서지 않았어. 욕먹기 싫다는 거지. 혁명할 때 목숨을 건 마음가짐으로 내가
 나섰지. ‘김종필-오히라’ 담판(1962년 11월)은 그 행적의 절정이다. 굴욕외교 논쟁도  커진다.

그 후 박정희는 “공화당 등에 올라탄다.”(JP 표현) 63년 10월 대통령에 처음 당선된다.

 JP는 그 직후 귀국한다. 64년 한·일 국교 반대 시위는 거셌다.(6·3 계엄령 선포)
그는 다시 후퇴한다.(2차 외유) JP는 월남 파병에 적극적이었다.
 
“우리 군사력의 해외 진주는 전례 없었어. 우리 역사에 드문 경험이지.”- 그는 공화당
당 의장으로 복귀한다(65년 12월).공화당 4인 체제는 JP를 견제한다.
 그 핵심은 거물 민간정치인 김성곤(쌍룡그룹 창업자)이다.

71년 대통령 선거는 박정희와 김대중의 격돌이다. 대선 후 박정희는 JP를
국무총리(45세)로 임명한다. 장수총리(71년 6월~75년 12월)였다.
격랑의 세월이었다. 71년 공화당 항명 파동(김성곤·길재호 퇴장)→
72년 7·4 남북 공동선언, 10월 유신→73년 윤필용 사건(군부 재편),
김대중 납치(이후락 퇴진)→74년 육영수 여사 피살(박종규 사퇴)이 이어진다.
권력 판도는 재구성됐다.

 JP는 유신 작업에 소외됐다. 박정희 친정(親政) 체제가 완성됐다.
긴급조치의 유신독재는 사나웠다. 부마사태 저항에 이어 10·26. 박정희 시대는 마감한다.
“김재규가 총을 꺼낸 건
 충성경쟁에서 차지철에게 패배했기 때문이야. 그렇게 영민하던 박 대통령이 돌아가시기
 1년 전부터 사고력이 떨어졌어. 지금 생각해도 불가사의야.” 박정희의 비극은 인사 실패에서 비롯된다.
 
용인술의 영민함은 흐릿해졌다. JP는 경호실장 차지철의 교만과 중정부장
 김재규의 광기를 증언한다. 비서실장 김계원은 무기력했다. 18년 박정희 시대의 인물은
 다양하다. 이들 3인은 지모와 지혜, 역량에서 가장 떨어졌다.

80년 민주화의 ‘서울의 봄’이 왔다. 그는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 봄이 왔지만 봄 같지

 않다)”을 말했다. 12·12는 신군부의 선제공세였다.
 신군부는 JP와 김영삼(YS)·김대중(DJ)을 기습했다.(5·17) JP는 ‘부패정치인’으로 퇴출됐다.
“전두환은 나의 꿈을 뺏어갔어.” 그의 얼굴에 분노가 인다.

김종필은 경제를 회상한다. 목소리에 힘이 솟는다. 그는 1차 외유 때(63년 7월) 서독에

 간다. 그는 탄광 막장에 내려간다. “현장에서 박 대통령에게 전화를 걸었지.
 광부를 파견해야 한다고 했지.” 영화 ‘국제시장’ 덕수의 삶에 JP의 경제투혼이 있다.
 5·16 무렵 1인당 국민소득은 85달러 수준. 경제발전은 눈부셨다. 산업화가 먼저 이뤄졌다.
그것은 민주화의 발판이다. 그의 자비명(自碑銘)에 적힌 ‘무항산(無恒産)·무항심(無恒心)’의 성취다.

88년 3김 시대가 열렸다. 3김은 일본 전국시대의 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비교됐다. JP는 기다림의 도쿠가와를 연상시켰다.
 그 무렵 그는 시심(詩心)의 정치를 말했다. 하지만 그의 젊은 시절은 달랐다.
 청년 JP는 격정의 오다(織田)를 좋아했다. JP는 “오다의 불꽃같은 과단성이 맘에 들었어.
 그게 풍운아야”라고 한다.

 - 정치 9단의 요체는 뭡니까.
 “그거 권모술수에 능하다는 거지.” 쾌활하게 받아넘긴다.
 90년 3당 합당이 있었다. 대통령 노태우와 YS·JP의 결속이다. 내각제는 JP 정치의 정체성이자
생존술이 됐다. 그는 92년 대선 때 김영삼을 밀었다. 그 다음엔 김대중을 지원했다.

그는 대통령 YS와 헤어졌다. 자민련을 만들었다. 96년 국회의원 총선에서 성공했다.

 김대중 정권 출범 때 그는 다시 국무총리를 맡았다. 그 후 DJ와 결별한다.
2004년 총선 때 다시 재기를 모색한다. ‘정계 은퇴’ 압력도 커졌다.
그는 “서산을 벌겋게 물들이겠다”고 응수했다. 다수 국민은 그것을 ‘노욕’이라며 외면했다.
시도는 실패했다.  43년의 정치 여정은 종료됐다.
그는 “이제 완전히 연소했고 재(災)가 됐다”고 했다.


‘桐千年老恒藏曲’(동천년노항장곡, 오동은 천년을 묵어도 항상 비곡을 간직한다)-.
그가 좋아하는 글귀다. 격동의 한국 현대사는 그를 우회할 수 없다.
JP를 거쳐야 권력의 내면, 정치의 진수를 만난다. 거인 JP는 역사의 비곡(秘曲)을
품고 있다. 어두움과 밝음이 교차한다. 서사시적 장엄함이 있고 서정의 풍취도 있다.

“5·16 혁명공약의 제1항 ‘반공을 국시(國是)의 제1의로 삼는다’는 조항은 당시 박정희

 소장에게 쏠린 좌익 의혹을 씻어내기 위한 것”이었다고 김종필 전 국무총리가 밝혔다.
 빨갱이라고 생각하는 주위 사람들 아니냐. 이것들을 불식하려면 한마디해야겠다.
 그래가지고 ‘반공을 국시의 제1의로 삼고’라는 내용을 6개 공약 가운데 첫 번째로
 집어넣었다”고 중앙일보에 증언했다.

혁명공약의 제2항은 미국과 유대 강화, 3항은 부패 일소, 4항은 민생고 해결, 5항은 국력

 배양, 6항은 과업 성취 후 군 복귀를 규정하고 있다. (관련 내용은 3월 3일자 게재)


김 전 총리는 “박정희 장군은 자기의 사상을 미국도 의심하고, 군 내부에서도
의심하는 데다 실제로 남로당에 연루된 혐의로 사형 구형까지 받았던 경력이 있어
좌익 콤플렉스를 아주 크게 느끼고 있었다”며 “이 때문에 박 소장이 혁명 후에도
‘나 그만두겠다’는 소리를 여러 번 했다”고 말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소령 시절
좌익 혐의로 체포돼 1949년 군사재판에서 사형을 구형받고(무기징역 선고)
감형과 함께 강제 예편됐다. 그 뒤 육군본부에서 문관으로 근무하다 6·25 발발
직후 현역으로 복귀했다.

 ‘현대사의 연출가’ 김종필(JP)이 입을 열었다. 5·16 이후 18년간 대한민국의 근대화를
 이뤄내고 1987년 민주화 이래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대통령의 이질적 권력들과 차례로
 손을 잡았던 김종필 전 총리가 중앙일보에 그가 겪었던 격랑의 현대사를 증언한다.
 중앙일보는 그의 육성 증언을 듣기 위해 지난해 10월 인터뷰를 시작했고 내일부터
 연재한다.

[김종필 증언록 '소이부답'] <1> ‘5·16 혁명공약’의 탄생
미국은 '박정희 사상'을 의심했고 미 8군 사령관은 대놓고 예편 요구
6·25 때 북한군과 맞서 싸운 박정희 그에 대한 좌익 혐의는 부당
"인생은 짧다, 시시하게 굴지 말자" 혁명의 물결 앞에 나는 섰다
둘째 임신한 아내와 비감의 이별  "아비가 헛일 안 했다고 가르치고 있다. 

 
1961년 8월 최고회의 회의 모습. 앞줄 왼쪽부터 김신 공군참모총장, 박정희 의장, 
박병권 국방장관(테이블 건너). 박정희 뒤는 김종필 정보부장(사복 차림),
박병권 뒤는 장성환 공군참모차장. [사진 김종필 전 총리 비서실]
밤이 깊어가던 1961년 5월 14일(일요일).이미 벗었던 군복을 다시 꺼내 들 정도로 나는 
그해 그 봄, 그렇듯 결연(決然)했다. 사생(死生)의 각오로 덤비지 않으면 안 될 
그런 절박함이 내 마음속 깊숙이 자리를 잡았던 것이다.

 당시의 내 나이는 서른다섯. 일제 강점기를 겪고 동족상잔의 참혹했던 6·25전쟁을
군인의 신분으로 치러낸 내 생각은 영글어 있었다. 그럼에도 마음은 한없이 무거웠다.
서른다섯의 생을 모두 접어야 할지도 몰랐기 때문이다. 나는 전날부터 꼬박 이틀 동안
무엇인가를 끄적거리고 있었다.


군사혁명위원회는 이어 ①반공을 국시의 제일의(第一義)로 삼는다 ②유엔헌장을 준수하고
 미국을 위시한 자유 우방과의 유대를 더욱 공고히 한다 ③모든 부패와 구악을 일소하고 
청신한 기풍을 진작시킨다 ④절망과 기아선상에서 허덕이는 민생고를 시급히 해결하고
국가 자주경제 재건에 총력을 경주한다 ⑤공산주의와 대결할 수 있는 실력 배양에
전력을 집중한다
 
⑥이와 같은 우리의 과업이 성취되면 참신하고도 양심적인 정치인들에게 언제든지 정권을
이양하고 우리들은 본연의 임무에 복귀할 준비를 갖춘다는 요지의 공약 6개 항을 발표했다.

 마지막 대목은 ‘대한민국 만세! 궐기군 만세! 군사혁명위원회 의장 육군중장 장도영’이다.
혁명공약과 11개 포고문은 군사혁명위원회 장도영 의장 명의로 발표됐다. 하지만 실제로는
 JP가 작성해 품 안에 품고 다니다가 상황에 맞춰 차례로 방송에 내보냈다.

 육군 소장 박정희는 장도영을 5·16의 간판으로 내세웠다. 장도영은 박정희보다 6살

 아래지만 육군 정보국장 시절 박정희 당시 문관(文官)을 현역으로 복직시킨 장본인이었다.
(50년 7월). 5·16 당시 장도영은 육군 참모총장이었다. 장도영은 5·16 당일 박정희에게
 출동 병력을 복귀시키라고 요구하다가 오히려 박정희에게 설득당해 그날 오후 의장직을
 수락했다. 이후 장도영은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과 내각 수반, 국방부 장관, 육군 참모총장,
계엄사령관을 겸임했다.

 JP는 중앙정보부장 시절인 61년 7월 반혁명 혐의로 장도영 최고회의 의장을 체포했다.

 박정희 최고회의 부의장에게 사전 보고하지 않고 저질렀다. JP는 “장도영을 그냥 두면
 혁명이 파괴될 우려가 있었다. 더 크기 전에 잘라야 했다”고 말한다.


인물 소사전 장도영(1923~2012년)=5·16 군정(軍政)의 최고 권력기관인 국가재건최고회의
초대 의장. 박정희는 스스로 부의장으로 내려앉고 장도영 육군참모총장을 간판으로
 내세웠다. 장 의장은 계엄사령관, 내각 수반을 포함해 5개 자리에 올랐다. 1961년 7월
 김종필 중앙정보부장에 의해 반혁명 혐의로 체포됐다. 63년 미국으로 건너가 93년까지
 위스콘신대 교수로 재직했다. 일본군 학도지원병으로 끌려갔다가 해방 뒤 귀국해 군사영어학교
(육사 개교 이전 장교 양성기관)를 졸업하고 국군 창군 멤버가 됐다.

<2>[김종필 증언록 '소이부답'] 

 박정희 문관, 소령으로 복귀 임시 육본은 이미 수원으로 후퇴
그가 안 나타나면 좌익의혹 증폭 한강 다리 코앞에 두고 큰 폭발음
사람 피와 살이 내 얼굴에 묻었다 "구미서 올라가는데 차편이 없네"
박정희가 전화 … 100% 확신 못해 육본 정문 앞서 그와 감격의 재회
마음속 '의심 덩어리' 눈 녹듯 풀려           



1952년 8월부터 53년 5월까지 당시 김종필 대위는 6사단 19연대 수색중대장으로 강원도 금성 구두고지
전투에 참여했다. 김 대위가 81㎜ 박격포 발사를 준비하는 장면. [사진 김종필 전 총리 비서실]

 전쟁이 터지자 박정희 문관의 좌익 문제가 내게 다시 다가왔다.
1949년 군 내부의 남로당 연루자들을 제거하기 위해 벌인 숙군(肅軍) 때였다.
박정희 소령은 사형의 위기에 처했다.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그는 군복을 벗고 정보국 문관(작전정보실장)으로 근무하면서 우리와 만났다

박정희 문관’의 34시간 행방은 정보국의 큰 관심이었다. 김종필 중위는 정보국 북한반장이었다.
박 실장은 49년 숙군(肅軍) 때 남로당 연루 혐의로 사형 구형을 받고 강제 예편됐다.

[<3>김종필 증언록 '소이부답'] 



박정희와의 첫 만남 육사 8기 졸업, 육본 정보국 배치
검은색 양복 입은 문관과 악수 기강·규율 한심했던 초기 한국군
해방공간 속 정치, 혼란에 빠져 대구사범 졸업, 만주군관학교 1등
엘리트 장교 박정희, 울분 토로해 "박 소령 사상 온건치 않아 보인다"
숙군 핏발 김창룡 감시망에 걸려           

 
1952년 4~8월 김종필 대위(왼쪽)는 진해에 있는 육군사관학교 본부 중대장으로 근무했다. 육사 교정에서
선글라스를 낀 김종필 대위가 동료들과 포즈를 취했다. [사진 김종필 전 총리 비서실]


박정희 사관학교 제1중대장은 비분에 차 있었다. 군대가 왜 이 지경이냐,
나라는 왜 이 모양이냐. 울분은 폭발 일보 직전이었다.

 그는 대구사범학교를 나왔다. 일제의 지배 시대, 박정희는 새로운 세계를 동경했다.
 그는 만주군관학교(新京, 지금의 長春)에 갔다. 1등으로 졸업하고, 일본육군사관학교를
 특별 입학, 졸업(57기)한 엘리트 장교였다. 해방된 조국으로 돌아와 1946년 조선경
비사관학교를 2기로 나와 소위로 임관했다. 미 군정은 1946년 1월 15일 남조선국방경비대
(조선경비대)를 창립했다. 국군의 전신이었다.


장교 자원이 부족했다. 일본군 지원병이나 하사관 출신이 대거 장교로 임관했다.
 사병 출신도 미 군정이 세운 군사영어학교에서 몇 주 교육을 받고 지휘관이 되는 식이었다.
그러니 조선경비대는 기강이나 규율 면에서 한심스러웠다. 군인정신을 찾기 힘든 장교들도 있었다.
사명감 투철한 엘리트 장교 출신의 박정희 소령이 개탄할 만했다.
 해방공간 속 정치는 혼란스러웠다.

48년 11월 강창선에 이어 박정희 소령이 체포됐다. 남로당에 가담해 반란을 기도했다는 혐의였다.

박정희 소령은 1949년 2월 군법회의에서 사형 구형과 무기징역 선고를 받았다.
 위기에 처한 박정희 소령을 구해준 건 육군 정보국장이던 백선엽 대령이었다.
 그는 군대 내 좌익 색출 작업의 총책임자였다. 백 대령이 “내가 책임지고 신원을
 보증하겠다”고 나섰다. 마침 김창룡은 사생활이 깨끗한 백선엽을 가장 존경하는 상사로
 여기고 있었다. 김창룡도 백 대령 뜻을 따라 박 소령에 대한 신원보증서에 서명을 했다.
 형집행이 정지됐지만 박 소령은 군복을 벗어야 했다. 민간인 신분이 된 그를 정보국
 문관으로 채용한 것도 백선엽 정보국장이었다. 박 소령을 위해 원래 직제에 없던 자리를
 만들어준 것이다. 위인설관(爲人設官)이었다.

 
백선엽 전방위 구명 설득 … 김창룡도 신원보증 해줘           
JP는 “자신이 박정희를 구명했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여럿이지만 실제론 백선엽 장군이
다 했다”고 말한다. 박정희 소령이 남로당 가담 혐의로 체포됐을 때 백선엽 육군 정보국장
(대령·사진)은 군 내 좌익 색출 작업의 총책임자였다.

 “그의 목소리는 조금 떨리고 있었다. 꼭 할 말만을 강하게 내뱉었지만, 그는 격한 감정에
휩싸인 모습이었다. 그 모습이 의연하기도 했지만 처연하기도 했다. 나도 모르게 내 입에서는
이런 말이 흘러나오고 말았다. ‘그럽시다, 그렇게 해보도록 하지요.’”

 백선엽 대령은 박정희 소령이 중형을 면할 만한 이유가 있었다고 봤다. 군부 내 남로당

 조직책이라고는 했지만 다른 군인을 포섭하는 활동을 하진 않았다. 또 붙잡힌 뒤 자신이
 아는 군대 내 남로당 조직을 수사팀에 알려줬다. 백 대령은 미군의 동의와 이응준 총참모장의
재가를 얻어 박정희의 형 집행정지 허락을 받아냈다. 백선엽 대령, 김안일 방첩과장,
 김창룡 대위(1연대 정보주임) 세 사람의 보증을 받고 박정희 소령은 2심에서 형 집행정지로 풀려났다.

 백선엽 장군은 박정희의 남로당 전력에 대해 이렇게 해석한다. “그때 좌익이라는 것은

 유행처럼 번지던 사조이기도 했다. 박정희 소령은 남로당의 포섭에 걸려든 경우이지만
 진정한 공산주의자라고는 판단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군 소령 시절인 1948년 11월 국군 내 좌익 소탕작업, 즉 숙군(肅軍)

 대상에 올라 사형을 구형받았다. 그를 체포한 사람은 뒤에 특무대장으로 유명해진 김창룡
 1연대 정보주임이고 숙군의 책임자는 백선엽 육군 정보국장이었다. 박 소령을 구한 건
 백선엽의 신원보증이었다.

박정희는 공산주의자인가. 김종필 전 총리는 “박 소령은 공산주의자가 아니었다.

 군 부패와 무능에 비분강개했다. 남로당 비밀당원인 이웃 중대장 강창선이 접근해 술자리를
마련했고 박 소령은 ‘군대가 왜 이 지경이냐’는 울분을 자주 토로했다. 김창룡이 강창선을
 감시하다 박 소령까지 잡아들여 남로당 조직책으로 몰았다”고 증언했다.
<4>[김종필 증언록 '소이부답']  

5·16 거사 결릐 박정희와 김종필 두 개의 흐름거대한 물줄기로 만나 '혁명 잉태'

하극상 사건 주동자로 감방 갇혀"군복 벗어라" 압박에 결국 굴복 결혼기념일

10주년 날 강제 예편엉엉 통곡하자 아내가 등 토닥여 박정희와 대구서 8개월 만에

재회"이제 저희들을 이끌어 주십시오"           

 

1961년 2월 19일. 박정희 소장과 혁명을 일으키기로 합의하고 실행에 옮긴 시점이다. 

나는 강제 예편돼 민간인 신분이었고 박 소장은 대구 2군 부사령관으로 있었다. 

육본 작전참모부장으로 있다 그리로 옮겼으니 좌천이었다.

 

우리는 그날 대구에서 만나 혁명을 결의했다. 그해 2월 4일부터 15일까지 나는

헌병대 감방에 있었다. 그 전해 그러니까 60년 9월 이래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이른바 ‘16인 하극상 사건의 배후조종자’로 지목돼 육사 동기생 석정선과 함께 구속됐다.

난로 없는 감방, 영하 10도의 한파를 모포 두 장으로 버텼다.

그런데 별 두세 개짜리 수뇌부들은 나를 그냥 군에서 쫓아내려 했다. 아마 ‘저 건방진 자식,

중령 놈이 뭘 안다고 날뛰는 거야, 이번 기회에 날려 버려야지’라는 생각을 했을 것이다. 

감방에 갇힌 뒤 열흘쯤 있는데 헌병감 조흥만 준장이 찾아왔다.

 ▶조흥만=“자네 자진해서 사표를 내 주어야겠어.”

 ▶나=“못 냅니다. 군법회의에 넘겨 주십시오. 법정에서 남길 말을 다 하고 나가겠습니다.”

 ▶조흥만=“이제 그만해라. 옷을 벗고 나가면 하극상 사건도 불문에 부쳐주겠네.”

 ▶나=“군법회의에서 이 썩은 장군들을 다 쫓아내 군을 아주 깨끗하게 만들어야 한다, 

그 뒤에 나도 군을 떠나겠다고 말해야겠습니다.”

 이 사건은 전국적인 이슈로 떠올랐기 때문에 군법회의는 정군의 필요성을 세상에 알리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다.

 그 이틀 뒤 다시 돌아온 조흥만은 예상치 못한 얘기를 꺼냈다. 그는 “정 그렇다면 자네 

처삼촌(박정희 소장)을 가만두지 않겠다. 자네들이 박 장군을 업고 혁명을 한다면서?

 CID(범죄수사대) 포함해 헌병대 인원 700명을 모두 투입해 박 소장을 빨갱이로 만들어 

결딴내겠다”고 협박했다. 빨갱이 얘기가 또 나온 것이다. “도대체 그게 누구의 뜻이냐?”고 묻자

그는 주저 없이 “참모총장님의 뜻”이라고 답했다.

 어안이 벙벙했다. 박 소장에게 씌웠던 좌익 혐의는 6·25전쟁을 통해 모두 벗겨졌다. 

문관에서 소령으로 복귀했고 미국 유학을 거쳐 소장까지 승진하지 않았나. 참모총장의 

협박은 나에게 군과 박정희 사이에 선택을 강요하는 셈이었다.



박 소장의 의중을 확인한 나는 한마디 덧붙였다. “이제부터는 앞장을 서서 저희들을 이끌어

주셔야 하겠습니다.” 내 말을 듣고 난 박 소장은 “그래, 알겠네. 한강 이북은 자네가 맡아라.

그 이남은 내가 맡겠다”고 대답했다. 그동안 박 소장과 나는 같은 생각을 가졌지만

각각의 방식으로 일을 도모해왔다. 이제 처음으로 두 개의 흐름이 거대한 하나의

물줄기로 합류하게 된 것이다. 군복을 벗은 뒤 박 소장에게 달려온 내 뜻은 이로써

한 단락을 맺었다. 


그리고 앞으로는 전혀 새로운 시작이었다. 군에서 쫓겨날 땐 엉엉 울었지만

그때 안 나왔다면 거사를 하지 못했을지 모른다. 강제 예편됨으로써 나는 시간의

여유가 생겼고 누구와도 만날 자유를 얻었다. 이 여유와 자유가 혁명을 설계하고

조직하고 일으키게 한 자원이었다.

 

군에서 나올 때 내가 받은 퇴직금은 90만환. 지금으로 치면 한 1000만원쯤 될까.

이 돈도 모두 거사를 준비하는 데 썼다. 아내의 곗돈도 타서 보탰다.

 꿈은 원래 마음속에서 오래 품고 있는 것이다. 그런 꿈이 말로 옮겨지면

다음 차례는 실행이다. 박정희와 김종필의 가슴에 품은 뜻은 2월19일을

기점으로 맹렬한 실천으로 전진했다.

이 책은 박정희 소장이 김종필·김형욱 등 육사 8기생 장교 9명과 60년 11월 9일 혁명 

계획을 확인했다고 기술하고 있다.

이때부터 박정희 소장을 지도자로 하는 혁명 준비가 본격화됐다는 설명이다.

 하지만 JP에 따르면 이는 지어낸 이야기다. ‘11월 9일 박정희 소장 집 회동’ 자체가

 없었다고 한다. JP는 이렇게 말한다.

“그건 엉터리야. 61년 2월 19일 이전엔 박정희 소장하고 아무런 연락을 하지 않았어.

여차하면 ‘박 소장을 그냥 두지 않겠다’고 하니까, 일절 연결을 안 하고 있었지.

동지들한테 박 소장을 소개시킨 건 나중이야.”

 한국군사혁명사는 JP가 1차 외유(63년 2~10월)를 떠났던 시기에 작성됐다. 

공화당 대통령 후보인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이 5·16을 주도했음을 강조하기 위해

사실이 아닌 내용을 넣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헌병감 협박에 군복 벗은 JP … 석달 뒤 5·16            


1961년 ‘5·16 군사혁명’은 김종필(JP) 전 총리가 군에서 강제 예편돼 민간인 신분일 때

 일으켰다. JP는 “60년 4·19 이후 정군(整軍)운동에 앞장섰는데 이른바 ‘16인 하극상 사건’
주동 혐의로 군을 떠나라는 압력을 받았다. 나는 거부했다. 그랬더니 조흥만 헌병감이
 ‘끝까지 버티면 헌병대 700명을 모두 투입해 당신 처삼촌(박정희 소장)을 빨갱이로 몰아
 결딴내겠다’고 협박했다. 결국 나는 협박에 굴복해 61년 2월 15일 군복을 벗었고
 나흘 뒤 19일 박정희 소장을 만나 혁명을 결의했다”고 증언했다.
사진은 67년 4월 박정희 공화당 대통령 후보 서울 유세 장면.

[<5>김종필 증언록 '소이부답']  

5·16 거사의 씨앗 박정희도 송요찬에게 공개편지
'3·15 부정선거 책임지고 용퇴' 송 총장 "정기있는 장교 있어 다행"
사퇴 받아들여 … 기득권 세력 반발 중령 군복 입고 장면 총리 찾아가
송원영 비서관 "여기가 어디라고" '세상 뒤집는 혁명으로 전진' 결심
도서실서 책 빌려 이집트 혁명 연구           

 
 4·19혁명 10주년, 나는 학생들의 의거를 생각하며 시를 썼다. 1970년 그때 나는
공화당 의장을 비롯한 모든 공직에서 물러나 있었다.
 “역류에 숨 막히고/분노가 꽃 피던 날/해일같이 넘쳐 온 함성들이
/선지빛 산화(散華)로 흩날려/조국의 사월 청정한 넋돌되어 솟아난다….”
 1960년 4·19 때 나는 서른네 살 육군 중령이었다. 나 역시 4·19 정신에 공감하고 있었다.
 4·19의 반독재, 반부패 외침은 장면 정부의 무능한 리더십 때문에 꽃을 피우지 못했다.
 그러나 젊음의 희생은 우리나라를 결정적으로 바꿔낸 전환적 에너지였다. 군대 내부도
그런 물결이 꿈틀거렸다.


다음은 박정희 소장의 편지 요지. “군의 최고 명령권자인 각하께서 부정선거에 대한 전 책임을
지시어 정화(淨化)의 태풍이 군내에 파급되기 전에 자진 용퇴하신다면 얼마나 떳떳한
것이겠습니까”라고 적었다. 박 소장은 우리와 일절 상의하지 않고 이런 편지를 보냈다.
송 총장의 반응은 격렬했다.
“내가 박정희를 얼마만큼 보호해줬는데. 배은망덕도 분수가 있지.
네가 나를 잡아먹어?”라고 반응했다.

 하지만 내 생각엔 송 총장은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없다. 송 총장은 이미 나한테 약점이
 잡혀 있었다. 3·15 부정선거 직후 그는 “군은 이번 선거에서 맡은 바 110%의 성과를
 냈다”고 열변을 토했다. 나는 그때 회의의 주무과장으로 앉아 있었기에 그 장면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110%라면 60만 군인의 최소한 10%를 엉터리로 투표하게 했다는 것
 아닌가.


정군파 8명 중 나와 석정선 등 5명이 방첩대에 구속됐다. 혐의는 국가반란음모죄. 
범죄 혐의는 사형까지 가능한 어마어마한 것이지만 나는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민심과 군심이 우리 쪽이었기 때문이었다. 송 총장은 지하감옥에 갇혀 있던 나를 불렀다.

1959년 서울 영등포 육군 6관구사령관 사무실에서 박정희 소장이 미군 관계자와 환담하고 있다.
이듬해 1월 박 소장은 군수기지사령관에 임명돼 부산으로 내려간다.

 ▶송 총장=“나를 왜 물러나라고 하는 건가?”

 ▶나=“3·15 부정선거를 청산하고 나라가 큰 전환을 이루려고 하는데 총장님께서 하나도

 가책을 받지 않는다는 얘기입니까. 책임지고 물러나십시오. 우리도 군법회의에서
 공개재판을 받겠습니다.”

 ▶송 총장=“난들 격동하는 상황에서 생각이 왜 없겠나. 우리 군대에도 귀관과 같은

 정기(精氣)를 간직한 중견 장교들이 있다니 다행한 일이다. 내게 이틀만 생각할 시간을
주게.”

 ▶나=“안 됩니다. 오늘 저녁에 결심해주십시오. 시간이 지나면 결심이 물러집니다”라며

 몰아붙였다.

 송 총장은 나를 설득하러 불렀다가 오히려 압박을 당한 셈이다. 지금 생각하면 그런

 당돌함이 어디서 나왔는지 모르겠다. 세상을 바꾸는 데 이런 당돌함은 반드시 필요한
 요소일 것이다. 하지만 지금 다시 그런 일을 하라고 한다면 과연 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중령이 육군 총수를 향해 하루의 유예도 주지 않고 군을 떠나라고 압박했으니 말이다.


 나의 방식과 발상은 하극상으로 단죄될 수 있었다. 송 총장은 결국 참모총장직을
관두겠다고 답했다. 연병장에서 나를 기다리던 육사 동기생 30여 명은 “만세” “만세”를 외쳤다.
 그때가 5월 19일 저녁이었고 송 총장은 이튿날 사표를 제출했다. 박정희 소장이 불을
 붙인 지 17일 만에 내가 ‘송요찬 퇴진’을 마무리한 것이다. 정군운동의 기세를 보여준
 사건 이었다.

이 기사가 나가자 그동안 5·16 상황에 대해 일절 입을 열지 않았던 조흥만 전 헌병감(90)이
인터뷰에 응했다. 야당 국회의원(7대)을 지냈던 조 전 헌병감은 “JP의 강제 예편은 당시
 장면 국무총리의 지시에 따른 것”이라고 증언했다. 5·16 역사에서 한 번도 나오지 않은
 얘기다. JP도 자신의 군복을 벗긴 장본인이 조 헌병감인 줄로 알고 있다.


<6>김종필 증언록 '소이부답']  포섭과 옹립
나무 팔아 착복, 지도 못 읽는 장군 군 부패·무능에 젊은 장교들 분노
6군단 소속 동기생들 3명 만나 "혁명" 입 떼자 "대찬성" 흔쾌히 동의
거사 38일 전 박정희, 29명 첫 대면 "죽음 같이하자" 굳은 악수하며 약속
바로 그 자리서 혁명지도부 구성 작전반·행정반 통합조정 내가 맡아 



 박 소장은 극히 짧게 인사 겸 연설을 했다. 키워드는 구국(救國)과 살신(殺身), 기회였다.
“구국의 순간이 왔다. 지금이 나라를 구할 절호의 기회다. 같이 살고, 같이 죽자. 기회는
  여러 번 오는 게 아니다.” 간결함이 박정희다웠다. 사실 길게 말할 이유가 없었다.


 모두 이심전심, 같은 뜻을 품고 죽기를 각오한 사람들 아닌가. 행운의 여신은 한번의
 기회만을 준다. 기회가 오면 전광석화(電光石火)처럼 낚아채야 한다. 그 무렵 군심과
민심은 같았다. 사회안정과 변혁을 바라고 있었다. 군의 정치개입은
역사의 필연이 되고 있었다.

박 소장은 연설 뒤 참석자들과 일일이 악수를 나눴다. 죽음을 같이하기로 약속한 핵심 동지

 29명은 육사 2기생인 박정희 소장, 5기생 4명, 나와 동기생인 8기 16명 8특(특별기수)
 2명, 9기 4명 등이었고 포병 간부후보생 출신인 차지철 대위가 제일 낮은 계급으로
 참여했다.

<7>[김종필 증언록 '소이부답'] 

혁명의 확신
정군운동으로 군복 벗은 석정선 "백운학한테 좀 같이 가자" 졸라
백씨, 첫 만남에서 "때가 됐습니다" 난 "누굴 죽이려고" 딱 잡아뗐다
좌파 준동 … 정부 무능은 극에 달해국민 마음속 불안한 그림자 짙어져
백씨, 내게만 속삭이며 말한 '천기' "박 의장, 20년 뒤 돌아가실 것 같아"           


1964년 1월 2일 한복을 입은 김종필 공화당 당의장(오른쪽)이 윤보선 민정당  대표
(왼쪽)의 서울 안국동 자택을 방문해 새해 인사를 건네고 있다. 이날 김종필
 당 의장은 윤보선
 대표에게 승용차를 기증했다. 전직 대통령이자 제1야당의 당수인
 윤 대표에 대한 예우 차원이었다. 그러나 다음 날 윤 대표는 승용차를 돌려보냈다.
당시 선물한 차는 52년식 링컨으로, 윤보선씨가 대통령 재직 당시 쓰던 관용차를
손질한 것이었다. [사진 김종필 전 총리 비서실]


시운(時運)은 대사(大事)를 이루게 한다. 천운이라고도 한다. 5·16 거사가 그랬다.  

변혁을 요구하는 분위기가 확산됐다. 민심은 새 질서를 요구했다.

이를 드러내주는 절묘한 장면이 있었다.

백운학이 내게 천기를 누설한 건 그때 한 번만이 아니었다. 5·16 거사를 일으킨 지

얼마 안 된 61년 7월이었다. 중앙정보부장이던 나는 백운학을 저녁자리에 불렀다.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도 그 자리에 있었다. 혁명 성공을 일찌감치 내다본 

인물이니 박정희 의장도 한번쯤 만나볼 만하다고 여겼다.  

서울시청 뒤편 다옥동(현 중구 다동)의 요릿집이었다. 시중 들던 종업원 두 명을

잠시 물리고 백운학이 박 의장에게 말했다. “각하, 한 20년은 가겠습니다.

소신껏 하십시오.” 그 얘기를 들은 박정희 의장은 빙그레 미소만 지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내가 “그 다음엔 어떻느냐”고 물었다.

백운학은 그 질문엔 입을 다물었다.

 자리가 파한 뒤 나가는 길에 백운학이 내 귀에 대고 속삭이듯 이야기했다.

 “이상한 괘인데요. 그 무렵에 돌아가실 것 같아요.”
 나는 그 얘기를 박 의장에게 전하지 않았다. 예사롭지 않은 소리라고 그때도 

생각했다. 18년 뒤 10·26 그날이 닥치고 나서는 더 놀랐다. 불길한 예언은 들어맞았다.

비리법권천(非理法權天)이란 말이 있다. 이치(理致)가 아닌 것이 이치를 이길 수 없고, 

옳은 이치라도 법에 우선할 수 없으며, 법도 권세를 능가하지 못하고,

그 권세라 할지라도 필경에는 하늘, 즉 민의를 거역할 수 없다는 뜻이다.

세상을 움직이는 숱한 힘과 원칙들이 종국엔 국민의 마음에 합치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할 때 JP가 자주 쓰는 말이다.

전영기·한애란 기자 chun.younggi@joongang.co.kr

인물 소사전 백운학(1921~79)=1950~70년대 유명 역술인. 호는 청산(靑山),

본명은 이종우다. 20대 후반부터 서울 종로에서 활동했다.

관상을 잘 본다고 이름이 알려져 정·재계 고위 인사들도 그를 찾았다.

그를 따라 백운학이라 이름 붙인 관상·작명가가 여럿 나왔다. 

원조 백운학은 따로 있다. 구한말 고종이 왕위에 오를 것을 예언했다는 

박유붕(1806~66)이다.
<8>[김종필 증언록 '소이부답'] 

"혁명은 의지다, 숫자가 아니다" 60만 대군 중 3600명 거병 …

박정희 "중심부 서울만 장악하면 나머지는 다 따라온다"

 
1962년 4월 경기도 포천 6군단사령부를 방문한 김종필 중앙정보부장(왼쪽에서 둘째).
6군단포병단은 5·16 당시 가장 먼저 육군본부를 접수했다. 맨 왼쪽은 황종갑 최고회의
 총무처장(준장), 김종필 부장오른쪽은 김진위 수도방위사령관(소장), 그 옆은 김계원
 6군단장(중장). 김계원 장군은 이후 5대 중정부장과 대만대사를 거쳐 박정희 대통령의
 마지막 비서실장이 된다. [사진 김종필 전 총리 비서실]


그때 한국군이 60만 명, 미군이 5만6000명인데 3600명의 병력으로 세상을 뒤집었으니

 누구는 기적이 아니냐고 묻기도 한다. 그럴지도 모른다.혁명은 의지다, 숫자가 아니다"

60만 대군 중 3600명 거병 … 박정희 "중심부 서울만 장악하면 나머지는 다 따라온다.


칭기즈칸이 10만의 군사로 몽골에서 동유럽에 이르는 사상 최대의 지역을 평정한 

비결도 이것이었다. 주변부를 버리고 중심부만 장악하는 방식이다.

칭기즈칸은 광대한 지역의 주요 도시, 요충지에 소수 병력만 남겨 놓고 앞으로 전진했다.

이순신 장군이 사즉생 생즉사(死卽生 生卽死)의 결의로 부하들을 독려했습니다. 

죽기를 각오하는 의지가 우리를 살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거사 기밀이 누설됐다는 소식들이 들려왔다. 그러나 나는 위기감을 느끼지 않았다. 

두렵거나 당황하지 않았다. 군과 정부의 무관심과 나태함이 어느 정도인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거사가 성공하리라는 자신감이 은근히 생겼다. 기묘한 상념이 일었다.


 1950년 6·25 남침 때다. 정보국의 박정희 작전정보실장(무관)과 북한반장(중위)인

나는 49년 12월에 전쟁 발발 시점과 징후를 정확하게 분석해냈다.

군 수뇌부에 보고하고 대비할 것을 건의했다. 하지만 군과 정부의 어느 누구도 우리의

보고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대책 없는 안일함, 근거 없는 자신감이 그들을 지배했다.

그때 군 수뇌부는 알면서도 남침을 당했다.

그 11년 뒤 군 지휘부는 군사혁명을 눈치챘으면서도 당할 운명에 처해 있다.
소이부답 [9] 혁명 전야

박정희 "과업 성취되면 군 복귀" … 버마식 군부통치 구상한 듯 … 박 장군
 "참모총장 모셔 군 장악" … JP "장도영은 안 돼"
김종필(JP)은 5·16을 기획하고 설계했다. 하지만 JP가 그린 거사 밑그림은 지도자인
박정희 소장의 수정을 거쳤다. JP는 "내가 부족하고 모자란 부분을 박정희 대통령이
 메워줘서 거사의 큰 그림을 완성할 수 있었다"고 말한다.

1961년 5월 15일, 구름이 잔뜩 낀 날이었다. 그날 아침 나는 군복을 꺼내 입었다.

 석 달 전 강제예편으로 옷장에 넣어뒀던 군복이다. 허리엔 권총을 찼다.

 신당동 언덕배기에 있는 박정희 소장 집으로 향했다. 마지막 정리 작업이 남아

 있었다. 나는 품에서 혁명공약문 초안을 꺼내 박 소장에게 보여드렸다. 이틀 동안
 가다듬은 5개 항 공약이었다. 그는 찬찬히 읽어보더니 "좋구만"이라고 했다.
 글자 한 자 바꾸지 않았다.

 박 소장이 불쑥 말했다. 마지막 항목을 추가하자고 했다.

 그 요지는 "우리의 과업이 성취되면 참신하고도 양심적인 정치인들에게 언제든지
 정권을 이양하고 우리들 본연의 임무에 복귀할 준비를 갖춘다"는 것이었다.

 혁명군의 원대복귀-. 거사를 준비하면서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었다.

 다른 것도 아니고 기성질서를 붕괴시키는 일이다. 세상을 뒤집는 일을 한 이상 군으로
돌아가진 못할 거라고 판단했다. 복귀하면 다시 혼란이 일어날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목숨 걸고 나서는 이유가 사라진다. 우리는 계속 앞으로 나아가는
수밖에 없다. 박 소장의 주장이 내키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의지는 강했다. 순수한 발상이었다. ‘내가 무슨 정권이 탐나서 이런 일을

 벌이는 게 아니다. 과업이 일단락되면 민간에 정권을 넘기고 군으로 돌아가겠다’는
 결의의 표현이었다.
 그의 구상은 외국의 선례도 염두에 둔 듯했다. 내가 짐작하기에 박 소장은
 버마(현재 미얀마)식 군부통치를 생각하고 있었다. 버마의 네 윈 장군은 58년 쿠데타로
집권했지만  60년 2월 총선거를 실시했다. 군부세력은 출마하지 않았고,
 네 윈은 민정 이양 뒤 군에 복귀했다(그 후 62년 3월 2차 쿠데타).


 그 뜻을 알기에 굳이 만류하진 않았다. "의견이 정 그러시다면 하나 넣읍시다"고
 동의했다. 나는 속으로 이런 생각을 품었다. ‘동의는 했지만 이 조항은 결국엔 없어질 것이다’.
 혁명세력의 원대복귀를 약속한 제6항은 운명의 D-1일 그렇게 들어갔다. 나중 일이지만
 이 조항은 두고두고 박정희 장군의 정치행보에 걸림돌이 된다.

 혁명취지문과 공약, 포고문은 ‘군사혁명위원회 의장 장도영 육군참모총장’ 이름으로

 발표키로 했다. 장도영 총장(중장)을 앞장세우자는 것 역시 박정희 소장의 복안이었다.
박 소장은 이렇게 말했다. "내 신분으로는 혁명군을 대표할 수 없다.


나는 2선으로 물러서고 장 총장을 1선에 모시자." 나는 반대했다. "장 총장은 저도 잘
 알지만, 모시고 할 만한 대상이 못 됩니다."
내 머릿속엔 장 총장의 미덥지 못한 행각이 떠올랐다. 한 달여 전 4월 10일이었다.
 박 소장이 군사혁명 계획서를 집으로 갖고 오라고 했다. 포섭한 동지의 역할과
 출동부대 편성, D데이까지 진행 과정 등이 담긴 대여섯 장의 극비서류였다.


 ‘혁명’이란 단어는 쓰지않았지만 거사 전모를 파악하기엔 충분했다.
 박 소장은 "장도영 총장에게 가서 이걸 보여주고 선두에 서 달라고 설득해야겠다"고
 했다. 나는 펄쩍 뛰었다. "아니, 그걸 보이면 어떻게 합니까. 우리를 잡아가라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큰일 납니다."

"아니야, 괜찮아. 장 장군은 임자보다 내가 더 잘 알아. 내 입장에선 장도영을 끌어오는

 수밖에 없어. 그러니 나한테 맡기고, 그 계획서를 주게."

 박 소장은 고집을 꺾지 않았다. 그는 장 총장보다 나이가 6살 위다. 하지만 군문에

 장 총장(군사영어학교)이 먼저 들어왔다. 박 소장(육사 2기)은 상관인 장 총장의
신세를 여러 번 졌다. 1950년 육본 정보국 문관(文官)으로 근무하던 그를
현역(소령)으로 최종 복직시킨 인물이 장도영이었다. 장도영은 9사단장 시절
박정희 중령을 참모장으로 발탁하기도 했다.
박 소장은 장 총장과 오랫동안 쌓아온 신의를 굳게 믿고 있었다.

1961년 5월 18일 서울시청 앞에서 5·16 지지 가두시위를 한 육사 생도들에게 경례하는
 장도영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왼쪽)과 박정희 부의장(오른쪽). 박정희의 검은색
선글라스는 5·16의 이미지로 굳어졌으며, 때로는 쿠데타의 상징으로 희화화되기도 했다.
 JP는 "박 장군이 5·16 때 선글라스를 쓴 것은 얼굴 일부를 가려서 자신의 정체를
노출시키지 않기 위해서였다. 위엄을 더하는 효과도 있었다"고 회상했다. [중앙포토]


나도 6·25가 발발했을 때 육본 정보국에서 장도영 국장을 상관으로 모셨다.
 군 지휘관으로서의 능력과 판단력은 인정할 만했다. 그러나 이 일은 우리 동지들의
 생명이 달린 거사다.
 장 총장은 어느 편에 설지 확실치 않은 인물이었다. 자칫 위험할 수 있었다.

 나는 품속의 계획서를 꺼내 박 소장에게 건네면서 신신당부했다. "드리긴 하겠는데,
사흘 안에 돌려받아야 합니다. 우리를 반란으로 몰아 몰살시킬 수 있는 계획서입니다.
그쪽에 내줬다가는 후환이 생길지 모릅니다." 박 소장은 "그래, 사흘만 보게 하고
 꼭 돌려받겠다"고 약속했다. 박 소장은 그날 장 총장에게 찾아가 계획서를 전달했다.

 그 뒤로 계획서는 내 손에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장 총장은 거사 순간까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런 나의 걱정에도 박 소장은 뜻을 꺾지 않았다.
 "나를 간판으로 하면 여러 가지 부작용이 생길지 모른다"고 했다. 이 말은 두 가지
 의미였다. 육군 최고 지휘관인 참모총장을 내세워야 군 내부를 장악할 수 있다는
 전략적 판단이 담겼다. 박 소장은 과거 좌익 연루 전력이 있다. 이 때문에 군 지휘부와
주한 미군에서 사상을 의심받고 있었다.
 
 그가 정점에 서면 좌익 꼬리표를 빌미로 집중 공격 당할 우려가 있었다. 나 역시 이를
의식하고 있었다. 그래서 ‘반공을 국시(國是)의 제 1의(義)로 삼는다’는 문구를 공약
 첫머리로 내세웠다.
  소장은 그것만으로 충분치 못하다고 여긴 듯했다. 나는 결국 장도영 1선 주장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우리의 궐기를 세상에 알릴 발표문의 모든 문구가 5월 15일 오후 늦게 완성됐다.

 이낙선 소령(육본)이 고쳐진 초안을 정서(精書)했다. 나는 원고를 잘 접어서 호주머니
속에 넣었다. 이제 준비는 끝났다. 결의가 굳어졌고 내 마음속 긴장감도 고조됐다.
 출동의 시간이 오길 기다렸다.

 박정희 소장은 신당동 집 마루에 의자를 내놓고 앉았다. 군복을 차려입고 권총을

 찬 채 군화를 신었다. 언제든지 궐기를 위해 나갈 채비가 돼 있었다.
지금도  그 모습이 눈에 선하다. 우린 모두 경건한 마음으로 그 순간을 맞이했다.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의 자세였다. 시간은 흘렀다.
밤 11시30분, 박정희 소장의 집을 나섰다. 나는 박 소장이 탄 지프차 뒤에
한웅진 준장(육군 정보학교장)과 함께 올랐다. 집 앞엔 정체불명의 검은색 지프차
두 대가 지켜보고 있었다. 헌병대였다. 거사 정보가 누설된 것이다. 행동은 시작됐다.
이제 누구도 우리의 전진을 막을 수 없었다. 혁명 전야는 이런 장면이었다.

JP "비밀누설, 불길한 출발" … 박정희 "가자, 나를 따르라" …

새벽 4시 한강 건넌 박 소장 "장도영이 나를 쐈어

5월 20일 청와대 본관에서 윤보선 대통령을 면담하고 나오는 박정희 소장(오른쪽 둘째)과
장도영 육군 참모총장(중장·왼쪽). 박 소장이 윤 대통령을 만나러 들어갈 때
벗어놨던 권총을 박종규 경호대장(오른쪽)이 들고 있다. 장 총장 오른쪽은 참모총장
 비서실장인 안용학 대령이다. [중앙포토]


 역사상 가장 긴 하루 10 
그날은 JP 인생에서 가장 긴 하루였다. 1961년 5월 16일의 거병은 비밀누설 속에  시작됐다.
출발은 불길했다. 그렇다고 되돌릴 수는 없다. 화살은 활시위를 떠났다.
 긴장과 불안, 긴박감과 안도감이 팽팽하게 충돌하면서 시간은 흘러갔다. 그 하루는
 역사를 새로 쓰는 날이었다.
5월 15일 밤 11시30분. 우리는 신당동의 박정희 소장 집을 떠났다.
 박 소장의 지프 뒤칸엔 한웅진(육군정보학교장) 준장과 내가 동승했다.
 장경순(육본 교육처장) 준장의 차가 따라왔다. 목적지는 영등포구 문래동의 6관구
 사령부. 혁명 제1지휘소다. 6관구는 수도권 일대를 관할한다. 그 때문에 서울을
 장악하려는 혁명 부대를 지휘하기 적격이다. 박 소장이 6관구에 도착해 작전 명령을


 내림으로써 5·16 궐기는 시작될 것이었다.
길을 나서는 우리의 마음은 무겁기만 했다. 거사 비밀이 누설됐기 때문이다.


 집을 감시하던 방첩대(CIC) 요원들이 차량 두 대로 우리를 미행했다.
 박 소장에게 급보가 들어온 건 오후 8시쯤부터였다. "거사 기밀이 샜다"
"무장 헌병들이 6관구 사령부를 차단하고 있다. 궐기군 장교들을 포위하려 한다"는
등의 내용이다. 6관구의 김재춘 대령과 6관구 부근에 나가 있는 동지들의 전화는 긴박감과
 걱정으로 차 있었다. 박 소장은 옆에 있던 우리에게
 "오늘 저녁 일이 탄로 났다는구먼"라고 했다. 다소 놀란 그의 표정은 금방 단호함으로 바뀌었다.

 누설의 진원지는 30예비사단이었다. 거사 참여자 사이에 알력이 생겨 이상국 사단장에게
밀고가 들어갔다. 거병 책임자인 이백일(중령) 작전참모는 인근 야산으로
 도피했다. 이상국은 이철희(준장) 방첩대장, 장도영(중장) 참모총장에게
 "반란이 일어났다"고 보고했다. 장도영은 육본 헌병대에 "6관구의 반란군을 체포하라"고 명령했다.
그런 상황 파악 때문에 출발은 지연되고 있었다.


 나는 초조했다. 움직여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나의 주요 임무는 혁명공약문의 인쇄와 라디오방송이었다. 내가 입을 열었다.
"더 이상 미룰 수 없습니다. 밀어붙이셔야 합니다."
 우리는 신당동 집을 떠났다. 자정 직전 종로 화신백화점 앞에서 나는 내렸다.
 박 소장에게 "내일 새벽에 뵙겠습니다"라고 인사하고 헤어졌다. 안국동에 있는


 광명인쇄소로 달려갔다. 이학수 사장은 인쇄소의 문을 걸어 잠근 채
5·16 거사 뒤 서울 중앙청(1995년 철거)을 지키고 있는 30예비사단 병력. 
 
박 소장은 대청마루 의자에서 전투화를 신은 채 앉아 있었다. 그는 담배를 문 채
30여 분 묵묵히 있다가 일어났다. "가자, 나를 따르라. 가다 죽더라도 올바른
역사가 있다면 평가해줄 것이다"고 했다. 선언 조의 그 말은 우리의 결연함을 더했다.
일부에선 박 소장이 이때 취기가 있었다고 기억한다. 하지만 그날 우리는
술을 마시지 않았다. 성스러운 행동을 하는 마음가짐이었다.

대기하고 있었다. 나는 직원들에게 이렇게 부탁했다
. "만약 일이 잘못돼 붙들려 갈 경우 당신들은 내가 총으로 위협해 강제로 일을
시켰다고 진술하시라. 대신 아침 6시까지만 묵비권을 행사해 달라."

 인쇄기가 돌아가는 ‘쩔그럭 ’ 소리가 왜 그렇게 큰지 가슴을 졸였다. 나는 2층으로

 올라가 창문을 통해 바깥을 감시했다. 새벽 2시쯤이었다. 경찰관 두 명이 순찰을
 돌다가 인쇄소 문 앞에 섰다. ‘수상한데 들어가 볼까’하는 눈치였다.
 나는 속으로 ‘이 안으로 들어오면 감금을 하든지 총을 쏠 수밖에 없다.
 제발 들어오지 마라’고 간절히 빌었다. 둘은 공장 문에 한동안 귀를 대고 듣더니
 "야간작업이겠지"라며 그냥 지나갔다. 그들이 고마웠다.

 새벽 3시쯤. 원남동의 창경원 앞길에 40여 대 트럭이 쾅쾅거리며 지나갔다.

 헤드라이트의 행렬이 어둠을 대낮처럼 밝혔다. 포천에서 출발한 6군단 포병단이
 예정대로 진입한 것이다. 삼각지 육군본부를 진주하기 위해 내려온 혁명군이다.
인쇄소 2층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면서 나도 모르게 "휴~ 이제 됐다"고 했다.


 걱정과 긴장감이 잠시 풀렸다.

 6군단 포병단은 방첩대의 감시망에 잡히지 않았다. 문재준 포병단장과 홍종철 6군단 작전참모,
신윤창·구자춘 대대장이 1300명 장병을 이끌었다. 포병단은 트럭에 대포를
 달았다. 그 부대 출동에는 미군의 의정부 검문소 통과가 가장 큰 문제였다.


 사전 작전회의 때 나는 신윤창 중령에게 "절대 미군을 쏴선 안 된다"고 강조했다.
 검문소 미군은 7~8명 정도. 그들이 통과를 거부하면 그냥 몸으로 껴안아 서울까지
 데려오라고 얘기했다. 신 중령은 "미군이 발포를 하면 어떻게 하나"고 물었다.




 나는 "그래도 응사하지 말라. 우리 쪽 희생자가 나더라도 맨손으로 대응하라"고 했다

 그 얘기를 들은 박 소장은 "잘했다. 우리의 혁명은 무혈이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때 검문소 미군과의 다툼이 없었다. 신 중령에 따르면 미군 위병은 "헤이 헤이,
훈련 잘하라"고 웃으며 교통정리까지 해주었다. 미군은 포사격 훈련을 가는 줄 알고 의심
 없이 통과시킨 것이다. 일이 되려면 그렇게 되는 것이다.
 
5월 16일 새벽 3시 군서 무혈 쿠데타’ 소식을 머리기사로 전한 같은 날짜 경향신문 1면.
 
 나는 전화통을 계속 돌려댔다. 6관구 사령부는 연락두절이었다. 박 소장이 짜놓은
 실병력의 주력은 해병 1여단과 공수단(김포)이다. 이들이 한강 인도교를 돌파해 서울
시내로 진입해야 했다. 하지만 기밀 누설로 중대한 차질이 생겼다. 장도영 총장은
 진압의 자세를 취했다. 박 소장은 상황을 역전시키려 했다. 신속하게 현장으로
 달려갔다.


 영등포의 6관구 사령부를 나와 김포 쪽으로 갔다. 새벽 1시쯤 김포의 해병 1여단
 1500여 명은 김윤근 준장의 지휘하에 서울로 들어오고 있었다.
 김 준장은 박 소장을 만났다. 그리고 노량진쪽에서 한강 인도교로 진입했다.
상황은 험악해졌다. 인도교에서 해병대와 육본 헌병 사이에 총격전이 벌어졌다.
 헌병대는 50여 명, 장 총장의 지시로 급파된 저지 병력이다.
 헌병대는 GMC 트럭 7대로 바리케이드를 쳤다.

해병대는 그 차량 봉쇄를 뚫었다. 하지만 한강 다리 중간 지점에 헌병대의 새로운

 저지선이 있었다. 박 소장은 차에서 내렸다. 헌병대 쪽에서 총알이 날아왔다.
 박 소장은 무시한 채 다리 위를 앞장서 걸었다. 그 장면은 지도자의 강력한 의지와
 침착한 솔선수범이었다. "나를 따르라"는 박 소장의 결의는 극적으로 실천되고 있었다.

 광명인쇄소에 있던 나는 그 일을 알 수 없었다. 초조감이 엄습했다.
새벽 4시25분쯤 수십 발의 총성이 새벽의 고요함을 깼다. 그 총소리는 거꾸로 내게

 안도감으로 다가왔다. "혁명이 무산되진 않았구나." 총소리는 장면 국무총리
 체포조에서 나왔다. 체포조는 박종규 소령 주도하에 차지철 대위 등 공수단 중대장
 6명으로 구성됐다. 제2공화국 내각책임제의 실권자인 장 총리의 숙소는 반도호텔
(현 롯데호텔 자리)에 있었다. 체포조가 급습하기 10분 전에 장 총리는 피신했다.
장 총리는 혜화동의 카르멜 수도원으로 숨었다. 총리 체포조는 작전에 실패했다.
그 화풀이를 하는지 그들은 공중에 대고 총을 쏜 것이었다.

 그리고 10분이 지났을까. 인쇄소 앞에 지프가 급정거하는 소리가 났다.

 박 소장이 인쇄소에 들어왔다. 그는 흥분하고 있었다.

 "장도영이가 헌병을 시켜 나를 쐈어. 내가 목숨 걸린 우리들의 혁명계획서까지 그에게
전부 주었는데. 이럴 수 있나" 하고 분노에 부들부들 떨었다. 나는 "어떻게 된 겁니까"
하고 물었다. 박 소장은 그 직전의 긴박했던 상황을 간략히 말해줬다.
 "한강 다리를 건너는데 헌병들이 쏜 총알이 막 날아와. 나는 지프에서 내렸지,
 그리고 다리를 걸어서 건너갔지. 이쪽에서 응사하니까 잠시 후 헌병대가 싹 사라졌어."

인물 소사전 김재춘(1927~2014)= 육사 5기 출신의 5·16 주체. 거사 때 제1혁명
지휘소였던 영등포 6관구 사령부의 참모장(대령)이었다. 비밀누설로 6관구에서
 궐기군과 헌병대가 대치할 때 상황을 장악했다. 국가재건최고위원과
3대 중앙정보부장을 지냈다. 8, 9대 국회의원. 5·16 주체 가운데 5기 세력의 대표로
육사 8기 출신을
 이끌던 김종필(JP)과 정적(政敵) 관계였다. 최고회의와 군부 내 반JP세력을
규합해 김종필의 1차 외유를 압박했다. 정보부장 땐 JP의 비리를 캐려 했다.

◆정리=전영기·한애란 기자 chun.younggi@joongang.co.kr

[김종필 증언록 '소이부답'] <11>



5·16 D데이의 24시간새벽 5시 KBS 박종세 아나운서
"은인자중하던 군부는 …" 첫 방송 박정희, 육본에서 장도영과 담판
"조국에 반역이 되면 자결하겠다"

그리고 박 소장과 나는 남산의 KBS 라디오방송국으로 향했다. TV가 없던 시절이다.
 송국은 공수단이 점령하고 있었다.


 숙직 직원 대부분이 도망쳤다. 우리는 “박종세 아나운서(당시 26세), 어디 있느냐”고
소리쳤다. 그는 조그만 외신(外信) 텔레타이프실의 책상 구석에 숨어 있었다.

 그는 와들와들 떨었다. “공비(共匪)가 나타난 줄 알고…”라며 잔뜩 겁을 먹고 있었다.
나는 그의 어깨를 두드려 안심시켰다. 6개 공약이 들어 있는 혁명취지문을 주었다.
 박종세는 ‘혁명’이라는 글자에 흠칫 놀랐다. 나는 그에게 방송요령을 주문했다.


 “‘오늘은 국민 여러분께 중대한 발표를 해드리겠습니다’란 말을 먼저 한 뒤 차분하게
 읽어 달라”고 했다. 도망쳤던 기술요원들도 공수부대원들이 찾아 데려왔다.

 
박 소장과 우리 일행은 스튜디오 바깥 유리창을 통해 박종세의 방송을 지켜봤다.
 애국가가 울렸다. 이어 “친애하는 애국 동포 여러분, 은인자중하던 군부는 드디어
 금조(今朝) 미명(微明)을 기해 일제히 행동을 개시하여 국가의 행정·입법·사법의
3권을 완전히 장악하고 군사혁명위원회를 조직하였습니다….”

 그의 목소리는 처음에 떨렸다가 차츰 안정감을 찾고 있었다.
그 방송은 역사 전환의 거대한 굉음(轟音)이었다. 혁명은 이제 국민 속으로 파고들었다.
방송은 구시대의 낡은 질서에 치명타를 가했다. 기정사실화의 효과다.
우리의 혁명은 분수령을 넘고 있었다.

 박 소장은 이날 새벽에 장 총장에게 편지를 보냈다. 혁명을 진두지휘해 달라는
협조 요청이었다. 편지는 “참모총장 각하의 사전승인을 얻지 않고 독단 거사하게 된 것을
 죄송하게 생각하옵니다. ··· 만약에 우리들이 택한 방법이 조국과 겨레에 반역(叛逆)이
되는 결과가 된다면… 전원 자결하기를 맹세합니다”로 돼 있다. 박 소장은 자신의
 결연과 비장함이 전달되길 바랐을 것이다.

 육본광장은 6군단 포병대 1300여 명이 점령하고 있었다. 6군단 포병대는 혁명부대

 최초로 서울로 진입한 부대다. 해병대 1개 소대가 본부건물을 포위했다.
 그 순간 긴장감이 더욱 고조됐다.

 박 소장은 2층 총장실로 들어갔다. 장 총장과 대좌(對坐)했다.

 “혁명군 선두에 서달라”는 박 소장의 요청을 장도영은 거절했다.

▶박 소장=“우리는 죽음을 각오했습니다. 출동할 때 유서를 쓰고 손톱까지 깎아 놓았습니다.
혁명에 동참해 주십시오.”

 ▶장 총장=“이번 행동으로 장면 정부에 충분한 경고를 주었으니 출동부대들은

 원위치로 돌아가야 한다.”

 장도영의 주장은 우리 측 장교들을 격앙시켰다. 흥분한 일부 장교는 권총을 빼들었다.
“장 총장을 체포하라”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새로운 고빗길이다. 궐기의 의지가
 무뎌지면 안 된다. 그들이 허튼 수작을 하면 뒤집을 수밖에 없다.

 장도영의 군 수뇌부를 계속 압박해야 했다. 박 소장은 계엄령 선포를 요구했다.

 장 총장은 “내 소관이 아니다. 윤보선 대통령과의 면담이 필요하다”고 버텼다.

 나는 그 상황을 지켜보다가 슬그머니 빠져나왔다. 다시 일을 저질러야 했다.

 새로운 선제적인 공세다. 남산 KBS에 다시 갔다. 이번엔 강찬선 아나운서가 눈에
 띄었다. 나는 품속에서 포고문을 꺼냈다. “방송해달라”고 했다. 그 문서는 내가 미리
 작성해 둔 것이다.

 내 기억에 빼놓을 수 없는 건 완장 제작이다. 그날 저녁 나는 명동 상패가게로 갔다.
하얀 천에 검은 글씨로 ‘혁명군’이라고 쓰게 했다. 밤을 새워서라도 4500장을
 제작해달라고 부탁했다. 이튿날 아침 서울을 비롯한 전국의 거사병력에게 완장을
 나눠줬다. 왼쪽 팔뚝에 완장을 차고는 모두들 좋아했다.


 혁명군에게 자부심과 책임감을 넣어주려 한 것이다. 궐기군 사이에 동지애도 솟아났다.
대군에 둘러싸인 소수의 혁명군에겐 이런 심리적 도구가 필요했다. 하지만 혁명군
 완장은 사흘 뒤 회수했다. 그때부턴 군부의 통합이 중요했고 다른 부대에 위화감을
 주지 않아야 했다.

정리=전영기 기자, 유광종 작가 chun.younggi@joongang.co.kr

인물 소사전 윤보선(1897~1990년)=대한민국 제4대 대통령. 영국 에든버러대에 유학했다.
해방 뒤 미군정청에서 농산국 고문을 지냈다. 48년 초대 서울시장에 발탁됐고,
 49년 상공부 장관을 지냈다. 60년 4·19 혁명으로 이승만 정권이 무너진 뒤
 내각책임제의 대통령으로 선출됐다. 집권 민주당은 윤보선 대통령의 구파와 실권자인
장면 총리의 신파로 분열했다. 5·16 때 “올 것이 왔구먼”이란 논란 많은 말을 남겼다.
 62년 3월 사임했다. 63년과 67년 박정희 후보와 대선 경쟁을 벌였지만 연거푸 패했다.

소이부답 [12]육사 생도 혁명 지지행진
상황 종료, 구질서가 무너졌다 … 이한림 "내 승인없이 성공 못해" … JP "그 말 용서할 수 없었다"
하지만 거사는 미완성이었다. 그 물결 속에 불길한 기운이 퍼지고 있었다. 주한미군

 사령관 매그루더의 비판적인 자세, 육군 참모총장 장도영의 모호한 처신,
 1군사령관(중장) 이한림의 거부 언동은 주요한 장애물로 등장했다.

 한국군 작전 지휘는 주한미군 매그루더(대장)의 권한이었다. 매그루더는 궐기군

출동을 작전지휘권의 이탈과 훼손으로 규정했다. 그는 저지와 진압 작전을 구상했다.
 윤보선 대통령은 진압군 동원에 반대했다. 내각제의 총리는 실질적인 군 통수(統帥)
권을 갖고 있었다. 장면 총리는 피신 상태였다. 그것은 우리에게 유리한 여건으로
 작용했다.


1961년 5월 18일 오전 서울 태평로. 육군사관학교 생도 800여 명이 5·16을 지지하는
 시가행진을 벌이고 있다. 생도들의 오른쪽에 덕수궁 돌담과 대한문의 지붕이 보인다.
몰려나온 시민들 앞엔 계엄군이 착검한 총을 들고 서 있다. 5·16은 육사를 비롯한
3군 사관생도들의 거사 지지로 성공 단계에 접어들었다. [중앙포토]

소이부답13 미 8군 사령관과의 담판 

"내 허락 없이 혁명을 했다고?" 매그루더는 성난 사자 같았다 …

 

JP "혁명을 누가 미리 신고하나" 지지 않고 맞고함 쳤다.

돌이켜보면 미8군은 3600명의 혁명군에 가장 위협적인 존재였다.
5만6000명이 한국에 주둔하고 있었다. 미군 사령관은 한국군에 대한 작전지휘권을 갖고 있었다.
 한국 정부에 대해서도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매그루더는 박정희 소장을 의심했다.
공산주의자일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그 이유로 박 소장을 강제예편시키려 했다.

매그루더가 5월 16일 오전 AFKN을 통해 "군사 쿠데타는 무효"라고 선언했다. 하지만
 나는 겁나지 않았다. 미군 사령관의 선언은 입장 표명의 수준이었다. 말만 했지
 행동으로 한 건 하나도 없다. 말로 영향력은 행사할 수 있다. 하지만 목숨 걸고 덤비는
혁명군의 결행력을 제압할 순 없는 법이다.

 오전 10시. 미8군 사령관실 문이 열렸다. 싸늘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통역을 맡은

 한상국 중령이 서 있었다. 정면 의자에 매그루더 사령관이 앉았다. 옆 소파 군인도
 별 넷 대장이었다. 한 달 뒤 매그루더의 후임자가 될 멜로이(Guy S. Meloy Jr.)
 대장이었다. 나는 멜로이 옆에 앉도록 안내됐다.

대화는 정상화됐다. "당신들은 어떤 사람인가. 왜 혁명을 하려 했나.
" 매그루더는 근원적인 문제를 내게 물었다. "나는 포트 베닝 미 육군보병학교에 입학해
미국을 좀 봤다. 근대화된 인사관리, 물자관리, 조직관리 방법을 배웠다.
 이런 미국을 우리나라에 비춰 보니 나라 꼴이 이래서는 안 되겠다 싶었다.
 전부 뒤집어서 새로 해야겠다는 발상뿐이었다. 구 정치인들은 머릿속에 욕심밖에 없고
싸움만 했다. 당신의 조국처럼 우리도 밥 먹는 거 걱정 안 하고 자유롭게 민주주의적으로
운영되는 나라를 만들고 싶었다. 이게 혁명을 한 이유다."

인물 소사전 가이 멜로이(1903~68년)=1961년 6월~63년 7월 주한 미군 사령관(대장).
50년 6·25 남침 때 미군 제24사단 19연대장(대령)으로 참전했다.
그해 7월 대평리(현 세종시) 전투에서 직접 장갑차를 이끌고 싸우다 다리에 총상을 입었다.
 이때의 공로로 수훈십자훈장을 받았다. 미국으로 돌아가 육군정보국장, 미 제4군
 사령관을 지냈다. 60년 주한 미군 부사령관에 임명돼 다시 한국에 왔고, 이듬해 주한
 미군 사령관에 올랐다. 63년 7월 한국에서 전역식을 갖고 36년의 군 생활을 마감했다.
소이부답14 혁명의 기질

"혁명의 기질 세상에 퍼뜨려라" 박정희·JP 새 통치체제 구축 …

  30·40대 젊은 권력의 탄생


1961년 5월 20일 국가재건최고회의가 열린 뒤 최고위원들과 새로 임명된 내각의
 각료들이 기념 촬영을 했다. 국가경영 세력의 근본적인 변화를 실감나게 보여준다.
 앞줄 왼쪽부터 배덕진 체신장관(준장), 고원증 법무장관(준장), 이주일 최고위원(소장),
김홍일 외무장관(예비역 중장), 박정희 부의장(소장), 장도영 의장(중장),
 김종오 합참의장(중장), 김동하 위원(예비역 해병 소장), 박임항 위원(중장),
김신 공군참모총장(공군 중장), 김성은 해병대사령관(해병 중장), 정래혁 상공장관(소장).
김종필은 중앙정보부장에 임명돼 최고위원을 맡지 않았다. [사진 김종필 전 총리 비서실]


최고회의 구성원은 장도영 의장(중장)이 38세로 대부분 30대였다. 박정희 부의장이 44세로 최고령이었다. 장도영 중장이 수반을 겸임한 내각도 평균 39세였다. 외무부 장관인 김홍일(예비역) 중장만이 50대(53세)였다.
 장면 정부 출범 때 장관의 평균 나이는 55.8세다. 국가 경영의 핵심 세력이 세대 교체됐다. 당시 혁명 장교들 대부분이 미국 유학 경험이 있었다. 51년에서 61년까지 한국군 장교 1만1000명이 미국에 다녀왔다. 군사학교에서 국가 기구의 근대적인 운영과 관리를 배웠다. 당시 정부에는 기획예산제도나 심사분석제도조차 없었다.

 이제 혁명의 기질(氣質)을 세상에 퍼뜨려야 한다. 그때 민심은 나라의 거대한 전환을 원했다. 나는 혁명의 불꽃을 국민 속에 점화시키려고 생각했다. 그에 따라 내가 특별히 중시한 기관이 있다. 최고회의 직속인 국가재건국민운동본부, 국가재건기획위원회, 중앙정보부였다.
[15]한국판 CIA 출범" 혁명을 뒷받침하는 무서운 존재" 거사 직후 중앙정보부 창설 … '음지서 일하고 양지를 지향' 부훈 JP "숨은 일꾼 되라는 뜻 내가 지어"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 과거 중앙정보부(현 국가정보원)의 위세에 붙은 비유다. 김종필(JP)은 중앙정보부의 창설자이자 초대 수장이다. 그가 회고하는 창설 이유는 이렇다. "혁명 과업을 뒷받침하려면 무서운 존재가 필요하다." JP는 중정의 수사권 보유를 한시적인 특수 상황으로 규정했다. 민정 이양 때 수사권을 검찰에 환원시키려 했다. 하지만 그 구상만큼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혁명의 실질적 설계자 역할을 하고도 왜 최고회의 위원으로 나서지 않는가." 1961년 6월 5일, 내가 중앙정보부장 신분으로 언론에 처음 모습을 드러냈을 때 받았던 질문이다. 나는 답했다. "나는 앞에 나서지 않고 중앙정보부장으로 일하려 한다."

 5·16 혁명의 성공으로 나는 ‘혁명 설계자’의 임무는 마쳤다. 이젠 혁명정부를 뒷받침하는 보조자 역할에 충실하기로 했다. 국가 개조라는 큰일을 이루려면 악역(惡役)도 필요하다. 혁명 정신, 궐기의 뜻을 아는 사람이 그 일을 주도해야 한다. 남들은 해(害)가 돌아올까 두려워서 주저했다. 내가 다시 나설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 중앙정보부를 만들고



JP가 정보부장 시절 세운 부훈석(97년까지 사용). 부훈은 ‘우리는 음지에서 일하고
 양지를 지향한다’이다. 이 부훈석은 현재 내곡동 국정원 청사에 보존돼 있다.


[사진 국가기록원]


 

 나는 중앙정보부 부훈(部訓)을 지었다. 미국 CIA 표어는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다. 성경 구절에서 인용한 모토다. 나는 정보기관이 무엇을 하고 어떤 곳인지를 간결하게 표현하기로 했다. 그래서 만든 부훈이 이것이다. ‘우리는 음지(陰地)에서 일하고 양지(陽地)를 지향한다’.  중앙정보부는 근대화 혁명의 숨은 일꾼이어야 한다. 정보부원은 자꾸 나타나려고 하면 안 된다. 숨어서 정부를 뒷받침해야 한다. 밖으로 드러나는 건 사람이 아니라 그 성과여야 한다. 응달에서 묵묵히 일하는 걸 몰라줘도 좋다. 우리가 만든 정보를 국정 책임자가 사용해서 국가 발전에 이바지하면 그게 바로 양지를 사는 것이다. 그런 원칙과 철학을 담았다.

 나는 5월 29일 검찰총장과 군 첩보대·공수부대·방첩대장의 업무 보고를 받았다.
 정보업무를 조정·감독하는 권한에 따른 것이다. 31일엔 해군과 공군 정보국장을 만나 업무를 지시했다. 6월 10일 정식 창설식을 가졌다.

 정보부 조직은 두 명의 차장 아래 4개국 체제로 구성했다.
 행정관리차장은 이영근, 기획운영차장은 서정순이 맡았다. 제1국장(총무) 강창진, 제2국장(해외) 석정선, 제3국장(수사) 고제훈, 제5국장(교육) 최영택을 임명했다.  모두 육사 8기다. 거사에 도움을 준 장태화·김용태를 각각 정치·경제 담당 고문으로 위촉했다. 신직수 변호사는 법률 고문으로 영입했다. 부설 조직으로 정책연구실을 만들었다. 최규하·김정렴·김학열 등 관료 출신과 윤천주(고려대)·김성희(서울대)·강상운(중앙대) 교수 등 23명이 위원으로 참여했다.

 정보요원은 육본 정보국과 방첩대(CIC), 첩보대(HID), 헌병대(CID) 출신 중 정보
 업무를 해본 사람을 선택했다. 검찰과 경찰의 정보수사요원도 추천받았다. 선발 기준은 ‘얼마나 경험이 있느냐’였다. 제2차 세계대전 때 일본군 소속으로 하와이에서 미군 암호를 해석했던 통신요원을 채용하기도 했다. 선발 못지않게 교육이 중요했다. 정보부 설립 뒤 서둘러서 이문동에 정보학교를 세웠다. 요원들은 거기서 교육을 받아야 본부에서 근무할 수 있었다. 교육 과정에서 능력이 떨어진다고 판단되면 원대 복귀시켰다.

국가의 새 질서를 만들려면 무서운 데가 하나 있어야 했다. 무섭다는 게 다른 게 아니다. 엄존(儼存)하면서 사안을 다룰 때 엄정하게 법대로 하면 그게 바로 무서운 곳이된다.
장도영 육참총장 제거[16]

"장도영 언행 혁명 방해" JP, 박 소장에게 보고 않고 기습 체포 … 박정희 "혁명에도

 의리가" … JP "고뇌·아픔 없을 수 없었다"
 JP에게 늘 의문의 인물이 있었다.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내각수반, 국방부 장관,
 육군참모총장, 계엄사령관의 5개 직책을 한 손에 쥐고 있던 장도영이다.
 그는 혁명세력에게 있어서 가장 경계해야 할 존재였다. 중앙정보부장 JP는 그를
 체포하기로 결심했다. 박정희 부의장에겐 비밀로 부쳤다.


 1961년 5월 24일 장도영은 난데없이 기자회견을 통해 "케네디 미국 대통령을 직접
 면담하기 위해 미국을 방문키로 했다"고 발표했다. 전날인 23일엔 박정희 부의장이
 매그루더 사령관과 회동하는 등 미군이 혁명정부를 인정하도록 하기 위해
 노심초사(勞心焦思)하던 시기였다. 장 의장의 발표는 우리와 사전에 상의 없이 이뤄져 ‘도대체 무슨 뜻을 품고 있을까’라는 의심이 들었다. 케네디 대통령을 만나서 무슨
 언질을 받아 엉뚱한 일을 벌일지도 모른다는 의구심도 생겼다.


그는 또 사흘 뒤엔 비상계엄을 경비계엄으로 바꿨다. 이 역시 우리와 사전 협의가
 없었다. 장 의장의 속을 알 수 없었다. 혁명 전후 그의 기회주의적인 행적은 나의
 주시 대상이었다. 거사를 준비하고 있던 4월 10일에도 그는 박정희 소장을 통해 내가 작성한 혁명계획서를 전달받았지만 끝내 반환하지 않았다.


 5·16 새벽엔 한강 다리를 건너던 혁명군에 발포를 명령하더니 오후엔 혁명 지지 쪽으로 돌아섰다. 나는 이제 중앙정보부장으로서 혁명을 흔드는 세력을 눌러야 했다. 5월 31일 장 의장은 AP통신과 회견을 통해 8월 15일을 전후해 민정 이양을 할 수 있다는 취지로 발언했다. 반혁명을 도려내는 악역을 맡아 할 사람은 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문재준은 박 부의장의 질책을 받은 뒤 박치옥 공수단장 등과 만나 "7월 3일 박정희와
 김종필을 해치우자"고 모의하고 병력 동원계획까지 세웠다. 이 첩보는 사전에 정보부의 정보망에 걸려들었다. 나는 장 의장을 제거하기로 결심했다.
 박 부의장에게 보고할 것인가 말 것인가 무척 고민했지만 결국 보고하지 않기로 했다.


 인디언 아파치족은 미군 토벌대와 맞서 싸우기 전 "Now you die(너 이제 죽는다)"라고 외치며 달려들었다고 한다. 나는 그런 심정으로 장 의장을 겨냥했다. 장 의장은 그런
 우리의 움직임을 예감했는지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중앙청 내각수반실 안의 부속실에 머물렀다. 내각수반실엔 권총으로 무장한 헌병 10여 명이 늘 그를 호위하고 있었다.


 나는 중앙정보부 요원 20여 명을 동원하고 헌병대의 지원을 받아 7월 2일 오후 장도영 체포를 지시했다. 이튿날 새벽 정보부 요원들의 기습적인 중앙청 진입에 헌병들은 저항하지 못했다. 장 의장은 자택에 연금됐다. 그 직후 내가 장 의장 집으로 갔더니 "왔구먼, 이제 왔어…"라며 체념하는 투였다. "각하, 제가 앞으로 어떻게 해 드리면 좋겠습까"라고 물었다. 장 중장은 "아무것도 하지 않을 테니, 나 미국에만 보내 주게"라고 답했다. 나는 "좋습니다. 미국에 보내 드리겠습니다.

17 인간 종필의의 성장

조선인 무시했던 일본인 교장 … 청년 JP, 주먹을 날렸다 … 스물에 처음 본 태극기 … '한국 이튼 스쿨' 꿈 안고 사범대 진학



① 공주중학교 3학년 때 급우들과 찍은 사진. 뒤에 앉아 있는 학생이 김종필(JP) 전 총리다. ② JP가 공주중(5년제) 4학년 때인 1943년(17세) 즐겨 타던 경주마에 올라 포즈를 취했다. 그는 당시 이 학교의 승마(乘馬) 부장이었다. ③ 부여국민학교 1학년 때 모습이다. [사진 김종필 전 총리 비서실]
대전 동광국민학교에서 교생 실습을 하던 1944년 10월이었다. 부친의 회갑연에 참석
 하려고 부여 집에 들렀다 돌아가는 내게 어머니는 곶감을 4접(1접은 100개)이나
 싸주셨다. "하숙집 주인 주고, 사범학교 담임과 너 근무하는 국민학교 교장선생님
 드려라. 남은 하나는 너 먹고."




 교생 김종필이 왔다고 소리를 질렀는데 대답이 없었다. 한참 불렀더니 방에서 어린
 학생 딸이 나오길래 "선물이니 아버지 드려라"라며 건네주려 했다. 그때 ‘선물’ 소리를 들은 교장 부인이 얼른 행주치마에 손을 닦으며 부엌에서 나왔다. 못 들은 체할 때는
 언제고, 이제 만면에 웃음을 띠고 곶감을 받으려 했다.

 ‘에잇, 고약한 여편네.’ 나는 곶감을 도로 가지고 하숙집으로 돌아와 버렸다.

 다음날 아침 조회 시간. 기시무라 교장이 나를 앞으로 나오라더니 내 얼굴을 향해
 주먹을 날리는 게 아닌가. 그는 "젊은 놈이 그런 실례가 어딨느냐"고 소리를 질렀다.


 나도 대들었다. "그럼 당신 부인은 실례 아니냐." 그 소리에 교장이 또 한 대 때리려고 들길래 냅다 덤벼들어서 주먹으로 몇 대 쥐어박았다. 나는 평소 기시무라 교장이
 조선인을 무시하고 민족감정을 긁어 내리는 데 대한 반일감정으로 더욱 거세게 그를
 몰아붙였다. 기시무라 교장은 다른 선생들이 말려서 간신히 곤죽이 되는 걸 피했다.


 그는 씩씩거리며 대전 헌병대에 전화를 걸었다. "여기 아주 사상이 나쁜 조선 놈이
 있는데 데려다가 당장 취조하시오." 그 길로 출동한 헌병대 차에 실려서 철창에 갇혔다.



JP가 두 살 때 충남 부여군 규암면 외리 159번지 집에서 찍은 사진.
[18]군인의 길 들어선 JP 소이부답
"밑바닥부터 기어 올라가자" 가세 기울어 학교 다니며 택시운전 … 군 입대 열흘 만에
 탈영, 재입대 … JP, 육사 가는 길은 험난했다
 8기 교육훈련은 5개월이었다. 졸업할 때 학과 성적은 공동 1등이었다.


 면접시험을 보는데 공주중 선배인 박병권(국방부 장관) 교무처장이 면접관으로 앉아
 있기에 반가워 웃었더니 면접 태도가 불손하다고 점수가 깎였다.
 종합성적 6등으로 졸업했다. 졸업식이 열린 49년 5월 23일, 1년 만에 어머니를 만났다. 대학을 그만두고 13연대에 들어가면서 집에 일절 소식을 끊었다.
 내 힘으로 일어선 모습을 보여줘 놀라게 해드릴 생각이었다.
 "이 자식아, 살아 있었구나." 눈물 흘리는 어머니를 꼭 안아드렸다.
(19) jp의 전쟁과 사랑

전쟁 중에 미국 유학 … 길 가득 메운 자동차 '미국의 힘' 느껴 … 1년 만에 전투 복귀 … "남편과 죽겠다" JP 찾아온 전선의 신부
 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2월 15일 대구 중앙교회에서 여선생 박영옥과 결혼했다.
 내가 스물다섯, 아내가 스물두 살 때다. 그 아내가 지난 2월 21일 영면했으니 64년을
 해로한 셈이다. 아내의 작은아버지인 박정희 중령은 당시 9사단 참모장으로 전방에
 있을 때여서 결혼식에 참석하지 못했다.


 대신 전날 밤 부관(副官) 편에 결혼 축하편지와 함께 GMC트럭에 잔치용 황소 한 마리를 선물로 내려 보냈다. 그즈음 중공군은 파죽지세로 오산까지 내려왔다.
[20]근대화 선봉에 선 기업인
"도둑질도 해 본 놈이 잘하지 않소" 남궁련 '구속 실업인 석방' 요구 …
 JP "해외 보내 한 건씩 물어오게 하자"


자유민주주의를 하려면 경제발전이 우선돼야 한다. 배고픈데 무슨 민주주의가 있고
 자유가 있겠는가. 자유나 민주주의는 그걸 누릴 수 있는 경제력이 뒷받침돼야 가능한 것이다. 근대화의 첫 번째는 경제발전이다. 국민이 잘살 수 있게 되면 민주화를
 달성하고 그 다음에 복지국가로 이행하면 된다. 이 목표들을 동시에 이룰 순 없다.
 제2차 세계대전 뒤 많은 신생·후진국들이 경제발전과 민주화를 동시에 달성하려고
 했지만 모두 실패했다. 두 마리 토끼를 잡으려다 다 놓친 것이다.

 이런 정신은 2300년 전 맹자(孟子)가 ‘무항산 무항심(無恒産 無恒心)’이라고 한

 얘기에 잘 나타난다. 항산은 일정한 재산이나 생업을 말하고 항심은 너그럽고 여유
 있는 마음을 뜻한다. 항산이 없으면 마음이 편안하지도 않고, 자유로운 생활도 못한다.


맨날 허리를 구부리고 살 수밖에 없다. 재산이 있으면 싫어도 너그러운 마음이 생기는 법이다. 내가 고향 부여에 미리 만들어 놓은 내 묘비에 ‘無恒産 無恒心을 治國(치국)의 根本(근본)으로 삼아…’라고 써 놨는데 거기엔 산업화를 먼저 해서 민주화의 토대를
 닦아야 한다는 내 평생의 정치철학이 담겨 있다. 항산이 있어야 항심 민주주의가
 작동하는 것이다.


이병철 삼성물산 사장은 당시 발표된 구속대상자 중에서 이름이 맨 위에 올라가 있었다. 그는 마침 일본에 머물러 있어서 체포를 피했다. 혁명정부가 기업인들을 다 잡아들인다는 소문이 돌아서인지 귀국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잘 오셨습니다. 내가 보기에 우리나라 경제인 중에서 리더십을 발휘할 분이 이 사장님밖에 없습니다"고 말했다. 이 사장은 이 말에 마음을 놓은 듯 표정이 풀어졌다.
 
 나는 대뜸 "사장님께서 실업인들을 전부 모아 경제인협회를 만들어서 회장을 맡아
 주십시오. 우리나라 경제재건에 앞장서 주십시오"라고 요청했다.
 그는 "적극 협조하겠다"고 약속했다. 다음날인 27일 이병철 사장은 이병희 서울분실장 안내로 태평로 국가재건최고회의 청사에 갔다.
(21)  현대사 드리미 황태성 사건

김일성이 내려보낸 황태성, "나는 밀사, 박정희 의장·김종필 만나게 해달라"
‘거물 간첩 황태성 사건’은 한 편의 드라마다. 북한 정권 무역성(省) 부상(副相)인
 황태성은 김일성 지시로 남파됐으며 밀사(密使)를 자처했다. 황태성은 박정희의
 셋째 형(박상희·朴相熙)과 동갑 친구. 박상희는 김종필(JP)의 장인이다.
그는 박정희·JP와의 면담을 요구한다. 지금까지 이 사건 한쪽엔 억측과 의심이
존재했다. JP는 "세상에 떠도는 말 중엔 알고 보면 허튼소리가 많다"며 사건의 진상을 공개 증언한다.

 황태성을 잡아서 가둬 놓고도 나는 박정희 의장에게 아무 보고도 하지 않았다.

 박 의장은 과거 좌익 혐의 전력 때문에 사방에서 사상을 의심받던 차였다.
 김창룡의 숙군(肅軍) 태풍에 휩쓸려 사형 구형까지 받았던 사람이다.


 그가 늘 걱정하고 신경 쓴 문제가 그것이었다. 박 의장이 이 보고를 받으면 얼마나
 놀라고 당황할지 나는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가급적 조용히 내 선에서 알아서
 처리하려고 했다. 하지만 황태성이 김일성 지시로 내려온 게 분명한 이상 박 의장에게 보고하지 않을 수 없었다. 황태성을 체포한 지 며칠이 지나 장충동 최고회의
 의장공관으로 찾아갔다.

 "각하, 황태성이라는 사람을 아십니까?"

내 질문에 박 의장이 놀란 눈으로 날 쳐다봤다. "아니, 임자가 그 사람을 어떻게 알아?"

 "놀라실 것 없습니다. 그 사람이 평양에서 내려와 각하와 저를 만나게 해 달라고 졸랐다고 합니다.

[22]밀사냐 간첩이냐 황태성 사건

"좌익 경력 혁명 지도자와 협상해봐라" 김일성은 박정희를 오판했다

박정희 의장은 자신의 사상에 대한 의심 때문에 시달리고 있었다. 5·16 혁명 뒤에도
군내 일부 세력은 "박정희는 빨갱이다"고 떠들며 음해했다. 미국도 박 의장의 사상을
 의심스러워했다. 오죽하면 내가 ‘반공을 국시(國是)의 제 1의(義)로 삼는다’는
 혁명 공약을 첫머리로 내걸었겠나. 이런 일로 박 의장의 정체가 의심받을 빌미를
 줬다간 자칫 혁명 과업까지 망칠 수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박 의장이 자신의 좌익
 콤플렉스에 대해 내게 고충을 토로한 적은 한 번도 없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내가 그 심중을 헤아리고 있어서다.
23한미 갈등과 황태성 사건

박정희 사상 의심했던 미국, 그의 정체를 황태성에게 캐물었다
나는 황태성을 처음 붙잡았을 때부터 빨리 재판절차를 마치고 간첩죄로 처리할

 생각이었다. 이 문제로 곤란한 처지에 놓일지도 모르는 박 의장을 위해서였다.
 그땐 툭하면 박 의장을 사상적으로 음해하는 세력이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중앙정보부가 황태성을 간첩 혐의로 군법회의에 넘긴 건 61년 12월 1일이었다.

63년 가을 제5대 대통령 선거에서 야당의 윤보선 후보는 황태성 사건을 쟁점으로 삼아 이념 공세를 폈다. 박정희 후보의 좌익 전력을 집요하게 문제 삼았다.
 윤보선은 "김종필이 몇 차례나 황태성을 만났다더라" "공화당 창당자금을 황태성이
 댔고, 그로부터 공화당 창당에 대한 밀봉교육을 받았다"고 주장했다. 터무니없는
 소리였다. 윤보선은 선거 막판까지 박정희 의장을 ‘빨갱이’로 몰았다.
 박 의장은 15만 표의 적은 표차로 당선됐다.

 박 의장이 대통령에 당선(63년 10월 15일)되자 미국 측의 황태성 조사 요구가 쑥

 들어갔다
황태성 처형을 두고 떠드는 이야기 중엔 거짓이 적지 않다. 김형욱은 회고록에서 자신이 박 의장을 설득해 황태성을 서둘러 처형토록 했다고 주장한다. 말도 안 되는 소리,
 거짓말이다. 황태성은 법적 절차를 거쳐 사형이 집행된 것뿐이다. 정보부장이 거기에 개입할 게 없고, 개입해서도 안 된다.

61년 12월 31일 저녁 6시, KBS TV(채널 9)가 첫 TV전파를 발사했다.

 TV청사 제1스튜디오에서 박정희 의장과 송요찬 내각 수반 등이 참석한 가운데
 개국식이 열렸다.
[24]2005년 한일수교 40년, 경륜과 지혜담아 한일관계 대안을 내농다

"황후 민비 시해, 일본 황거에서 같은 일 일어났다고 상상해보라" …

 "일본이 독도 원한다면 한국과 전쟁을 해야 할 것"
"올해 일본인들은 일·러 전쟁 승리 100주년을 기념하고 있습니다만, 한국인에게 있어서는 그 승리가 식민지로 직진(直進)하는 분수령이 되었습니다.

"올해는 고종의 황후인 민비가 일본의 미우라 공사 일당에 의해 참살된 지 110년 되는 해입니다. 이런 일이 일본의 황거(皇居)에서 일어났다고 상상해 보시면 한국인들이
 가슴에 품고 있는 역사적 분노가 얼마나 깊은지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토 히로부미( 1841~1909, 가장 왼쪽). 일본 초대 총리. 중국 하얼빈에서 안중근 의사에게 저격당해 숨졌다. 사이고 다카모리( 1828~1877, 가운데). 메이지(明治)유신의

 주역이다. 미우라 고로( 1847~1926, 오른쪽). 주한 일본공사 시절 낭인(浪人)들을
 동원, 명성황후를 살해했다.
영국 소설가 조지 오웰은 "과거를 지배하는 사람이 미래를 지배한다. 그런데 현재를
 지배하는 사람이 과거를 지배한다"고 말했습니다.
 현재를 사는 우리는 과거를 직시(直視)함으로써만 미래를 투시(透視)할 수 있습니다.

일본 천황께서도 자신이 백제 왕족과 혈연으로 이어져 있다는 말씀을 한 적이 있습니다.(※2001년 아키히토)

 고대에 한반도를 거쳐 일본으로 건너간 사람·기술·문화가 일본 문명의 기초가 되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역사적 사실입니다. 
한·미·일·중 네 나라의 GDP를 합산하면 세계 전체의 반을 넘어섭니다. 저는 아시아의 협력 체제를 구축하기 위한 첫 작업으로 총리 시절 아시아를 위한 금융기구 즉 AMF(Asia Monetary Fund)의 창설을 제의한 바가 있었습니다.

프랑스와 독일의 경우 나폴레옹의 침공, 보불(普佛)전쟁, 제1·2차 세계대전 등 네 차례의 전쟁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구원(舊怨)을 넘어서 화해 협력해 유럽연합(EU)의
 경제권에서 번영을 함께하고 있는 것을 우리는 익히 보고 있습니다.
 일본은 분로쿠 게이초(文祿慶長·※임진왜란)의 침략과 식민지배의 고통을 한국인들로 하여금 잊게 해줘야 합니다.
[25] 일 회담 동력을 만들다. 
나라 일으킬 밑천이 필요했다 … 도쿄로 날아간 JP "한국 분단은 일본 책임 …

 고통 비용 내라" 이케다와 담판


45년 7월 26일 연합국인 미국의 트루먼 대통령, 영국의 처칠 총리(후에 애틀리로 교체), 소련의 스탈린 원수는 독일 포츠담에서 일본군의 무조건 항복을 요구하는 회담을 했다. 일본은 8월 10일 포츠담 회담의 결과를 수용했다 뒤집기를 거듭했고 미국은 8월 14일에야 일본의 무조건 항복을 받아들였다.
[26]김종필 오히라 회담
JP "도요토미 히데요시처럼 두견새 함께 울려보자" …
 일본 고사 꺼내자 오히라는 속내를 털어놨다
● 인물 소사전 유진오(兪鎭午·1906~87)=경성제국대학(서울대) 법학과 졸업 뒤
 보성전문(고려대 전신) 법대 교수를 지냈다. 헌법기초위원회 전문위원을 맡아 1948년 대한민국 헌법을 만드는 데 참여했다. 13년간 고려대 총장(1952~65년)을 지냈고 5·16 직후 국가재건국민운동 본부장을 맡았다. 66년 야당 민중당의 대통령 후보로 스카우트된다. 이후 통합 야당인 신민당의 총재(1967~70년)를 역임했다. 호는 현민(玄民).

JP 육성증언 영상(26) "제 3의 이완용이라도 좋다. 두고 봐라"
-김종필 전 총리=3+2+1+알파. 그래서 8억 (달러)까지 받아오면. 어디 나라 경제 좀

 일으킬 수 있겠다. 박(정희) 대통령도 그렇게 생각하고 나도 그렇게 생각했어.
 그대로 했어. 그랬는데 나더러 매국노라 그러더라. 제 2의 이완용이라고.


 ‘제 3의 이완용이라도 좋고, 매국노도 좋다. 두고 봐라.’ 내 속으로 그랬어. 내가 나라 팔아먹으려고 가나. 그때 흔히 잘 한 소리가. 일본 돈 들어오면 매판 자본이 돼서 나라가 팔려가지 않느냐. 그래서 내가 그걸 대항하는 소리로 뭐라고 했는지 알아. 대학생한테도 내가 나중에 강의할 때. ‘이봐. 매판자본이건, 무슨 자본이건, 외자가 들어오기까지가
 어렵지. 들어온 다음에는 내 거야. 가져갈텨? 뭘 걱정하느냐’고. 그러니까 박수 치더라.
 [27] 김종필 오히라 회담
 일본 실력자 고노 "독도, 미해결의 해결 상태로 둬야"
65년 정일권 국무총리가 한·일 회담 최종 타결 전에 나의 셋째 형 김종락과 함께 일본을 방문해 "독도 문제를 ‘미해결의 해결’ 상태로 두자는 합의 문서를 교환했다"는 이른바 ‘독도 밀약설’도 헛소문이다.


  실제 독도에 관한 당시 일본의 분위기가 그랬다. 고노 이치로의 인식에서 드러나는
 내용 그대로다. 시끄럽게 떠들어봤자 한국이 독도를 양보하지 않는다는 것, 따라서
 독도 문제는 더 이상 크게 주장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그 시대 일본 정치인들의
 분위기였다. 이를 고노는 ‘미해결의 해결’이라고 불렀다. 말하자면 ‘일본식 해법’인
 셈이다. 결국 한국이 독도를 실질 지배하고 있는 점을 인정하자는 현실적 인식이었다. 그 인식은 합리적이다.
[28] 위안부와 역사왜곡

"위안부 속여서 끌고가는 것 직접 봤는데 꾸며낸 일이라고?" …

 "사설 쓴 논설위원들 다 불러라" … JP, 와타나베 사장 호통쳤다.
[29] 한일회담과 6.3사태

"돌멩이 맞더라도 직접 설득" 들끓는 캠퍼스에 들어간 JP…

 "한국, 대륙 끝 맹장 신세 … 일본을 딛고 태평양으로 나가자"
3월 24일 서울대 교정에선 서울대·고려대·연세대 학생 3000여 명이 모여 소위
  ‘제국주의자 및 민족반역자 화형식’을 벌였다. ‘굴욕적 한·일 회담을 즉시 중지하라.
 도쿄에 체류 중인 매국 정상배(政商輩)는 즉각 귀국하라’는 결의문도 채택했다.
나를 두고 하는 말이었다. 학생들은 나에게 ‘나라 팔아먹는 제2의 이완용이다’라는 등
 별의별 말을 다했다.




 

1963년 6월 3일 서울 시내에 1만5000여 명의 대학생이 몰려 박정희 대통령 하야 등을
 요구하는 한·일 회담 반대시위를 벌였다. 박대통령은 결국 이날 오후 8시 비상계엄을 선포했다. [중앙포토]

 "한반도의 지정학적(地政學的) 위치를 생각해 봐라. 서쪽에는 중공(中共)이, 북쪽에는 소련이 막아서 대륙으로는 갈 데가 없다. 그들은 막강한 국력을 갖고 있는 공산국가다. 그쪽으론 우리가 나아갈 수 없다. 이처럼 우리는 대륙의 끝에 맹장처럼 매달려 있는
 신세가 아니냐. 남쪽은 3000㎞ 이상의 섬들이 늘어서 있다. 일본 제도(諸島)다.
 
 우리가 살기 위해서는 일본을 디딤돌로 해서 태평양으로, 인도양으로, 지중해로 나아가야 한다. 일본이 밉더라도 우리가 살길을 열어나가려면 국교를 정상화시켜야 한다.
 일본으로부터 청구권 돈을 빨리 가져다가 경제개발의 밑천으로 삼아야 한다.
 이게 안 된다면 우리 민족은 정말 쓸모없는 맹장 신세로 끝나고 만다. "

6월 3일은 아침부터 서울시내 18개교 대학생 1만5000여 명이 거리로 쏟아져 나와 한·일 회담 반대를 외쳤다. 이들은 취임한 지 반년도 안 된 박 대통령의 하야(下野)를 요구
했다. 박 대통령은 이날 오후 8시를 기해 서울 일원에 비상 계엄령을 선포했다.
 이게 6·3사태다. 이렇게까지 나오니 내가 견디기 어려웠다. 나는 결심을 했다.
 청와대에 올라가 박 대통령에게 "제가 짐이 된다고 생각하시면 나가겠습니다"라고
 말했다.
한참 침묵하던 박 대통령이 "그래 한 번 더 나갔다 와"라고 말했다. 그래서 해외로
 나간 것이 소위 ‘2차 외유’다. 6월 18일 아내와 함께 출국해 6개월 동안 세상을
 구름처럼 돌아다녔다.
[30]수교 50년 한국관계

·한일 협정 조인 다음날 박정희 "원수라도 필요하면 손잡아야"…

 최근 한·일 관계 악화 지켜본 JP "대일 외교, 냉철하고 일관돼야"
 박 대통령은 대일 청구권 자금(8억 달러)을 받아 종합제철소를 만들고 싶어 했다.
 경제개발에 집중해 기업과 소득, 일자리를 늘리고 북한과 경쟁에서 이기겠다는 생각에 한 푼도 허투루 쓰지 않았다.


소사전 샌프란시스코 대일강화조약(對日講和條約)= 제2차 세계대전을 외교적으로
 종식시키기 위해 연합국 48개국과 패전한 일본이 1951년 9월 8일 미국 샌프란시스코
에서 맺은 평화협정. 미국이 주도했다. 식민지 상태였던 한국은 일본과 전쟁 상태에
 돌입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조약에 초대받지 못했다.


조약은 한·일 관계 정상화 문제를 양국이 따로 해결할 것을 권고했다. 협정에 따라
 대부분의 연합국은 일본에 대한 전쟁 배상금을 포기했다. 하지만 필리핀 등
 아시아 4개국은 ‘전쟁 배상금’을 공식적으로 받은 뒤 협정에 서명했다.


 한국은 원천적으로 배상금을 요구할 수 없는 입장이었다

 

[31]미국의 리더들과 대좌하다. 
로버트 케네디, 책상에 발 올린 채 "미국 왜 왔소?" …
"혁명 설명하러 왔다" 소파에 벌렁 누운 JP
[32] 민주 공화당의 탄생
 "국민, 혁명에 싫증내기 전 신당 만들자" 중정부장 사퇴한
 JP…"여기 올라타 대통령 되셔야" 박정희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61년 8월 12일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이 특별성명을 발표했다. 63년 3월 이전에
 새 헌법을 공포하고, 5월에 총선거를 치러 63년 여름까지 정권을 민간에 넘긴다는
 계획이었다. 며칠 뒤 나는 석정선 정보부 제2국장과 강성원 행정관을 불렀다.
 민정이양 뒤에도 구정치인이 아닌 깨끗하고 유능한 정치세력이 정권을 잡아
 혁명과업을 승계할 수 있는 방안을 연구해 보라고 지시했다.
 
 
<중앙일보 창간 50주년 기획-'우리가 몰랐던 현대사'>
    당의 상징은 소로 정했다. 미국의 민주당은 당나귀, 공화당은 코끼리가 상징이다. 그걸 보고 우리도 그런 상징물이 하나쯤 있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많은 동물 중에도 소로 정한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우선 소는 살아서는 묵묵히 주인을 위해 일하고, 죽어서는 발톱까지 남김 없이 다 바치는 동물이다. 소처럼 헌신적으로 일해서 국가와 국민들에게 봉사하는 정당이 되자는 뜻을 담았다. 또 다른 이유는 내가 소띠다. 당을 만든 사람이 소띠이니 소가 자연스레 상징이 됐다.



사전 창당작업은 비밀리에 진행됐다. 62년 1월 말 종로2가 뒷골목 제일전당포 빌딩에 ‘동양화학주식회사’라는 간판으로 사무실을 냈다. 정보부 이영근 차장과 강성원
 행정관을 중심으로 각계의 신진 엘리트들을 발굴·포섭하는 작업부터 시작했다.

 초기 영입 기준은 ‘새 술은 새 부대에’였다. 정치에 가담한 경험이 있는 사람보다는

 참신한 새 인물을 위주로 찾았다. 당시로서는 진보주의자라고 할 만한 인물들이었다. 주저앉아 있는 우리나라가 일어서서 걸을 수 있도록 끌고 나가려면 진보적인 머리를
 가진 사람들이 필요했다.


 예춘호 부산 동아대 강사, 황성모 서울대 교수, 서인석 뉴욕타임스 서울특파원 등이
 우리의 ‘재건동지회(再建同志會)’에 참여했다. 윤주영 조선일보 편집국장도 뒤에 합류했다. 시·도지부 책임자로는 서울 김홍식, 부산 예춘호, 경기 이영호, 강원 이우영, 충북 정태성, 충남 정인권, 전북 박노준, 전남 최정기, 경북 김호칠, 경남 박규상, 제주 이승택 등 주로 대학교수와 강사들이 활동했다.

[33]대식 정당을 만들다.

67세 변협회장 정구영 "혁명 뒤처리 잘못하면 역적된다"…
 만남서 의기투합 37세 JP "선생은 마지막 선비"


 1963년 1월 18일 서울 조선호텔 그랜드홀에서 민주공화당 발기인총회가 끝난 뒤 78명의 발기인들이 기념촬영을 했다. 맨 앞줄 가운데(왼쪽 아홉째)가 김종필(JP) 발기위원장, 그 왼쪽이 정구영 부위원장이다. 원로 변호사인 정구영은 JP가 1차 외유를 떠난
 이튿날인 2월 26일 공화당 초대 총재로 선출됐다. [중앙포토]


[34]4대 의혹 사건 오해와 진실



멜로이 "주한미군 3만 일본서 휴가…안보 공백 메울 리조트 지어달라"…
JP, 워커힐 건설에 죄수까지 동원…1000만 달러 사업, 220만 달러로 끝


61년 12월 정부는 일본 닛산의 소형차 블루버드를 부품 형태로 수입해 국내에서 조립, 시판하기로 했다. 우선 관광용으로 블루버드 완제품 250대를 면세로 도입하기로 했다. 당시 재일교포 실업가 박노정씨가 전체 자본금 1억원 중 30%를 대고, 70%는 은행융자로 해서 새나라공업주식회사를 세웠다. 부평에 연간 6000대를 생산할 수 있는 공장을

 만들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일본과 국교 정상화(65년 6월 22일 조인)가 되기 전이라 박노정씨가 대겠다는 자금을 국내로 들여올 수 없었다. 한·일 수교 뒤 들여오는 조건으로 한일은행에서 융자를 받아 공장을 만들었다. 그러던 중에 박노정씨가 "돈을 못 대겠다"며 손을 들어버렸다. 
[35]공화당 창당과 군력투쟁
박정희 "대선 출마 않겠다" 고집, 세 번 찾아가 설득한 JP…
"공격 목표는 나, 떠나면 조용해진다" 자의반 타의반 외유
 
"무슨 생각이십니까. 우리가 혁명을 왜 했습니까. 다 같이 죽을 각오로, 조국을 본때
 있는 나라로 재건하기 위해 혁명을 하지 않았습니까. 반대하는 사람들 때문에
 그만두신다니, 안 됩니다." 나는 박 의장에게 매달리다시피 했다.
 설득에 거의 성공하는가 싶었지만, 며칠 뒤 박 의장은 마음을 바꿔 또 그만두겠다고
 했다. 그때마다 내가 달려가서 박 의장 마음을 돌려놓은 게 세 번인가 된다.

‘아름다운 매화도 엄동설한 속에서 고초를 겪은 뒤에야 비로소 그윽이 향기를 사방에
 풍긴다’는 뜻의 ‘매경한고발청향(梅經寒苦發淸香)’을 인용한 말씀이었다. 이 글귀는
 그때부터 나의 좌우명이 되었다.
김 종필의 연역



김종필 증언록 소이부답[笑而不答]을 연재해주신 중앙일보 관계자분께 감사드리면서…
김종필의 소이부답 일부를 저의 짧은 소견으로 정리해 보았습니다.
원문이 필요하신 분은 댓글을 달아주시면 원문 복사할 수 있도록 도와 드리겠습니다.
                      昔暗 曺 憲 燮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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